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60

2020.10.16

티앤씨재단 혐오 컨퍼런스 지상중계

홀로코스트는 히틀러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다

혐오와 차별의 종착역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0-10-16 19: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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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 교수
    최호근 교수.

    최호근 교수.

    베를린에 있는 3개 기념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려 합니다. 첫 번째로 유대박물관(Das Jüdisches Museum)입니다. 폴란드 출신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설계한 해체주의 방식의 아주 희한한 건물인데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누군가가 긴 쇳덩이를, 혹은 뱀을 바닥에 던져서 쭈그러져 있는 듯한 그런 불편한 모양을 보이고 있어요. 유리창은 칼로 난자한 것처럼 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죠. 그게 바로 건축가가 의도했던 것인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코드가 심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5개의 텅 빈 공간이 있는데, 가운데 하나가 홀로코스트 탑입니다. 들어가 보면, 바닥에 이스라엘 작가가 만든 1만 개 이상의 벌린 입, 눈을 새긴 동그라미 모양을 한 철 조각이 깔려져 있습니다. 한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아주 찌릿찌릿하고 신경 거슬리는 듯한 소리가 납니다. 작가는 베를린 시민들이 이웃들을 혐오하고 차별하고 배제하고 강제 이송해서 다시는 세상에 살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죠.

    ●잊혀진 홀로코스트, 집시와 장애인들

    두 번째는 ‘로마와 신티 희생자 추모 기념관’입니다. 갑자기 로마라고 하니까 의아해하실 것 같은데 우리가 집시라고 부르고 독일 사람들은 치고이너(Zigeuner)라고 부르는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집시나 치고이너는 그 사람들에게 모욕적인 단어입니다. 

    나치 시기 죽어간 22만 명 희생자 중 독일 내에서 희생됐던 집시들은 4만 명쯤 되는데 이들은 숨겨진 홀로코스트라고 해서 1945년 이후에도 오랫동안 거론이 안 됐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사죄, 배상은 이어졌지만 집시들은 배제가 됐죠. 그리고 한참 뒤에서야 추모기념물이 베를린 한복판에 세워지게 된 겁니다. 

    세 번째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베를린 필하모니 건물, 노란색 타일 건물 바로 뒤에 있는 작은 기념물입니다. 파란색 아크릴 판 밑에 예사롭지 않은 희생자들의 면면이 보입니다. 점자판 기록이 있어서 손을 올려놓으면 맹인들도 읽을 수 있게끔 돼 있습니다. 바로 안락사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유타나시아(Euthanasia)의 희생자였죠. 



    나치 독일은 유대인이나 집시만 죽인 게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로 컸던 희생자들이 바로 안락사 프로그램 희생자들이었습니다. 7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죽은 이유가 너무 허망합니다. 1939년 히틀러는 2차 대전을 준비하면서 ‘장애인들이 전국 병상의 80%를 차지해 전쟁이 나면 부상병을 위한 병상이 별로 없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히틀러의 ‘죽이라’는 명령에 따라 자신들의 가족이자 자식이자 부모였던 장애인들은 5대 수용소에 수용됐고 학대를 당하다 굶어 죽었습니다. 너무 오래 걸리다 보니까 페놀 주사까지 동원됩니다. 

    이처럼 ‘혐오스럽다’ ‘다르다’ ‘미개하다’ ‘부족하다’는 판단이 들면 여호와의 증인이건, 동성애자건, 정치적인 반대파들이건 모두 죽었습니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들이 동유럽 지역인 북슬라브인, 남슬라브인 포함해서 500만 명에 달하고 유대인 집시 장애인들까지 포함하면 나치 시기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1100만 명을 헤아립니다.



    ●나치는 왜, 어떻게 유대인을 죽였나

    그렇다면 왜 이렇게 끔찍한 범죄가 벌어졌을까요. 

    우선 유대인에 관해 독일인들은 ‘땀 흘리지 않는 종자’ ‘고리대금업이나 투기를 통해 돈을 벌어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강제수용소 입구에는 독일어 대문자로 ‘아르바이트 마흐트 프라이(Arbeit Macht Frei)’ 즉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유대인에 대한 대단한 조롱이었죠. 여태까지 일하지 않고 투기하고 돈 빌려주고 고리대금업에 종사했으니까 이제는 땀 흘려서 일해 봐, 그래야 사람이 되거든? 이런 뜻이니까 말이죠. 

    유대인들에 대한 오해는 굉장히 심했습니다. 영국 런던에 자리 잡은 자본가들의 핵심이며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했을 때에는 소련 정치국 간부 40% 이상이 유대인이라는 통설도 유행했습니다. 즉 당시 독일인들은 1929년에 독일 경제를 완전히 무너뜨린 사람들이 유대인들이고, 공산주의 혁명으로 독일을 위협하고 있는 소련의 핵심 세력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독일 사회 내부에서는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인 언론인, 교수, 변호사 같은 전문직에 유대인들이 많았는데 이 역시 육체 노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 위에 올라타서 세상을 살아간다고 하는 선입견, 편견, 배후의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 밑바닥에는 다름 아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이라는 책을 정독해보니 이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겪었던 전쟁의 패배에 따른 비참함, 1929년의 대공황을 지나며 국민의 3분의1이 실업자가 됐는데 이런 상황에 대해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 그러면 누구지? 할 때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을 지목했고 그 유대인들이 결국 희생양이 된 거죠. 

