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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열고 들어가 너의 어미를 만나라어미가 누워 있다 오래 전부터 앓아왔다무슨 병인가 묻지 말고 어미의 뜨거운 이마를 짚어라어미의 熱이 너의 이마에 오를 때까지기다려라, 뜨거운 어미의 熱이 너의 가슴을 태울 때까지나는 하루에도 몇 …
20130128 2013년 01월 25일 -
외박(外泊)
좀 더 쉬었다 갈게요. 하느님!늦게 핀 들꽃도 꽃이잖아요.골목 안, 평생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핀이 개망초꽃 두고 갈까요?저 분도 바르지 않은 눈물 보이지 않으세요?전 이 골목 안, 저 오래된 국숫집 담 밑에 핀어머니 살아 돌아오신 …
20130121 2013년 01월 18일 -
이삿짐
이삿짐은모든 이삿짐은도무지 거룩하기만 해서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다. 뭔가 꽉 차 있어 마음 디딜 틈이 없는 시다. 허공에 마른 붓으로 적어놓은 것 같은 투명한 느낌의 문장. 몇 번 이삿짐을 싸고 풀고 하면 휙 지나가는 인생살이. 내…
20130114 2013년 01월 11일 -
칼치
아버지의 이름은 칼치였습니다고향에서는 가장 키가 컸던안강망 고깃배를 타던 뱃사람사람들은 아버지를 칼치라고 불렀습니다나는 어부의 아들이었지만아버지는 공장노동자가 되길 바랐습니다마포자루를 깎는 제재소에취직을 하라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얘…
20130107 2013년 01월 07일 -
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별과 달과 해와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손 저어 대답하면서,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
20121231 2012년 12월 31일 -
아주 행복해 보이죠?
아주 행복해 보이죠? 신대철이 상점엔 사람이 만든 것 일색이군요.그럼, 저건 어떠신지? 폭발적 인기죠.아주 예쁘게 웃는데요? 인형이군요.아주 행복해 보이죠?조그맣고, 사람 맘에 들게 웃고, 눈물도 없고……21세기에는 사람이 인형의 …
20121224 2012년 12월 21일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
20121217 2012년 12월 14일 -
사랑법
사랑법 강은교떠나고 싶은 자떠나게 하고잠들고 싶은 자잠들게 하고그리고도 남은 시간은침묵할 것,또는 꽃에 대하여또는 하늘에 대하여또는 무덤에 대하여서둘지 말 것침묵할 것.그대 살 속의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쉽게 …
20121210 2012년 12월 07일 -
철근콘크리트 벽
철근콘크리트 벽 김주대벽은소처럼 서서 빗속에 붉게 운다안을 지키기 위해밖을 견뎠을 것이다눈물의 안은 무사하다안을 지킨다는 것, 집 안에 누워 생각하는 게 아니다. 개나 소처럼 짖고 울면서 지키는 거다. 시인은 눈물의 안을 본다. 여…
20121203 2012년 11월 30일 -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에밀리 디킨슨/ 강은교 옮김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사랑을 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산과 하늘, 강…
20121126 2012년 11월 23일 -
등
등안도현내 눈 밑으로 열을 지어 유유히 없는 길을 내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내려다본 적 있다. 16층이었다. 기럭아, 기럭아나 통증도 없이 너의 등을 보아버렸구나내가 몹시 잘못했다등을 본다는 건 통증을 유발한다. 연인의 등, 아버…
20121119 2012년 11월 16일 -
국수 공양
국수 공양 ―이상국 동서울터미널 늦은 포장마차에 들어가이천원을 시주하고 한 그릇의 국수 공양(供養)을 받았다가다꾸리가 풀어진 국숫발이 지렁이처럼 굵었다그러나 나는 그 힘으로 심야버스에 몸을 앉히고천…
20121112 2012년 11월 09일 -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그 꽃 ―고은이 시를 소리 내서 읽으면 종소리가 들린다. 아주 먼 곳에서 나에게만 들려오는 마음의 종소리, 언젠가 젊은 날 들었던 깊은 산사의 늙은 저녁 종소리였다. 이 시의 마침표는 그렇게 종소리로…
20121105 2012년 11월 02일 -
사막
그 사막에서그는 너무나 외로워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자기 앞에 찍힌발자국을 보려고―오르탕스 블루이 시는 ‘파리 지하철공사 시 콩쿠르’ 수상작이다. 하이쿠(일본 정형시의 일종)의 성인 바쇼의 시로 착각할 뻔했다. 이 시에 찍힌 발자국…
20121029 2012년 10월 26일 -
고백
내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함은 입속에 작은 촛불 하나 켜는 것과 같으니입속에 녹아내리는 양초의 뜨거움을 견디며아름다운 동그란 불꽃 하나 만들어그대에게 보이는 것과 같으니아무리 속삭여도불은 이윽고 꺼져가고흘러내린 양초에 굳은 혀를 깨물…
20121022 2012년 10월 22일 -
외로운 섬
고깃배들 붐비는 앞바다굽어보는 울릉도.곧 지나겠군, 독도, 외로운 섬-일본말로는 타께시마관두세, 영토분쟁이라니-삼만 피트 위에서 보면 부질없는 짓.쬐끄만 저게 독도라고?돛단배가 틀림없군.아니 배라면 자취가 있을 텐데?크기도 딴 배들…
20121015 2012년 10월 12일 -
귀뚜라미
산(山)바람 소리 찬비 듣는 소리그대가 세상 고락(苦樂) 말하는 날 밤에숫막집 불도 지고 귀뚜라미 울어라―김소월‘숫막’은 ‘주막’의 북한 방언이다. 주막에서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 소월을 생각하니, 이 가을이 너무 깊다. 요즘은 입에…
20121008 2012년 10월 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