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351

2022.08.05

K-방산, ‘폴란드 잭팟’ 교두보로 글로벌 시장 공략 청신호

K2 전차,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 등 최대 25조 원 규모

  •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

    입력2022-08-0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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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로템이 개발한 K2 전차. [사진 제공 · 현대로템]

    현대로템이 개발한 K2 전차. [사진 제공 · 현대로템]

    ‘교두보(bridgehead)’는 목표물에 진입하고자 가장 먼저 장악하는 발판을 뜻한다. 군사작전에선 상륙·도하·공수 등 아군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적지에 진출하기 위해 확보하는 거점을 가리킨다. 일단 교두보를 탄탄히 갖추면 후속 작전에 큰 도움이 되지만 이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도입부에 잘 묘사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군이 나치 독일 치하 유럽에 들어가기 위한 교두보 확보 작전이었다. 상륙작전은 해안을 피로 물들일 만큼 치열했지만 결국 연합군은 노르망디를 통해 3주 만에 100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유럽 대륙에 밀어 넣을 수 있었다. 노르망디라는 교두보가 연합군의 유럽 탈환 길을 열어준 것이다.

    미국도 배척당한 유럽 방산시장

    그간 한국 방위산업에서 유럽은 대단히 진출하기 어려운 시장이었다. 유럽엔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역사를 가진 거대 방산업체가 즐비하다. 미국제 무기마저 유럽 시장에선 종종 배척당할 정도다. 냉전 초기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산업 기반이 망가진 유럽 각국에 잉여 무기를 공여해 일찌감치 방산시장 지배를 꾀했다. 그럼에도 유럽 각국은 성능과 신뢰성이 떨어지고 값이 더 비쌀지언정 유럽산 무기를 고집하며 독자적인 ‘방산 생태계’를 구축했다. 이렇게 장벽이 높은 유럽 방산시장에 진출하려면 두 가지 길밖에 없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레짐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 정도의 위상을 갖추거나, 실전에서 성능과 신뢰성이 검증된 최정상급 무기라고 인정받는 것이다. 고작 30~40년 역사를 가진 한국 방위산업이 이런 조건을 갖춰 유럽시장을 공략한다는 것은 어불성설로 여겨졌다.

    한국산 무기도 유럽에 진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 계기는 2010년 연평도 포격전이었다. 한국은 단위 면적당 가장 높은 화력 밀집도를 가진 북한과 대적할 수 있는 ‘포병대국’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포를 많이 가진 나라’ 정도로 인식된다는 것일 뿐,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무기에 관심을 갖는 나라는 없었다. 연평도 포격전 당시 한국의 K9 자주포는 제조업체가 방산전시회에서 홍보한 카탈로그 데이터보다 우수한 성능을 발휘했다. 바로 이 점을 일부 유럽 국가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거나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들이었다.

    노르웨이·핀란드·에스토니아는 K9의 긴 사거리, 빠른 연사속도, 자동화된 사격·탄약 보급 시스템을 높이 평가했다. 이 정도 스펙을 갖춘 화력체계가 있다면 압도적 물량을 갖춘 러시아 포병에 대적할 수 있다고 판단해 2010년대 중반부터 K9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포병대국 한국의 이미지와 실전에서 검증된 K9이 이룬 성과였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 방산의 유럽 진출을 위한 다음 포석으로 직결되진 못했다. 도입 물량 자체가 워낙 적고 대부분 완제품 수출 형태였기에 현지 인프라 구축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2010년대 중반 북유럽 국가의 K9 연쇄 도입 및 운용은 2022년 ‘폴란드 잭팟’의 밑거름 역할을 톡톡히 했다.

    K9은 우수한 성능뿐 아니라 후속군수지원 분야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그간 유럽산 무기는 대부분 여러 나라가 공동개발했다. 참여국 사이에 일감 확보를 둘러싼 갈등으로 무기 개발 프로젝트의 ‘뱃사공’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수리에 필요한 부속 하나 구하는 데 몇 달이 걸리기도 했다. 탈냉전 이후 유럽 각국의 군 규모가 크게 줄면서 방위산업의 ‘규모 경제’도 이뤄지기 어려웠다. 자연스레 무기 수리, 정비에 드는 비용도 뛰었다. 이런 유럽 방산시장 분위기에서 K9의 존재감이 빛을 발했다. 우선 한국군이 이미 1000문 이상 운용하고 있기에 부품 수급이 원활했다.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로 수리·정비에 소요되는 시간, 비용도 유럽제 무기와 비교할 수 없이 빠르고 저렴했다. K9을 운용하는 국가를 중심으로 한국산 무기가 성능과 신뢰성은 물론, 후속군수지원 등 모든 측면에서 매력적이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군비 증강 열풍