    사람들은 광기만을 얘기하지만 그 이전에 패망과 경제 불황이라는 엄청난 재난이 있었고 여기에 누군가가 거짓, 루머, 그럴 듯한 통계들을 갖다 붙이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 분노, 증오를 악의 씨앗처럼 키우고 있었다는 거죠. 

    신티족과 로마족에 대해서는 반사회적 범죄자라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이 편견은 뿌리가 굉장히 깊습니다. 오늘날에도 여행기를 적은 블로그 글들을 보면 스페인 마드리드에 갔는데, 로마에 갔는데 집시 여러 명이 둘러싸고 정신없게 한 다음 소매치기를 하니 조심하라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다 거짓일 거라고 믿지는 않지만 그런 일을 벌인 사람들이 집시라고 단정 짓는 것이 과연 정확한지는 알 수 없죠. 1930년대, 40년대나 지금이나 집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결정적으로 바뀐 것 같지는 않아요. 

    수많은 나치 희생자들 가운데 저한테 너무 큰 충격으로 남았던 게 앞서 언급한 장애인들인데요. 당시 장애인들을 그린 포스터에는 ‘지금 눈앞에 보는 이 환자가 60세가 되기까지 5만 마르크를 소비한다’ ‘여러 사람의 의료 인력을 소비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인간을 존엄성측면에서 보는 게 아니라 사회에 기여한 게 뭔가, 소비한 게 뭔가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면서 쓸모없으니 죽여야 된다는 논리를 만든 거죠. 

    홀로코스트는 나치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입니다. 길게 보면 1933년부터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패망하기까지 벌어졌던 범죄입니다. 

    홀로코스트는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천재지변도 아니었죠. 히틀러는 결코 총칼로 집권했던 게 아니었어요. 1932년 12월 총선에서 44%의 표를 주어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당을 1당으로 만든 사람들은 바로 독일 국민들이었습니다. 히틀러는 광신주의자가 아니라 현실 정치인이었고, 국민들의 작용과 반작용을 보아가며 행동했고 국민들이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갔습니다.

    ●인종주의적 편견이 만든 홀로코스트

    여기서 ‘제노사이드’라는 낯선 단어를 잠깐 얘기하려고 해요. 폴란드의 법학자였던 라파엘 렘킨이 만든 말인데 제노스(genos)는 그리스어로 인종이라는 뜻이고 사이드는 학살이라는 뜻입니다. 1990년대에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르완다 인종학살을 제노사이드라고 부르는데 제노사이드는 8개, 길게 보면 10개 단계를 거치면서 서서히 진행되다가 급속도로 빨라지게 됩니다. 

    그 첫 번째가 분류입니다. 나, 너, 우리, 그들, 그 다음에 우리 안에서도 내(內) 집단, 외(外) 집단을 가릅니다. 그러고 난 뒤 아흔아홉 가지가 같은데 한 가지 다른 걸 전면에 내세웁니다. 같은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조그마한 차이를 내세워 우리와 너희, 나와 적을 가르는 거죠. 

    두 번째로는 미개하다는 걸 내세우기위해 가장 대표적인 민속 하나를 그 사람들과 결부시킵니다. 상징화라고 하죠. 차이를 우선 드러내고 다음에는 이러이러하니까 너희는 문명을 몰라, 미개해, 일탈 했어 등등 수많은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차별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 다음에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오는데, 바로 비인간화, 또는 탈 인간화라고 얘기하는 순간입니다. 유대인들을 예로 들면 그 단계에 오면 유대인들을 전문직 종사자, 교육 많이 받은 사람, 성공 무대에 올라서려는 사람이라 부르지 않고 파충류, 양서류 기생충, 쥐, 전갈, 뱀이라고 부르기 시작하고 또 그런 모양을 그린 포스터들이 보급되기 시작하죠. 

    이후 교육을 통한 강화가 시작됩니다. 1930년대 나치 집권 이후에 인종학 수업 시간이 초, 중, 고등학교에서 개설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오염된 호수에 있는 물고기가 아무리 깨끗하게 살려고 하더라도 허리가 휘고 눈이 멀 수밖에 없는 것처럼 비정상적인 생각, 느낌, 혐오, 선입견이 정상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독일 인종주의자들은 아리안족 신화도 만들어냅니다. 금발의 머리, 딱 벌어진 어깨, 190cm를 넘는 큰 키가 아리안 족의 특징이라면서 ①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독일인들이 첫 번째 종자이며 ②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유럽 서쪽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도 문명을 아는 두번째 종자이고 ③동유럽에 사는 슬라브 사람들은 문명을 모르는 미개한 인종이고 ④네 번째 종자가 유대인, 집시같은 인간 이하, 문명의 입장에서 본다면 파괴해야 될 존재라는 겁니다. 

