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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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보수’하려면 량수밍의 ‘썩지 않는’ 보수주의 돌이켜보라

[조경란의 21세기 중국] 마오쩌둥과 ‘맞짱’ 뜬 비판적 유학자… “분수 지키며 편안히 머무는 게 중국”

  •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입력2021-05-1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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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비판적 유학자 량수밍. [바이두백과]

    중국의 비판적 유학자 량수밍. [바이두백과]

    필자는 량수밍(梁漱溟, 1893~1988)을 중국의 ‘진짜’ 보수주의자로 꼽고 싶다. 현대 중국사의 중요한 분기점인 1919년 5·4운동(제국주의·봉건주의에 반대한 학생운동) 하면 보통 루쉰(魯迅), 천두슈(陳獨秀), 후스(胡適)만 떠올리게 마련이다. 일본의 중국학자 미조구치 유조는 량수밍을 “또 하나의 5·4”라고 평가했다. 량수밍이 보수주의자이면서도 5·4운동이라는 ‘사건’을 자기 변화의 계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날 중국의 ‘대륙신유가(大陸新儒家)’ 등 문화 보수주의자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수구(守舊)가 아닌 성찰적 유학(儒學)을 제시했다. 왜 량수밍이라는 보수주의자에 주목해야 하는가. 그가 ‘무서운’ 보수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왜 무서운가. 자신의 삶과 사상을 통해 좌고우면하지 않는 ‘순수함’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순수했기에 마오쩌둥(毛澤東)과도 ‘맞짱’을 뜰 수 있었다.

    중국이란 무엇인가

    량수밍은 중국에서 보기 드물게 반성적 자기인식을 보여준 인물이다. 5·4운동이 한창이던 1921년 그가 출판한 ‘동서문화와 철학’이라는 책은 반성적 자기인식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여기서 그는 자기 나름의 성찰적 유학을 제시했는데, ‘타자성’과 ‘생활로서 유교사회주의’가 핵심이다. 량수밍은 5·4운동의 흐름 속에서 서양이라는 타자의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유교적 가치를 새롭게 발견했다.

    그에게 5·4운동은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건’이다. 여기서 사건이란 ‘기존과 다른 새로움의 도래’다. 5·4운동이라는 ‘사건’을 통해 비로소 중국 지식인들은 ‘우리는 누구인가’ ‘중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과 마주했다. 이런 질문은 중국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통일된 답이 더는 없다고 자각해야 가능하다. 량수밍은 5·4운동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자기(개인과 국가)를 되돌아보게 됐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현실 속 서양은 ‘우월한 타자’처럼 보였다. 당대 중국의 일부 지식인은 서양을 통해 중국이라는 존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중국 문화 특유의 자기중심적 질서도 비판 대상이 됐다. 타자로 비춰본 중국이란 무엇이냐는 질문, 그 선봉에 량수밍이 있었다. 그는 서양 문명에 대한 무조건적 추수·배척을 모두 거부했다. 량수밍과 그의 저서를 두고 동시대를 산 철학자이자 헌법학자 장쥔마이(張君勱)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전에는 모두 유럽을 배우려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인은 자신의 문화를 반성하고 있다. 구주(歐洲) 문화는 이미 위기에 빠졌는데, 중국은 이후 신문화의 방침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옛 문화를 묵수(墨守)해야 하는가, 아니면 유럽 문화의 지나간 옛글을 베껴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가. 량수밍은 종종 이 문제를 생각했는데, 그의 저서(‘동서문화와 철학’)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룬 것이다.”



    저명한 계몽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을 여행하고 ‘구유심영록(歐遊心影錄)’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서양 문화는 이미 무너져 중국 문화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데, 당신은 우리 유럽에 와서 해결 방안을 찾고 있는가”라는 서양인들의 발언을 소개했다. 이에 량치차오는 자신감을 갖고 동서 문화의 융합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남의 칭찬에 일희일비” 중국 문명 ‘불완전함’ 지적

    1938년 중국공산당 근거지 옌안에서 마오쩌둥(오른쪽)을 만난 량수밍. 두 사람 모두 중국의 농촌 문제를 주목했지만 진단과 해법은 달랐다. [바이두백과]

    1938년 중국공산당 근거지 옌안에서 마오쩌둥(오른쪽)을 만난 량수밍. 두 사람 모두 중국의 농촌 문제를 주목했지만 진단과 해법은 달랐다. [바이두백과]

    그러나 량수밍은 이런 시각에 대해 “서양 문화에 반감을 가진 서양인들 사이에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중국 문화를 흠모하는 병폐가 있다”며 회의적 태도를 취했다. 일부 서양인이 자기 사회에 대한 불만을 중국에 투사한다고 본 것이다. 량수밍은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고 우리가 남들과 같다고 하기 때문에 고귀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중국인 자신의) 중국 문화에 대한 그러한 숭배가 바로 중국 문명의 불완전함을 보여준다”고도 말했다.

