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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생 아내에서 영부인까지

30년 한지붕 참모 권양숙 여사 … 정치 입문 반대하다 결국은 열혈 내조자 변신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구미화 기자 mhkoo@donga.com
입력
2002-12-26 12: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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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생 아내에서 영부인까지

  • ‘노무현 시대’가 개막됐다. 세계화, 정보화 등으로 무장한 시민사회의 선택은 변화와 개혁이었고 그 중심에 노무현이 서 있었다. 50대 대통령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3김 시대의 퇴장을 동반한다. 권위주의와 집단주의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었다. 대신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로 무장한 20, 30대가 신파워그룹으로 등장했다. 그들은 정치개혁과 사회변혁을 강력히 주문한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로서는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노무현 시대, 과연 어떤 비전을 제시할 것인가.
고시생 아내에서 영부인까지

명륜동 자택에서의 권양숙 여사. 권여사를 만나본 사람들은 “소탈하고 격의 없으며 남다른 유머감각도 있다”고 말했다.

12월19일 밤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 당선이 거의 확정된 상황에서 민주당사는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당원들에게 떠밀리다시피 앞으로 나와 단상 앞에 섰다. 당원들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기 시작했지만,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흥분하기까지 해 말을 잇지 못하던 노당선자는 앞줄에 앉아 있던 부인 권양숙 여사(55)를 불러냈다. 불려 나온 권여사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승리의 V자를 그리며 당원들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잠깐 동안이나마 노당선자는 생각을 가다듬을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장면은 권여사의 남다른 유머감각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한다. 대통령 선거의 와중에서 권여사를 만나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전하는 권여사의 인상은 ‘격의 없고 소탈하며 유머감각도 풍부하다’는 것. 권여사를 여러 번 만났던 여성 주간지 ‘우먼타임스’의 박이은경 부장은 권여사에 대해 “가정주부 특유의 따스함과 유머감각이 있는 분이었다. 계산된 대답만 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아 인터뷰하기가 편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도중 권여사는 동행한 남자 사진기자에게 “혼기가 꽉 찬 딸이 있는데 시집갈 생각을 안 한다”며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까지 할 정도였다고 한다.

격의 없고 소탈한 성격 … 유머감각도 뛰어나

방송에서도 권여사의 유머감각은 여러 번 빛을 발했다. SBS 대담 프로그램에서는 사회자가 “노후보가 권여사를 가리켜 ‘고등학교 훈육주임 닮았다’고 했다던대요?”라고 묻자, “옛날에는 박꽃 닮았다고 하더니만…”이라고 응수해 청중의 웃음을 이끌어낸 뒤, “아마 내가 바른소리를 잘 해서 그런 말을 듣나봅니다”라고 말했다. 또 KBS 프로그램 ‘아침마당’에 출연했을 때는 “올해 애들 아빠 일이 끝나면 내년쯤 딸아이를 구조조정할 것”이라고 말하는 재치를 보였다.

익히 알려진 대로 권여사는 노무현 당선자와 고향 선후배 사이다. 부산에서 계성여상을 다니다 취직해 직장생활을 하던 권여사는 71년 할아버지의 병구완을 돕기 위해 고향 진영으로 돌아왔다. 노당선자가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에서 사법고시 준비를 하던 시점이어서 두 사람은 자연스레 마을에서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노당선자가 일방적으로 따라다니는 상황이었지만 동네 둑길을 걸어오는 청년 노무현의 늠름한 걸음걸이에 마음이 흔들린 권여사는 2년간의 연애 끝에 73년 노당선자와 결혼했다.



권여사는 30년 가까운 결혼생활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75년 노당선자의 사법고시 합격을 꼽는다. 지금도 당시의 사시 합격증을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을 정도. 그 후 변호사로 잘 나가던 남편이 81년 부림사건 이후 인권변호사로 나서고, 이어 정치판에 뛰어들자 평범한 주부였던 권여사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노당선자야 각계 사람들을 만나며 당시의 암울한 현실을 바꿔보겠다는 각오를 다져갔겠지만 전업주부였던 권여사로서는 평온한 삶을 포기하려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노당선자가 처음 선거에 나섰을 때 선거 참모들이 노당선자와 아들 건호씨가 씨름하는 사진을 홍보용 사진으로 쓰려 한 일이 있었다. 권여사는 펄쩍 뛰며 반대했다. 아무리 선거가 중해도 귀한 자식의 사진을 뭇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참모들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의 이런 태도가 답답했던지 노당선자는 1994년 펴낸 자전 에세이집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이렇게 썼다.

