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을 상징하는 일러스트레이션. [Nikkei]
미국은 그동안 첨단기술 분야에서 선두를 달려왔지만 유독 통신장비 시장에선 약세를 보였다. 실제로 세계 통신장비 기업 톱5에 미국 기업은 하나도 없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버라이즌, 퀄컴 등 쟁쟁한 테크 기업이 참여한 ‘넥스트G 얼라이언스’를 출범하면서 “앞으로 10년간 6G의 미국 리더십을 확립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이 이처럼 6G 경쟁에 먼저 스타트를 끊은 것처럼 보이지만, 중국은 이미 지난해 11월 7일 산시(山西)성 타이위안(太原) 위성발사센터에서 세계 최초로 6G 인공위성(톈옌-5호)을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위성은 우주 공간에서 6G 주파수로 유력한 테라헤르츠 대역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6G 주도권 경쟁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가 5G(5세대)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CGTN]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인공지능(AI), 양자·고성능컴퓨팅, 5G·6G, 신소재, 청정에너지, 반도체, 바이오 등 첨단기술 연구개발(R&D) 분야에 4년간 3000억 달러(약 327조 원)를 투입하겠다고 공약한 것은 중국과의 기술 패권 경쟁에서 절대 패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바이든 당선인은 “‘미국 최우선 투자(investing in America first)’ 정책으로 중국과 필사적으로 싸울 계획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고 밝혔다. 특히 바이든 정부가 첨단기술 R&D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하려는 이유는 자국의 스타트업과 테크 기업들을 육성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이런 기업들이 첨단기술력을 바탕으로 발전할수록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바이든 당선인은 ‘메이드 인 올 오브 아메리카(MADE IN ALL OF AMERICA)’라는 기치를 내걸고 미국 공장에서 미국인 노동자가 만든 첨단제품들이 더 많아질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바이든 정부가 추진할 중국과의 기술 패권 전쟁 전략의 또 다른 방안은 미국 중심의 글로벌 가치사슬(GVC·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바이든 정부는 중국의 도전이 거센 AI, 반도체, 5G 부문에서 동맹국들과 연대해 글로벌 가치사슬을 새롭게 구축하려는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캐나다 컨설팅업체 미래혁신센터(CIF)의 지정학 전문가 아비슈르 프라카시는 “바이든 당선인은 전 세계 5G 이동통신망에서 중국 업체를 배제하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노력을 이어갈 것”이라면서 “미국은 중국이 기술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도록 허용하거나, 아니면 중국의 지배에 도전하든가 양자택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美, 한국‧대만과 반도체 동맹 구축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바이든 정부가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동맹이나 5G 동맹 구축에 나설 수도 있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 분야는 최강인 반면, 생산 능력은 취약하다는 것이 늘 문제로 지적돼왔다.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에 따르면 미국의 반도체 생산 능력은 전 세계의 12%에 불과하다. 퀄컴, 엔비디아 등 반도체 설계에 특화된 기업이 대부분이고, 생산은 대만이나 한국 등 외국 기업들에 맡기고 있다. 반면 중국의 반도체 생산 분야 세계시장 점유율은 이미 15%로 미국을 앞서고 있다. 중국의 점유율은 10년 후 24%로 증가해 대만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오를 것으로 예측된다.이에 미국으로선 대만, 한국 등과 반도체 동맹을 맺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업체인 대만 TSMC가 올해 미국 애리조나주에 120억 달러(약 13조980억 원) 규모의 칩 제조 공장을 세우기로 한 것도 트럼프 정부의 강력한 요청에 따른 것이다. 미국이 중국의 침공 위협을 견제하면서 대만에 각종 무기를 수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바이든 정부 역시 한국 삼성전자에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반도체 공장을 확장해 칩 생산 능력을 강화해달라고 요청할 것이 분명하다. 미국 반도체 전문지 ‘세미컨덕터엔지니어링’은 “최첨단 반도체 기술은 스텔스 전투기나 항공관제, 유도 미사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이기 때문에 미국은 한국, 대만 등과 함께 반도체 동맹을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바이든 정부의 또 다른 기술 패권 전략은 중국의 지식재산권 탈취와 기술 이전 강요 등을 저지하고 전 세계적으로 인재들을 유입한다는 것이다. 바이든 당선인은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게재한 기고문(2020년 3/4월호)에서 “중국을 엄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면서 “중국을 가만히 둔다면 미국의 기술과 지식재산권을 계속 훔쳐갈 것이고, 정부 보조금을 통한 불공정 게임을 일삼으며 미래 기술과 산업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바이든 정부는 앞으로 미국 무역대표부(USTR) 등의 조사를 바탕으로 중국의 기술 절도 등을 면밀히 조사한 뒤 국내법과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해 강력한 보복 조치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정부는 이와 함께 중국을 포함해 각국 인재들에게 문호를 개방한다는 방침이다.
바이든 정부는 트럼프 정부와 마찬가지로 특정 분야에서 대중(對中) 제재 조치를 강화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새로운 기술 표준을 내세워 동맹국들과 함께 중국을 봉쇄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세계 기술 표준이 미국과 서방 및 중국으로 양분될 수도 있다. 애덤 시걸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바이든 정부는 여전히 기술 부문을 중국과의 경쟁에서 주요 원천으로 보고 있으며, 중요 기술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차단하고자 트럼프 대통령의 접근 방식 일부를 계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폴 트리올로 유라시아그룹 기술정책 분석가는 “바이든 정부는 첨단기술과 기초기술 부문에서 통제할 분야를 좀 더 명확히 할 것이며, AI와 양자컴퓨팅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라며 “바이든 정부는 트럼프 정부보다 더 적은 기술을 통제하더라도 반드시 보호해야 할 기술에는 더욱 높은 장벽을 쌓는 방식을 선호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과학 자립과 자강 전략
중국 정부도 바이든 정부에 맞서 7대 신(新)인프라로 꼽히는 5G, AI, 빅데이터 센터, 산업 인터넷, 특고압 송전설비(UHV), 광역철도망, 친환경차 충전시설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는 등 기술 패권 경쟁을 벌일 것이 분명하다. 중국 정부의 기술 패권 전략은 기술 자립이다. 중국 최고 권력기관인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지난해 10월 열린 제19기 제5차 전체회의에서 “과학 자립과 자강을 국가 발전 전략으로 삼고, 세계경제 전쟁터에서 혁신성을 보완해 과학기술 강국 건설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또한 △제조 강국 △품질 강국 △인터넷 강국 △디지털 강국 등 4대 강국을 건설하자는 목표도 제시했다. 이는 첨단 핵심 기술의 국산화로 중국 정보기술(IT) 기업에 대한 미국의 제재에 대응하겠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특히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반도체 기업에 파격적인 세제 혜택 등 각종 지원을 해주기로 결정했다. 중국이 반도체 자립에 올인하는 것은 반도체 기술을 확보해야 미국과의 기술 패권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핵심 반도체 기업을 속속 국유화(國有化)하는 등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다. 중국은 그동안 대규모 자금을 투입했지만 미국의 특허 소송이나 장비 반입 금지 등 견제 탓에 세계 반도체 패권은커녕 기술 자립에도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윌리엄 라인시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은 “미·중 양국의 갈등은 무역을 넘어 외교·안보, 5G, AI, 생명공학 등 핵심 기술로까지 확대되고 있다”면서 “바이든 당선인은 중국과의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 수순을 밟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앞으로 미·중의 기술 패권 싸움에서 승자가 세계 최강국이 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