    마리우스 브와슈차크 폴란드 부총리 겸 국방장관(가운데)이 7월 27일(현지 시간) 안현호 한국항공우주산업 대표, 이용배 현대로템 대표, 손재일 한화디펜스 대표(왼쪽부터)와 FA-50 경공격기, K2 전차, K9 자주포 등 무기체계 구입에 관한 기본계약을 체결했다. [뉴스1]

    마리우스 브와슈차크 폴란드 부총리 겸 국방장관(가운데)이 7월 27일(현지 시간) 안현호 한국항공우주산업 대표, 이용배 현대로템 대표, 손재일 한화디펜스 대표(왼쪽부터)와 FA-50 경공격기, K2 전차, K9 자주포 등 무기체계 구입에 관한 기본계약을 체결했다. [뉴스1]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 전역에 군비 증강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각국이 재군비에 나섰지만 30년 동안 유럽 방위산업 생태계는 망가진 상태였다. 빠른 시일 내 많은 무기를 공급해달라는 유럽 국가의 요구를 따라갈 능력이 없는 것이다. 유로파이터 타이푼 전투기, 타이거 공격헬기, NH90 수송헬기 등 대표적인 유럽산 무기만 살펴봐도 생산 효율이 크게 떨어지는 실정이다. 프랑스 정부는 최근 우크라이나에 차륜형 자주포를 제공했는데, 이를 대체하고자 국영 방산업체에 동종 모델을 발주했다. 해당 업체는 “1문을 납품하는 데 18개월이 걸린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프랑스 국방부에 제출했다. 해당 자주포는 K9처럼 복잡한 시스템을 갖춘 것도 아닌, 문자 그대로 트럭 위에 곡사포를 얹은 단순한 구조다. 이런 자주포 1문을 만드는 데 18개월이 걸린다는 것은 유럽 방위산업이 얼마나 부실해졌는지 잘 보여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가깝고 경제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동유럽 국가들은 유럽 밖에서 살 수 있는 무기를 물색하고 나섰다. 저렴한 가격과 빠른 납품, 우수한 성능은 물론이고 탁월한 후속군수지원까지 뒷받침되는 ‘메이드 인 코리아’ 무기가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른바 ‘폴란드 잭팟’이 터진 배경이다. 사실 K2PL 전차를 비롯해 한국산 무기 도입 가능성이 거론되던 지난 몇 년간 폴란드에선 비판 여론이 비등했다. 특히 폴란드 방산업계에서 한국산 무기 도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과거 ‘크랩(Krab)’ 자주포 개발 당시 자체 개발한 차체가 성능이 부족해 한국산 K9 차체와의 경쟁에서 밀렸던 터였다. 폴란드 정부가 한국산 무기를 구매하기로 발표하자 현지 일부 언론도 반대 목소리를 냈다. 한국산 무기 도입을 주도한 마리우스 브와슈차크 폴란드 부총리 겸 국방장관은 “대안이 있느냐”는 말로 반대파들 입을 닫게 만들었다. 브와슈차크 장관은 자국산 무기체계의 성능 부족, 미국과 유럽산 무기의 납기 지연 사례를 거론하며 “한국과의 협업 말고는 사실상 대안이 없다”고 자국 여론을 설득했다.

    브와슈차크 장관의 말처럼 미국과 유럽산 무기들은 폴란드가 요구하는 빠른 납기, 우수한 성능과 신뢰성, 합리적 유지비용, 기술이전 및 폴란드 방산업계와 협업 조건을 충족할 수 없다. 우선 독일과 프랑스는 차세대 전차 개발 사업에서 폴란드의 참여를 거부했다. 폴란드는 지난해 미국산 M1A2 전차 도입을 결정했으나 초도 물량은 2024년 이후에나 인도될 예정이다. 그마저도 전량 미국에서 생산돼 기술이전을 기대할 수 없다. 자주포는 어떨까. 폴란드 자국산 크랩 자주포와 보르숙(Borsuk) 보병전투장갑차의 성능은 현 기준에선 평범한 편이지만 미래전에 대응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폴란드 기술로는 당분간 가시적인 성능 개량이 어려운 실정이다. 대안으로 부상한 미국제 M109A7 자주포 도입도 여의치 않다. 사실상 생산 ‘끝물’로 평가되는 데다, 미군 납품 물량이 밀려 있어 2024년 이후에나 전력화가 가능하다. 독일제 PzH-2000도 기술이전과 납기, 가격 측면에서 폴란드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했다. 보병전투장갑차 분야에선 미국 모델 중엔 이렇다 할 후보가 없었다. 유럽제 보병전투장갑차는 CV90, 아스코드 같은 저성능 모델만 존재하는 상황이다.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대규모 정예군을 단기간에 양성해야 하는 폴란드 입장에선 미국과 다른 유럽 국가는 ‘방산 파트너’로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폴란드, 한국군 3배 규모 K2 전차 도입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개발한 FA-50 경공격기. [사진 제공 · 공군]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개발한 FA-50 경공격기. [사진 제공 · 공군]