    당시 미국 철학자이자 교육학자 존 듀이, 영국 철학자 겸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 같은 저명한 지식인들은 중국을 방문해 “동서 문화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말했다. 중국인들도 서양 지성의 말에 고무됐지만, 량수밍은 이를 매우 무책임한 행위로 봤다. 동서 문화가 융합하고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당위만 말했을 뿐, 조화의 원리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량수밍이 보기에 동서 문화의 조화란 모호한 희망일 뿐이었다. “조화하고 융합하려면 방법과 원리가 있어야 하는데 누구도 그것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량수밍의 인식은 동서 문화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서로 다름을 명확히 인정하지 않은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과 전반서화론(全般西化論)이 당대 중국 지성계에 대두했다. 량수밍에 따르면 중체서용론은 서양 문물을 자기중심적으로 수용하자면서 나온 자구책이다. 상대방의 장점을 취사선택해 수용·흡수해야 한다는 논리로, 타자와 자기 사이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성찰이 없다. 사회 전반을 서양화하자는 전반서화론도 방향만 다를 뿐 같은 한계를 보였다. 량수밍은 서양 문화든, 중국 문화든 자기 성찰 없는 수용에 반대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서구인의 중국 평가에 편승하려는 량치차오류의 인식에 동의할 수 없었다.

    량수밍은 “서양과 접촉하지 않았다면 중국인은 서양인과 같은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봤다. 여기서 ‘서양인과 같은 길’은 서양식 근대화다. 동양이 근대화하지 못한 현실 앞에 일부 지식인은 “사실 동양도 스스로 근대화할 씨앗을 가졌다”며 내재적 발전론을 내새웠다. 반면 량수밍은 서양식 근대화를 역사의 보편적 과정으로 여기지 않았다. 량수밍은 서양의 사회주의를 중국 유교와 연결하는 과감한 시도를 감행했다. 다만 여기서 사회주의와 유교는 제도보다 생활 태도에 가깝다. 그는 ‘동서문화와 철학’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짚었다.

    “중국인은 서양인과 다른 방향과 태도를 가졌다. 중국인이 걷는 길은 전진을 추구하는 서양과 다르다. 중국인의 사상은 분수를 지키며 편안히 머무는 것이다. 만족할 줄 알고 욕심을 줄이기에 생명을 기른다. 물질적 향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중국인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 만족하고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으며 결코 환경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량수밍은 생전 당시부터 지금까지 중국에서 ‘기인’으로 통한다. 리다자오(李大釗), 천두슈, 후스와 함께 베이징대 철학과 교수로 재임했지만 이내 교수직을 내던지고 농촌에서 ‘향촌 건설운동’을 주도했다. 농촌 문제에 천착했다는 점에서 중국식 사회주의라 할 수 있는 마오주의와 접점이 있다. 다만 농촌을 계급 모순·갈등의 현장으로 본 마오쩌둥과 달리, 량수밍은 ‘윤리 본위 사회’의 회복을 농촌의 급선무로 봤다. 중국인은 서양식 개념인 계급보다 가족·친지·붕우 등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기에 유교적 공동체를 올바르게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출세욕 없는 爲己之學

    량수밍 사상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가 보여준 실천적 삶의 태도다. 그의 학문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자기의 수신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자기 완결적 이론 체계를 구성해야 한다는 학문적 욕망은 물론, 입신출세의 욕망도 없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두려울 것이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후인 1953년 량수밍은 “혁명 속에서 중국공산당은 농민에 의지했고 향촌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통치의 중심이 도시로 바뀌면서 농민을 버렸다”며 중국공산당의 농촌정책을 비판했다. 1950년 마오쩌둥의 요청으로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중국공산당의 국정 자문회의)에 참여한 그였지만, 마땅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다.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의 맹비난에도 량수밍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량수밍은 보수주의자였으나 고여서 썩지 않는, 수구 아닌 보수주의를 지향했다. 오늘날 중국의 문화 보수주의자들은 유교를 명분으로 서양과 대결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과 같은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중국 문화를 보수(保守)하고 보수(補修)하려면 그 ‘오래된 미래’ 량수밍의 삶과 사상을 돌이켜봐야 한다.

    조경란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인문정책특별위원회 위원. 중국현대사상 · 동아시아 사상 전공. 홍콩중문대 방문학자 · 베이징대 인문사회과학연구원 초빙교수 역임. 저서로는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 신좌파·자유주의 · 신유가’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 전통 · 근대 · 혁명으로 본 라이벌 사상가’ ‘국가, 유학, 지식인 : 현대 중국의 보수주의와 민족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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