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97

2017.07.19

스페셜 리포트 | 지금 대치동에선

학원  · 과외 금지해도 잠 못 드는 아이들

낮엔 공부, 밤엔 운동하는 ‘晝讀夜運(주독야운)’ 대치동 24시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7-07-18 14: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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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밤 10시가 되면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는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서울시교육청(교육청)의 ‘밤 10시 이후 학원교습 금지 조치’의 영향이다. 일대 학원이 한꺼번에 문을 닫으면서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이들을 태워가려는 학부모 차량과 학원 버스가 뒤엉켜 도로는 불야성을 이룬다.

    2014년 일부 학부모가 ‘심야 학원교습 금지’에 반발해 헌법소원을 낸 일이 있다. ‘학생 인격의 자유로운 발현권, 학부모의 자녀교육권, 학원운영자의 직업수행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헌법재판소(헌재)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 ·   영   ·   수 학원 끝나면 체육학원으로?

    ‘학원 심야교습을 제한하면 학생들이 보다 일찍 귀가하여 휴식과 수면을 취하거나 예습 및 복습으로 자습능력을 키울 수 있고, 사교육 과열로 인한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 증가 등과 같은 여러 폐해를 완화시킬 수 있다.’

    지난해 5월 헌재가 시도교육감의 심야 학원교습 금지를 허용한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학원법) 조항을 합헌 결정하며 밝힌 이유다. 이에 따라 서울의 심야 학원교습 금지 조치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교육청은 올해 5월 조례를 강화해 밤 10시 이후 과외교습도 못 하게 했다. 7월 19일부터 서울에서는 이에 대한 본격적인 단속이 시작된다. 한 학부모는 “지금까지는 밤 10시가 ‘봉인이 풀리는 시간’이었다. 그때까지 학원 강의에 묶여 있던 유명 강사에게 학생들이 과외교습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는 뜻”이라며 “대치동에서는 밤 10시 이후 막 학원 수업을 끝낸 강사와 학생이 다시 만나 심야 과외를 해왔다”고 전했다. 꼭 유명 강사가 아니라도 ‘사교육 1번지’ 아이들이 과외 스케줄을 잡기 좋은 시간은 밤 10시 이후였던 게 사실이다. 앞으로는 이런 추가 공부가 원칙적으로 불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이제 학생들이 헌재 재판관들의 기대대로 ‘일찍 귀가하여 휴식과 수면’을 취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미지수다. 최근 사교육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교육청의 학원·과외 금지 조치로 대치동 일대 체육학원이 어부지리를 얻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학생들에게 태권도, 검도, 수영 등 각종 운동을 가르치는 기관은 현행법상 학원이 아니라 체육시설이기 때문이다. 학원법 대신 ‘체육시설의 설치·이용에 관한 법률’ 적용을 받으니 교육감이 운영시간을 제한할 수 없고, 밤 10시 이후 교습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치동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온라인 학부모 커뮤니티 ‘디스쿨’의 김현정 대표는 “평일 밤 10시 이후 학원수업 및 과외가 전면 금지되면 이 시간을 체육교습에 활용하려는 사람이 많아질 것 같다”고 전망했다. 그에 따르면 대학입시에서 수시전형 비율이 늘면서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비교과활동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높아지는 추세다. 체육활동이 이 내용을 채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확산돼 체육 사교육도 늘어나는 분위기다. 그런데 평일 밤 아이들 스케줄에 틈이 생겼으니 체육 사교육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학생부 비교과활동 부문 전문 컨설턴트인 이섬숙 에듀 비교과연구소장은 이미 그런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상당수 강남지역 학생들이 방과 후 국·영·수 학원에 갔다 10시 이후 체육학원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2015 개정교육과정이 학생의 소질과 적성을 강조하면서 예체능 교육에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또 강남지역 학부모 상당수는 초중학생 때 체력을 길러놓아야 나중에 입시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에서 수영, 태권도, 농구 등 다양한 체육 교습이 인기를 끌고 있고, 최근 밤 10시 이후를 교습시간으로 택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全人적 인재’ 키우려는 부모 마음

    체육 사교육의 인기는 통계로도 증명된다. 통계청이 올봄 발표한 ‘2016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초중고생의 체육 사교육비 총액은 지난해 1조7163억 원으로 전년(1조4886억 원)보다 15%가량 늘었다. 연간 사교육비 총액이 같은 기간 1.3% 증가한 것을 감안하면 매우 가파른 성장세다. 특히 고교생의 체육 사교육비가 소폭 감소한 반면, 중학생 체육 사교육비는 1년 새 약 26%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과거에도 체육 사교육이 없었던 건 아니다. 많은 초등학생이 태권도장 등에서 운동을 배웠고 일부 ‘열혈’ 학부모는 중고교생 자녀에게 달리기, 줄넘기 등 체육 실기시험 종목 대비 ‘과외’를 시키기도 했다. 자녀가 10여 년 전 서울대에 진학한 한 학부모는 “아이의 농구 실기시험을 앞두고 농구 레슨을 받게 한 일이 있다. 당시 강사가 아이에게 농구 잘하는 요령을 알려줬을 뿐 아니라 다양한 정보도 제공해줘 많은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특정 제품을 손에 바르면 농구공이 잘 미끄러지지 않는다는 걸 알려줬다는 얘기다. 이 학부모는 당시 동대문운동장 근처 체육용품점을 뒤져 아이에게 그 제품을 구해다줬다고 한다. 당시 중고교 체육 과외는 이렇게 ‘시험 대비’ 목적이 강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최근 분위기는 그때와 다소 차이가 있다. 요즘 학부모들은 체육 사교육을 시키면서 좋은 성적뿐 아니라 체력 증진, 운동 능력 강화 등도 동시에 기대하기 때문이다. 강남지역에서 활동하는 한 수영코치는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생들을 보면 초중고 시절 공부뿐 아니라 예체능까지 두루 섭렵하지 않나. 강남 학부모들은 자녀가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란다. 성적이 우수하면서 운동도 잘하고 악기도 하나쯤 다룰 줄 아는 ‘쿨한 모범생’을 만들려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다 보니 수행평가에 맞춰 단기적으로 운동 요령을 가르치기보다 최소한 중학생까지는 가능한 한 ‘진짜 운동’을 시키려 한다고 한다. 중학생의 체육 사교육비가 급증한 것도 그 영향으로 분석된다.