    결국 폴란드는 요구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해외 파트너를 물색한 끝에 한국이라는 매력적 대안을 찾았다. 국방장관을 중심으로 한 대표단을 한국에 보내 도입 대상인 무기체계를 직접 확인한 뒤 한국과 대규모 방산 협력을 결정했다. 이번에 성사된 폴란드로의 방산 수출은 품목이 다양하고 전체 거래액도 역대 최대 규모다. K2 전차,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 수출이 예정대로 진행되면 1차 수출액만 약 10조 원에 달한다. 앞으로 10년 동안 수출계획이 모두 현실화되면 그 규모는 최대 25조 원에 달할 전망이다.

    우선 K2 전차는 종주국 한국군이 도입한 물량의 약 3배인 1000대 이상을 폴란드에 공급할 예정이다. 현대로템은 2024년까지 기존 K2 전차를 일부 변형한 모델 180대를 국내 공장에서 생산해 직접 납품한다. 여기에 성능을 개량한 모델을 2030년까지 국내에서 400대 생산해 추가로 공급한다. 이 기간에 K2 전차 기술을 폴란드 측에 제공해 현지 생산 라인도 구축할 계획이다. 2026년부터는 ‘K2PL’로 명명된 현지화 모델 300대를 폴란드 공장에서 생산하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폴란드는 한국 국방과학연구소와 현대로템 등이 추진 중인 K3 차세대 전차 개발 사업에도 파트너로 참여할 전망이다. 해당 사업에 따라 유럽 현지에 3.5~4세대 전차 생산 인프라도 건설되는데, 슬로베니아 등 인접 국가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국-폴란드 방산 협력 기대

    한화디펜스가 개발한 K9 자주포. [사진 제공 · 한화디펜스]

    한화디펜스가 개발한 K9 자주포. [사진 제공 · 한화디펜스]

    K9 자주포의 경우 692문 수출이 확정됐다. 당장 올해부터 2024년까지 K9A1 48문이 납품된다. 마찬가지로 폴란드에도 생산 인프라를 구축해 2026년부터는 K9A2 모델을 ‘K9PL’이라는 명칭으로 644문 생산하기로 했다. 폴란드는 한화디펜스가 개발한 보병전투장갑차 AS21도 최소 600여 대에서 최대 1000대까지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 군용기 분야의 방산 협력도 가시화됐다. 폴란드는 올해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FA-50 전투기 8대를 긴급 납품받고 2023년까지 FA-50 블록10 사양을 총 48대 도입할 전망이다. 폴란드에 종합정비창을 설치해 2024년부터 능동형위상배열레이더(AESA) 탑재 등으로 개량된 FA-50PL 버전도 생산할 것으로 보인다.

    폴란드 국방부는 이번에 계약이 발표된 무기 말고도 KF-21 개발·양산 협력, 천무 다연장로켓 기술 도입 협상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언급한 협력 사업이 모두 성사되면 그 거래액은 총 얼마가 될지 가늠조차 어려운 천문학적 규모가 된다. 폴란드는 한국과의 방산 협력 계획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비셰그라드 그룹(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에도 파트너십 동참을 제안하고 있다고 한다. 동유럽 국가들은 그간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와 무기 거래에서 ‘갑질’에 시달렸다. 그래서인지 폴란드의 제안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전해진다. 상당수 동유럽 국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대대적인 군사력 확장 및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폴란드의 한국산 무기 대량 구매와 현지 생산 인프라 건설이 비셰그라드 그룹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로의 추가 수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동유럽에서 계속 수출 실적이 쌓이고 규모 경제가 만들어지면 한국-폴란드 협업으로 탄생할 무기체계는 세계 방산시장에서 최강의 ‘가성비’를 갖춘 매력적 대안으로 급부상할 것이다. 과거 노르망디 교두보 마련이 ‘상륙작전의 끝’이 아니라 ‘유럽 탈환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한국 방산의 폴란드 교두보 확보는 ‘K-방산’ 글로벌 돌풍의 시작이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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