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40

2016.06.01

사회

강남역 추모 물결 ‘희생자는 나 자신’

여성의 삶에 대한 불안이 애도 행렬로 이어져…‘가만있으면 안 된다’ 저항의 몸짓도

  •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psysohn@chol.com

    입력2016-05-30 16:38:47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서울메트로 2호선 강남역 앞이 달라졌다. 젊은이들로 늘 활력이 넘치던 거리가 침묵과 숙연함, 미묘한 긴장의 거리로 변했다. 강남역 인근 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억울하게 살해된 20대 여성을 추모하려고 많은 인파가 몰렸다. 주축은 20, 30대 여성이지만 남성들도 그 대열에 동참하거나 추모 행렬을 지켜봤다. 사건이 벌어진 후 며칠 만에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는 엄청난 양의 포스트잇 메모가 붙었다. ‘여자라서 희생됐어요’ ‘남자라서 살아남았어요’ ‘나도 죽을 뻔했어요, 미안해요’ 같은 문구들이 출구 앞을 장식하고 있었다.

    사상자 수백 명이 발생한 세월호 참사 이후 이처럼 많은 사람이 추모의 물결을 이룬 적이 있던가. 세월호 참사는 어린 학생 수백 명의 희생, 사회의 안전불감증, 탐욕과 부도덕, 정부의 무능으로 국민적 슬픔과 분노를 촉발했다. 그에 비해 이번 사건의 희생자는 단 한 명이지만, 그 희생이 ‘여성 혐오’라는 씁쓸하고 잘못된 분위기를 공론화했고 수많은 여성의 추모 행렬로 이어졌다. 조현병(정신분열병) 환자인 한 남성의 단순한 살인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을 여성들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일주일이 지나도 계속되는 추모 분위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추모하는 이들의 심리, 나아가 우리 사회의 심리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추모로 희생자에 대한 미안함 덜어

    첫째, 불안의 극대화다. 이 시대 젊은 여성들은 불안하다. 취업 불안은 결혼과 육아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데이트 폭력이나 화장실·워터파크 ‘몰카’(몰래 카메라) 동영상 유출도 여성을 두렵게 한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생사(生死) 문제를 건드렸다. 피의자가 남성 여러 명을 그대로 보낸 다음 여성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다. 평범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기에 ‘운이 나빴으면 나도 당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지극히 논리적이다. 또한 ‘나도 죽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여성의 등골이 오싹해졌을 것이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다음에는 내가 죽을 가능성도 있다’는 예측은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집 안에 편안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불안을 느끼는 사람끼리 모여 이를 가라앉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강남역 방문, 메모판 작성, 침묵 행렬에 동참하는 행위다. 필자가 침묵 행렬 현장에 가보니 여성들은 흰 마스크와 우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종이에 적어 들고 다녔을 뿐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그들의 눈빛은 분노보다 두려움을 말하고 있었다. ‘혹시 잠재적 살인자가 나를 유심히 보고 내 얼굴을 기억해 범행 대상으로 삼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엿보였다.



    둘째, 망자(亡者)와 동일시다. 희생자가 23세 여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20대 여성은 자신과 그를 동일시했다. 누군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친한 친구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면서 마치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느낀다. 먼 타국에서 자연재해로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 ‘내가 그곳에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지만, 지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아직도 살고 있다’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것이 망자와의 동일시 여부에 따른 차이다. 즉 희생자는 내 친구, 언니, 동생, 선후배이고 궁극적으론 나 자신이다. 희생자의 몸은 죽었지만, 그 영혼은 살아서 그를 추모하는 여성들의 몸에 들어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강남역 앞에 모인 여성들은 희생자에게 조금 덜 미안함을 느끼고, 자신들이 모였으므로 희생자가 외롭지 않을 것이라 여긴다.

    셋째, 대변(代辯) 심리다. 희생자는 이제 자기 목소리를 직접 낼 수 없다. 따라서 추모하는 사람들이 그가 하고픈 말을 대신해야 한다. 다만 그의 목소리는 사라졌으니 말 대신 글을 쓰고, 비언어적 소통 방법인 눈빛, 표정, 몸짓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희생자는 범인을 피하고 싶을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몸은 움츠릴 수밖에 없다. 우비를 입는 것은 가해자의 칼끝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하고 소나기를 피하려는 행위다. 일기예보에는 없어도 소나기처럼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것이 불행이기 때문이다.



    망자의 목소리 대신 내려는 의지

    ‘저는 힘이 약한 여성입니다. 당신이 나를 범죄 대상으로 삼아 저는 억울합니다. 결국 제가 남자만큼 힘세지 않아서 피해를 입었군요. 그런데 왜 여성을 싫어하지요? 당신의 엄마와 누이도 여자인데 말입니다. 제가 여성이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는 현실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과연 제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요? 여기 ‘또 다른 나’가 모여 계속 이야기할 것입니다. 여성인 저를 미워하지 말고, 저를 공격하지 말고, 저를 죽이지 마십시오.’

    누군가를 위해 귀찮은 일을 대신하기는 어렵다. 그러기 위해선 금전 등 경제적 보상이 필요하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것도 용기와 정의감이 필요하다. 도덕적 우월감은 그저 덤으로 주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강남역 희생자를 위한 대변은 자발적이며, 경제적 보상이나 도덕적 만족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를 위한 대변이자 나 자신을 위한 변이기 때문이다.

    넷째, 저항과 회복 심리다. ‘가만있으면 안 된다. 저항해야 한다. 더는 짓밟힐 수 없다. 그러니 모이고 표현하자’는 의지다.

    과거 민중의 저항은 격렬했고 역동적이며 과격했다. 그런데 이번 저항은 조용하고 대상도 불분명하다. 남성을 대상으로 한 비난보다 여성으로서 느끼는 불안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 분노가 주된 흐름이다. ‘내가 왜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안하게 살아야 하지’라는 의문에, ‘여성의 삶은 위험하다’는 명제가 사실화되는 데 저항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만이 아닌 남성의 노력도 동반돼야 한다.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온 세대가 공감해야 한다. 또한 여성을 타깃으로 한 범죄 예방 대책을 더욱 세부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추모 행렬에 동참한 여성들은 이렇게 외칠 것이다. ‘여성으로서 남은 삶을 잘 살아보자. 상처 난 마음을 보듬고 회복하자. 그러기 위해 그를 잊지 말고, 우리 사회가 반성하며 통찰하자.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불행하게 여기고 후회하는 삶이 아니라, 감사하게 여기고 당당히 받아들이는 삶으로 만들자’. 바로 이 대목에서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희생자와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었던 남성들도 추모 행렬에 더욱 많이 동참할 것이다.

    그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 물결은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강남역은 이제 더는 젊은이의 유흥가가 아닌, 인권을 소중하게 여기는 곳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