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005.05.17

우리는 열일곱 살 ‘촛불 세대’

  • 입력2005-05-12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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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열일곱 살 ‘촛불 세대’

    김 종 휘/문화평론가·하자작업장학교 교사·재활용+상상놀이단 단장

    영화 장면 몇 가지가 생각난다. 선생에게 개처럼 맞은 뒤 학교 유리창을 박살내고 뛰쳐나가는 학생(‘친구’ 중에서), 참고 참다 졸업식 날 담임선생 승용차를 부수는 학생(‘세 친구’), 교실에서 이소룡 흉내를 내거나 선생 몰래 포르노 잡지를 돌려보는 학생(‘말죽거리 잔혹사’). 그들은 ‘그래도’ 살아 있었다. 교육의 탈을 쓴 체제의 억압이 압도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살아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던 옛날 학생들 이야기다.

    그러나 교실 붕괴와 학교 해체의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학생은 다르다. 효도 차원에서 등교하고 부족한 잠을 자기 위해 교실에 머문다. 선생 역시 공부할 아이들만 데리고 수업하면 그만이지 굳이 딴 짓 하는 아이들을 야단치지 않는다. 교실은 평화롭다 못해 나른하다. 상위 1%를 빼면, 대학엘 가든 학교를 때려치우든 똑같이 별 볼일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요즘 학생들은 죽은 듯 지내는 처세를 터득했다.

    공교육 몰락 상징적 이름으로 기억되는가

    안팎에서 문제가 곪아터지고 있는데도 대한민국의 공교육과 학사 일정이 태연하게 돌아가는 까닭은 어쩌면 학생들의 그런 체념이 든든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체념한 학생이 과연 학생일까.

    꿈을 꾸지도, 미래에 도전하지도, 희망을 말하지도 않는 학생이 왜 있어야 하는 것일까. 혹자의 농처럼 어른들의 불안을 달래고 어른들의 생계와 이해관계를 위해 학생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학생들이 가여웠을까. 교육부와 이른바 명문대들이 번갈아가면서 ‘잠자는 학생들’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입 닥치고 죽은 듯 지내는 학생들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고, 마침내 광화문 거리에서 촛불까지 들게 만들었으니 작전은 일단 성공이지 싶다.

    교육부의 ‘대입 내신 강화’ 방침과 명문대들의 ‘논술형 본고사 도입’ 방침은 고등학교 1학년 이하 학생과 교사 및 학부모들의 속 타는 심장에 불을 질렀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은 교육부 약속대로 내신에 전력할지 대학들 배짱대로 ‘본고사’에 치중할지, 중3 학생들은 특목고를 갈지 일반고를 갈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대학에 가도 보장되는 게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도리 없이 하라는 대로 하는 건데, 그마저 어떤 정보를 따라야 할지 믿지 못하는 상황이다. 하라는 대로 했더니 고스란히 바보를 만드는 꼴이다. 어린 학생들이라고 언제까지 푸념과 자책만 할까.

    “우린 겨우 열일곱 살이에요!”

    살벌한 내신 때문에 짝꿍에게 공책도 빌려주지 못하고, 정체 모를 ‘논술형 본고사’ 때문에 부모들의 사교육비 부담도 한층 올라간다. 학생들은 친구에게도 부모에게도 몹쓸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자신을 더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노동자도 인간이라고, 여성도 사람이라고 인권을 선언해온 인류 역사에 비춰볼 때 ‘학생도 인간이다’가 아니라 ‘우린 열일곱 살’이라는 하소연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엉뚱한 생각이 든다.

    4·19 세대, 민청학련 세대, 386 세대 등의 명명법은 당대 정치권력의 부도덕성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전교조 세대는 교육 민주화를 위한 갈등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반면에 ‘이해찬 세대’에 이어 ‘촛불 세대’까지 등장한다면, 그것은 교실의 붕괴나 학교의 해체 수준이 아니라 공교육이라는 체제의 내파(內波)와 몰락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아예 교육을 없애버리지는 않을까.

    교육의 출발은 자각이다. 그것은 희망으로 심을 수도 있고 위기로도 비롯될 수 있다. 교육의 과정은 성장이다. 그것은 억압으로도 유도될 수 있고 분노로도 촉진될 수 있다.

    그러나 절망의 수용과 체념의 내면화를 지나 불신과 무책임으로 자극을 주어서 자각과 성장을 이끌어낸다면, 그것의 결과는 정신적 자살밖에 없지 싶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고, 그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지렁이는 이미 죽은 다음이다.

    “우린 겨우 열일곱 살이에요!”

    나는 이 말이 한 번만 더 밟으면 이젠 죽는다는 마지막 경고의 비명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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