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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만 시간’의 축복인가 저주인가

은퇴 후 남은 인생 20~25년 돈관리 & 시간관리법

  •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입력
2011-04-25 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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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만 시간’의 축복인가 저주인가

01 은퇴 후 삶을 미리 디자인하라

‘8만 시간’의 축복인가 저주인가
2010년 기준 한국 남성의 평균수명은 77세, 여성은 83.8세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80세가량 산다. 보통 55~60세에 은퇴한다고 가정하면, 은퇴 후 남은 인생은 20~25년이다. 취침, 가사노동 시간을 빼고 하루 10시간 정도를 일하고 즐기는 데 쓴다고 보면, ‘약 8만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라는 숙제가 주어진다.

직장에서 은퇴해 특별한 벌이가 없는 상황에서 이 시간을 여유롭고 알차게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은퇴 후 8만 시간의 질은 돈관리를 철저히 한다는 전제하에 은퇴 후 여가 및 근로 계획을 잘 세웠는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02 은퇴 후 기대생활비를 미리 계획하라

한 건축사사무소 건축설계담당인 김종수(46·가명) 부장은 요즘 업무 외에 자신의 15~20년 후 삶을 설계하고 디자인하느라 여념 없다. 지난달 고등학교 동창에게 소개받은 재무컨설팅 전문가로부터 “은퇴 후 삶에 대한 디자인과 설계를 미리 해놓아야 한다”는 조언을 들은 뒤 정신이 바짝 든 것. 그의 노트북에는 은퇴시기를 언제로 정할지부터 은퇴 후 구체적인 활동까지 한글 파일로 빼곡히 담겨 있다. 은퇴시기 항목에는 은퇴에 따른 평균 기대생활비와 예상 국민연금액을 산정해놓았고, 그 목표에 맞게 자신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진행 과정을 상세히 기입했다.



김 부장이 예상한 은퇴시기는 56세. 평균 기대생활비는 용돈, 경조사비, 각종 세금을 포함해 매달 290만~310만 원이다. “실제 은퇴 후 생활비는 은퇴 전과 비슷할 것”이라는 전문가의 말이 처음엔 의아했지만, 실제 계획을 세워 보니 예상 외로 지출액이 컸다. 은퇴 후 매달 290만 원을 지출한다고 가정할 때, 현재 그가 소요비용으로 충당할 수 있는 재원은 개인연금, 국민연금, 기존 예금, 퇴직금뿐이다. 퇴직금과 국민연금액은 불입액을 내 맘대로 늘리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개인연금과 예금을 늘려야 은퇴 후 평균 기대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일단 그는 두 달 전부터 용돈을 쪼개 개인연금, 자유적금 불입액을 조금씩 늘리고 있다.

체계적으로 돈관리를 시작한 김 부장은 은퇴 이후 생활 로드맵을 새로 짰다. 미래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디자인한 것. 은퇴 후 20년을 시기별로 구분한 뒤 시기별로 자신이 어떤 일을 하면서 지낼지를 그려봤다. 은퇴 후 삶이라고 매년 같을 순 없다. 은퇴 직후와 중반, 막바지 등 시기별로 각각 다를 수밖에 없는 것. 그 결과, 은퇴 후 평균 기대 생활비에서 시기별로 꼭 필요한 돈과 그렇지 않은 돈을 가려낼 수 있어 맞춤 지출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03 은퇴 직후 ‘활동기’에 목적 분명한 여유와 전직 계획을 짜라

