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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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미리 가본 ‘트럼프 월드’

美 ‘쫀쫀한 패권주의’ 시대

트럼프 대외정책, 오바마의 ‘제한적 개입주의’ 연장선상…强 대 强 미·중 관계 속 대북정책 난맥

  • 신석호 동아일보 기자 kyle@donga.com

    입력2016-11-21 1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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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초 사석에서 만난 한 외교·안보 당국자는 미국 대통령선거(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당선할 경우 한반도 주변 정세에 많은 변화가 예상되지만, 미국의 전통적인 ‘불쉿(bull-shit) 페이퍼’가 있어 그나마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 ‘개소리’ ‘제길’쯤으로 번역되는 불쉿 페이퍼의 사연은 이렇다.

    선거 과정에서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이런저런 공약(空約), 특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대외정책을 늘어놓은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하면 당선인은 하루 이틀 내 미국 백악관과 중앙정보국(CIA), 미국국가안전보장국(NSA), 연방수사국(FBI), 국무부, 국방부 등이 만든 1급 비밀 보고서를 브리핑 받는다. 이 보고서는 당선인의 공약에 대해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고 상세하게 조언한다. 자신의 선거 공약이 미국 국익 차원에서 실제 정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당선인은 이렇게 말한다. “불쉿!”



    “트럼프, 개입 축소 수준에 그칠 것”

    불쉿 페이퍼가 힘을 발휘했기 때문일까. 11월 8일 대선에서 승리한 트럼프가 달라지고 있다. 대외정책과 관련해서는 13일,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동맹국의 핵무장을 용인할 수 있다는 취지의 선거전 발언을 뒤집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트럼프가 10일 백악관 인수인계 회동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방위공약 준수 의사를 밝혔다고 14일 전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큰 방향에서는 아시아와 유럽 동맹국들을 축으로 한 미국의 글로벌 안보 틀을 유지할 것이란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을 비롯한 세계 언론은 트럼프의 대외정책 골격을 ‘고립주의(isolationism)’라고 표현해왔다. 그가 “미국 이익을 우선시하겠다”며 동맹정책의 골간인 한미, 미·일 방위공약, 나토 방위공약 유지에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미국이 유럽 각국과 일본, 한국,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방위를 위해 너무 많은 세금을 쓰고 있다”며 “미국은 세계 경찰이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또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러시아와 중국 등 경쟁 강대국을 존중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십분 인정하더라도 고립주의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미국 대외정책 영역을 아메리카대륙으로 한정한 ‘먼로 독트린’을 발표해 진정한 고립주의로 돌아선 것과 달리, 트럼프 행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경제적으로 국제질서를 만든 패권국가로서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설명이다. 그것이 트럼프가 최우선시하는 ‘미국 국익’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미국은 여전히 고립주의가 아닌 개입주의 노선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동선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1월 10일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가 주최한 긴급 정책토론회에서 “미국이 고립주의에서 벗어난 지는 오래됐으며, 최근 트럼프의 주장은 너무 많이 벌여놓은 대외적 구실을 줄이고 조정하자는 개입 축소(retrenchment)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설명했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원장도 “미국이 다시 고립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미국 국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해 과거의 적극적인 간여(engagement)에서 선택적인 간여로 이동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트럼프 대외정책의 골간은 정확히 전임자인 오바마 행정부의 연장선상에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4년 5월 28일 뉴욕 주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제한적 개입주의’ 대외정책 노선을 천명했다. 국제 분쟁 해결을 위한 지나친 군사적 개입과 고립주의로 회귀라는 양 극단을 지양하면서, 미국이 주요 국제 사안에 개입하되 관련 국가의 힘을 모아 공동대처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고립주의와 개입주의, 일방주의와 다자주의라는 ‘2×2 메트릭스’에서 개입주의와 다자주의라는 조합을 선택한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는 방위비 증액용 압박 카드

    당시 오바마 행정부는 시리아 내전과 우크라이나 사태 등 주요 국제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해 공화당 등 보수진영으로부터 미국의 리더십을 약화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은 세계무대에서 언제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지만 미국의 군사행동이 모든 사안에서 우리 리더십의 유일한 선택도, 최선의 선택도 아니다”라며 “우리가 좋은 망치를 들고 있다고 모든 문제를 못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2008년 경제위기 속에서 당선한 오바마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천문학적인 전비를 쏟아부은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안정적인 철수를 첫 번째 대선공약으로 내세웠고 이를 지켰다. 그는 시리아와 우크라이아 사태에 대한 보수진영의 공격에 대해 “왜 모두 군사력을 쓰고 싶어 안달인가. 막대한 예산을 해외 주둔 비용에 쏟아부은 지난 10년간의 전쟁에서 이제 빠져나오지 않았는가”(2014년 4월 28일 필리핀 순방 중 정상회담 공동 기자회견에서)라며 자신의 정책을 옹호했다. 이어 터진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발호에 대해서도 지상군을 투입하는 대신 동맹국들과 함께 하는 공습과 제한적인 특수부대 투입에 그쳤다.