    9년째 달리기 코치로 활동 중인 김준석 씨는 “코치생활 초기엔 달리기 레슨을 받는 학생이 많지 않았다. 체대 입시 준비생이나 운동부 선수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일반 학생의 지도 요청이 부쩍 늘었다. 체육 수행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 한다는 학생도 있지만, 그보다는 살이 찌거나 운동을 못하면 ‘왕따’를 당하는 분위기라 달리기를 배운다고 얘기하는 쪽이 더 많다. 달리기를 통해 운동신경을 기르고 싶다는 학생도 적잖다”고 밝혔다. 부모들도 같은 생각이라 어떻게든 아이의 달리기 수업시간을 확보하려 노력한다고 한다. 그는 “아이들이 워낙 바빠 새벽 5시, 밤 10시에도 일대일 레슨을 해준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밤 10시에 모여 농구하는 이유

    대치동 일대에서 처음으로 ‘심야 농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한범석 ‘게이트 체대입시 강남캠퍼스’ 원장도 “우리 학원 학부모들이 바라는 건 아이가 체육 성적을 잘 받는 게 아니라 잠시라도 즐겁게 스포츠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몇 년 전부터 학부모 사이에서 ‘아이가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데 밤에라도 좀 뛸 수 있도록 학원 운영시간을 늘려줄 수 없겠느냐’는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밤 10시 20분부터 11시 20분까지 1시간짜리 농구 프로그램을 만들자 수강생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한 원장은 “현재 ‘심야 농구’ 수강생은 250명 수준으로, 대부분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남학생이다. 대치동 일대 학원에서 밤 10시까지 강의를 들은 뒤 바로 농구장으로 온다”고 밝혔다. 그는 “수강생 대부분이 흠뻑 땀을 흘린 뒤 ‘이렇게 운동할 수 있어 정말 좋다’고 얘기한다”며 “매일 늦게까지 학원을 운영하는 게 쉽지 않지만,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엄마주도학습’ 등의 책을 펴낸 사교육 컨설턴트 이미애 ‘샤론코칭&멘토링연구소’ 대표에 따르면 지금까지 대치동 아이들은 주로 주말에 운동을 배웠다. 평일 내내 학원수업과 과외 등으로 바빠 단체 구기종목 팀을 구성하는 건 주말에나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중학교 자유학기제 실시 등의 영향으로 수행평가 부담이 커지면서 주말 시간을 빼는 것도 어려워졌다고 한다. 이 대표는 “그 대안으로 요즘 ‘심야 체육’이 떠오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사교육 전문가도 “과거 대치동에서는 ‘일요일 밤’이 단체 구기종목 과외를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으로 통했다. 학원이나 과외수업이 없고, 아이들이 가족여행을 갔다가도 모두 돌아온 때라 이때 모여 농구 등을 한다”며 “이제는 매일 밤 10시 이후 모든 아이가 ‘프리’해졌으니 월요일 수업 부담이 큰 일요일 밤보다 금요일 밤 같은 평일 체육수업이 일반화하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문제는 이러한 ‘밤 운동’이 어린이·청소년의 성장발달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아내분비학 전문가인 이지은 인하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이들이 밤 10시 이후 운동을 하면 빨라도 12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들게 되지 않나. 그러고는  그다음 날 등교시간에 맞춰 일어나려면 수면시간이 매우 짧아진다”며 “잠들기 전 운동을 하면 자율신경계가 흥분돼 숙면을 방해하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운동을 전혀 안 한 채 잠자리에 드는 것’과 ‘밤 10시 이후에라도 운동을 하고 좀 덜 자는 것’ 가운데 ‘차악(次惡)’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 교수는 “둘 다 나빠서 뭐가 더 나쁜지를 고를 수 없다. 운동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낮 시간에 해야지 밤에 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대치동에서 중학생 자녀를 키우는 한 학부모는 “정규 체육시간이 1주일에 두 시간밖에 안 되고, 그나마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현실에서 아이들이 낮에 어떻게 운동을 하겠나”라고 했다. 그는 “아이들이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에 있다 밤늦게 집에 오면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고 12시 넘어 잠자리에 드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니 학부모들은 ‘어차피 늦게 잘 거, 그 시간에 운동을 하도록 하는 편이 낫다’는 인식이 확산 중이다. 체육이 아이의 진학과 성장에도 중요한 만큼 심야 체육의 인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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