‘8만 시간’의 축복인가 저주인가
은퇴 후 10년 동안은 은퇴 전과 다를 바 없이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 보통 레저활동과 자원봉사, 여행에 나서는데 그것을 할 체력도 받쳐주는 시기다. ING생명 영웅지점 김병국 재무설계사는 “이 시기는 은퇴 후 삶에서도 ‘활동기’로, 젊었을 때 하지 못했던 사회봉사, 여행, 레저활동에 적극 나선다”며 “평균 기대생활비에서 차량유지비, 외식비, 모임비, 여행비 등 기분에 따라 더 쓸 수도 있는 ‘위험한’ 필요비용이 적지 않아, 분명한 목적이 있는 활동 계획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측면에서 김 부장은 은퇴 후 몇 년간은 아내와 여행을 자주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은퇴 후 5년간은 평균 기대생활비에서 차량유지비, 외식비, 여행비 지출을 조금 늘리는 대신 의식주와 관련된 기초생활비를 줄이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은퇴 후 여가활동은 목적이 분명해야 하는데, 아내와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건 ‘여행’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여행을 다니면 운동도 되니 좋잖아요. 한 달에 2~3번은 국내 명소를 여행하기로 했는데, 음식솜씨가 좋은 아내가 팔도 별미를 맛보고 싶어 해서 맛깔 난 음식이 유명한 곳 위주로 여행지를 추려내고 있어요.”

그는 4월에도 3박4일간 영호남 화합가요로 알려진 ‘화개장터’의 주요 무대 전남 구례군과 경남 하동군 일대를 여행했다. 은퇴 후 할 일을 미리 당겨서 해본 것이다. 인터넷으로 여러 음식점을 수소문해 끼니마다 별미를 맛봤다. 전남 구례의 한 고깃집에서 아내는 돼지고기 양념에 매실을 넣어 맛을 내는 비법을 배웠다.

은퇴 후 10년간, 즉 ‘활동기’에는 주머니 사정이나 본인 의지에 따라 시간제 근로나 전업은 물론 작은 창업도 가능하다. 김 부장은 은퇴 직후에는 여가를 즐기며 현역시절 경험을 살려 인테리어 회사에서 건축사 자문을 할 수 있는 파트타임 일자리라도 구할 생각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창업도 고려해볼 생각이다. 그는 공인중개사 자격시험도 준비 중이다. 아파트나 건물 매매, 임대 알선부터 건축과 인테리어까지 원스톱으로 해결하는 특화된 분야를 개척하고 싶은 욕심에서다.

“사람들이 집을 얻으면 대부분 집을 어떻게 꾸밀지 인테리어나 도배를 고민하잖아요. 여기저기 알아보느라 시간과 돈도 많이 들죠. 그래서 예전부터 이 문제를 부동산에서 한꺼번에 해결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내가 직접 일을 맡지 않더라도 그 분야 전문가를 소개해줄 수 있는 능력은 되잖아요.”

은퇴하고 10~15년이 지난 시점인 70~75세는 ‘회상기’다. 조용히 산책과 힘들지 않은 여행을 통해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은 물론, 건강을 생각해 무리한 외부 활동을 자제하는 시기다. 향후 발생할 의료비, 독거 생활비를 고려해 마지막으로 자신의 노후자산을 점검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김 부장도 회상기에 접어들면 수도권 지역의 주택으로 이사할 계획이다. 인생을 조용히 되돌아보고, 마지막으로 노후자산을 넉넉히 쌓아놓기 위해서다. 지금 살고 있는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차도 경차로 바꿀 예정이다. 시세 차익의 일부, 그리고 경차로 바꿔 줄어든 차량유지비 등을 고스란히 병원 검진비, 의료비로 쓰거나 다시 모을 참이다.

은퇴하고 15년이 지나면 배우자나 본인이 사망하거나 각종 질병이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김 부장은 ‘보험격’으로 개인연금 수령 방식을 확정형이 아닌 종신형으로 선택해 80대에도 연금을 받아 의료비에 충당할 수 있게 했다.

80세를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가정하고 은퇴 후 삶을 디자인해본 김 부장은 큰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크게 문제가 없는 지금도 은퇴 후를 구상해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결국 그가 은퇴 후 삶을 설계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낀 점은 ‘은퇴 후 8만 시간의 삶’이라는 그림은 일찍 그릴수록 가치가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주간동아 784호 (p32~33)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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