    제한적 개입주의를 선창한 오바마 행정부도 한미동맹을 아시아 평화와 안정을 위한 ‘린치핀’(linchpin·바퀴를 멈추게 하는 비녀장으로, 핵심이나 구심점이라는 뜻)이라며 중시했던 것처럼, 트럼프 행정부의 대(對)한반도 정책도 큰 틀에서는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당선인은 당선 다음 날인 11월 9일 오후(현지시각) 박근혜 대통령과 10여 분간 통화하면서 “미국은 한국과 끝까지 함께하며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한미 양국은 앞으로도 안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및 일본과 동맹관계를 기반으로 중국, 북한의 팽창과 도발을 막아 내겠다는 아시아 정책의 기조를 유지할 것임을 밝힌 것이다.

    트럼프가 오바마 행정부의 제한적 개입주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동맹국의 비용 부담 증액을 구체적으로 요구한다는 데 있다. 미국이 과거처럼 세계평화와 경제질서를 유지하는 패권국가 행세는 하겠지만, 유럽 및 아시아 국가와 동맹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미국 측 부담은 줄이고 동맹국으로부터 경제적 기여와 희생을 더 얻어내겠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의 대외정책을 ‘쫀쫀한 패권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과거 미국의 동맹국 정책을 ‘후덕한 패권주의’라고 평가한다면 말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나토 회원국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요구하고 나설 것으로 보인다. 대선 과정에서 제기한 주한미군 철수는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위한 협상 카드로 쓸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오바마 행정부도 나토 회원국들에게 국내총생산(GDP)의 2%를 방위비로 내게 했는데 현재 이 기준을 충족하는 나라는 미국, 영국을 포함한 5개국밖에 없다고 불만을 제기해왔다.

    미국 국익을 앞세운 통상정책 변화는 벌써부터 가시화하고 있다. 백악관과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은 오바마 대통령의 대표적 유업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의회 비준 절차를 더는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최근 공개된 트럼프의 200일 공약 중에서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이 최우선 과제다. 트럼프가 대선 과정에서 수차례 얘기한 대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검토 역시 우려되는 상황이다. 미국 재계와 공화당 일각에서는 한국이 협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있다며 불만을 제기해왔다.

    트럼프 행정부의 ‘쫀쫀한 패권주의’가 정책으로 가시화될 경우 북한 핵·미사일 개발 문제에 직면한 한국은 여러 난처한 상황에 놓일 개연성이 높다. 이동선 고려대 교수는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가 주최한 정책토론회에서 “한국에서는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미국의 핵우산 공약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전략자산 추가 배치나 전술핵 재배치 등 보충 조치에 대한 요구가 많다”며 “하지만 트럼프가 한국이 미국에 안보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상황에서 이런 요구는 다소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북핵 문제, 우선순위에서 밀려

    트럼프 당선 이후 국내에서는 미국이 북한 핵문제에 대해 더 강력하게 군사적 대응(핵시설 예방타격 등)을 하거나 더 파격적인 대화를 할 가능성 등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 교수에 따르면 두 가지 모두 ‘희망적 사고’가 될 우려가 크다.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북핵 문제가 우선순위에서 밀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 이후 국내 문제에 집중한 뒤 국제 문제를 중요도 순으로 다룰 것으로 전망된다”며 “공화당이 일관되게 반대해온 이란과 핵협상, 쿠바와 관계 정상화 등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적 합의 계승 문제가 가장 시급한 문제로 분류되고, 대중국 정책에 이어 북한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트럼프 행정부도 북한 문제를 해결할 뚜렷한 묘책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북한 문제는 ‘풀 수 없는 문제’로 분류돼 오바마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뒷전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북한 문제의 키를 쥐고 있는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이지용 국립외교원 교수는 11월 16일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중관계 전망’ 보고서를 통해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미국의 이익을 힘으로 관철하겠다는 것’이라며 ‘미국이 남중국해 등 안보 사안에 대해 중국에 양보 또는 후퇴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결론적으로 트럼프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끄는 미·중 관계는 강(强) 대 강의 형세가 되리라는 것. 이 경우 ‘중국을 통한 북한의 변화’를 추구해온 미국과 한국의 대북정책은 오바마 행정부 당시보다 더 어려움을 겪을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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