“여보, 나 좀 도와줘. 나는 꿈이 있어. 정치를 하려면 미쳐야 된대. 여보 양숙씨, 우리 같이 한번 미쳐보자, 응?”

‘정치에 미치지 않는’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노당선자는 어느 날인가부터 식탁 위에 책을 한두 권씩 올려놓고 나가기 시작한다. 권여사는 남편이 놓고 나간 책이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 등 비교적 쉬운 사회과학 서적이었다고 기억한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권여사는 남편의 행보를 서서히 이해하게 된다. ‘노무현―상식, 혹은 희망’에 실린 아들 건호씨의 글에서도 권여사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90년) 3당 합당 때의 일은 이전의 많은 사건과는 달리 어머니와 별다른 의견 충돌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사실 이전의 여러 가지 일들은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의견 충돌을 빚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최근에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아무리 그렇지만 어떻게 거기 따라가라고 할 수 있겠노.’”

고시생 아내에서 영부인까지

노당선자와 함께 경남 김해의 선영을 참배하는 권양숙 여사. 대선 전 마지막 주일인 12월15일 순복음교회에서 기도하는 권여사. 노당선자의 가족사진 (왼쪽 부터).

대통령학 연구자인 고려대 함성득 교수(행정학)는 대통령 부인의 역할에 대해 “대통령 부인은 비공식적인 제1참모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더욱 대통령 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거듭된 선거와 낙선을 함께 겪은 권여사는 이번 선거에서는 남편의 정치 참모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 합의 이후 단일후보 선출을 앞둔 상황에서 권여사는 “우리는 가진 것도 없고 더 잃을 것도 없다. 이제까지 기대 이상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고 역사적 단일화에 합의했으니 이제 결과를 기다리자.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했으니 크게 실망할 일은 아니다”라고 남편을 위로했다고 한다.

권여사를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두 가지 문제는 권여사 부친의 부역 문제와 권여사 자신의 학력이다. 권여사는 ‘우먼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부역 문제로) 내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남편이 장인 때문에 대통령감이 안 되면 후보 경선을 그만두면 되니 너무 걱정 말라고 하더라”는 말을 하며 눈물을 보였다. 민주당 경선 초기 이 문제가 쟁점화될 때 권여사는 소화불량과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권여사 자신은 서너 살 때 일어났던 일이라 이 일에 대해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권여사는 부산에서 계성여상을 다니다 졸업 3개월을 남기고 공납금과 졸업 앨범비를 못 내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이 부분이 본인에게도 한으로 맺힌 듯, 권여사는 “학교 얘기만 나오면 괜히 아쉽고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 힘든 중에도 열심히 공부해 교수가 된 여성을 보면 상당히 존경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학력과 연관해서 권여사는 껄끄러운 질문을 받기도 했다. 한 기자가 “대통령 부인이 되면 외국인과 이야기해야 할 기회가 많아지지 않겠느냐”고 질문하자 권여사는 “대통령 부인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아니냐”며 받아넘겼다. 그러나 표면적인 학력과는 달리 권여사는 상당히 독서량이 많고 박식하다는 평이다. 서울 명륜동 노당선자 자택에는 거실 한쪽 면 전체를 채운 책장이 있다. 이 책장의 한 줄 전체에 여성학 관련 서적이 꽂혀 있다. 권여사의 책들이다. 또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사회적 여건이나 개인사정 때문에 큰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책 읽기를 좋아해 큰 책방을 내고 싶었다”며 이루지 못한 꿈을 밝히기도 했다.

노당선자의 청와대 입성 이후 권여사의 행보는 더욱 활발해질 듯하다. 권여사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이상적인 대통령 부인으로 힐러리 클린턴을 꼽으며 “이제 대통령 부인이 그림자처럼 내조하는 데 머무르는 시기는 지났다고 본다”고 말하기도 했다. 권여사는 후보 부인들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명륜동 자택을 노당선자와 공동명의로 해놓았다.



주간동아 366호 (p18~19)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구미화 기자 mhk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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