    이런 교육이 이뤄지면 학생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뭐가 팩트이고 뭐가 루머인지 학구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군대에 가고 청년이 됩니다. 이게 바로 제노사이드의 네 번째 단계입니다. 이후는 조직하고 강제 격리하고 강제 이송하고, 마지막으로는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독일인들의 인종주의 사고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1935년 뉘른베르크 나치당 전당대회에서 그 유명한 인종차별법이 통과되면서부터입니다. 즉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네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유대인이면 피의 2분의 1이상이 유대인이라는 유대인 구별법을 국가가 법으로 만든 겁니다. 예외가 있었는데 피가 4분의 1이하라 하더라도 유대교를 믿으면 유대인으로 인정했습니다. 

    이 양대 조건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주요 공직에서 퇴출됐고 의사면허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독일인들은 세 번의 기회를 놓쳤다

    이렇게 되자 유대인들은 곳곳에서 놀림감이 됩니다. 1938년도 빈에서부터 나타난 것인데 길거리 한복판에서 청년들이 유대인 노인을 둘러싼 뒤 수염을 엉망으로 깎아버린다든지 지나가던 유대인들을 붙들어놓고 칫솔로 도로 청소를 시킨다든지 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종국에는 이들을 격리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갑니다. 폴란드의 바르샤바, 우치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만들어졌던 게토가 그것입니다. 꼴 보기 싫은 존재, 전염병 보균자들이니 높게 담을 쌓고 철조망을 만들고 왕래를 차단해야 한다면서 한곳에 몰아넣은 거죠. 그리고 1940년, 41년부터는 ‘마지막 최종 해결책’을 얘기하기 시작해요. 그게 바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가스실같은 5대 절멸 수용소입니다. 여기에서 유대인 약 9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진 거죠. 

    나치당은 거대한 기계처럼 움직였습니다. 맞물린 나사 바퀴들이 돌아가듯이 미세 분업이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나치당이 유대인 학살을 기획하고 이를 공무원들에게 하달하면 경찰은 이들은 체포해 기차에 실었고 철도청 관리들은 이들을 이송했고 친위대 장교들은 아우슈비츠 승강장에서 긴 가죽 장화를 신고 사람들을 분류해 가스실로 넣었습니다. 왜 독일인들은 중간 중간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을까요? 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나중에 전후 재판에서 친위대 장교들은 ‘나는 유대인을 죽인 적이 없다. 국가의 명에 따라서 가스실 버튼을 눌렀을 뿐이다’ ‘빵을 빼돌려 어린 소년한테 주기도 했고 그들의 탈출을 돕기도 했다’는 식의 변명들을 늘어놓습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은 손끝에 피 한 방울 안 묻혔다는 거죠. 하지만 이런 식의 분업화된 과정을 누군가가 설계하고 기획했다면 적어도 독일의 성인들, 지식인들은 이걸 간파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각자 선 자리에서 내가 바퀴를 멈추거나 혹은 선로를 벗어나면 이 대량의 죽음을 막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면, 혼자가 두렵다면 함께 했어야 되는 거죠. 홀로코스트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변명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충분히 세 번 쯤은 뒤로 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한 이웃, 의로운 이웃의 중요성

    슈투트가르트에는 벤츠 박물관이 있습니다. 시각 장애인들이나 보행 장애인들도 와서 마음껏 고급 벤츠 자동차들을 만질 수 있게끔 해놨는데 배리어 프리 뮤지엄이라고 하죠. 

    과거에 대한 반성은 안타까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행동으로, 결과로, 조직으로, 제도로, 건물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홀로코스트를 바라보면서 가져야 될 감정은 두 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나와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안네 프랑크처럼 숨어 지내다가 죽어갔던 희생에 대한 안타까움, 온정, 애도, 공감 이런 것들이 필요한 거죠. 이런 것들이 우리 몸속에 들어올 때 그것은 백신이 됩니다. 웬만한 혐오, 웬만한 차별을 하지 않게끔 우리를 굉장히 민감하게 만들죠. 저는 이게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조금 더 나갔으면 좋겠어요. 이스라엘 대법원은 1957년부터 홀로코스트가 벌어졌을 때 아무런 대가 없이 위험에 처한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썼던 이방인들, 유대인 아닌 사람들을 위해 포상을 하고 기념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숫자가 2만 7000명이 넘어요. 어두컴컴했던 순간에 양심의 목소리에 따라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썼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겁나지 않았을까요? 가족이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았을까요?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남과 다른 선택을 합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철학자 칸트가 묘비명에 새긴, 중요한 3대 비판서에 나오는 한 문구가 있어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커지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는 두 가지가 우리 인생에 있다. 첫째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 두 번째는 내 마음속 도덕의 법칙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뭔가 남다른 게 있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거죠. 그걸 어떤 사람들은 양심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라고 하죠.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으면 가슴 여기, 옆구리가 아프죠. 바로 그런 마음, 우리는 과연 교육을 통해 또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자꾸 그런 생각을 하고 공유하면서 우리도 비슷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말을 통해서, 어떤 험악한 얘기를 통해서, 표정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입게 될 상처, 피해, 분노, 이런 것들을 미리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감수성이에요. 젠더 감수성, 인권 감수성, 평화 감수성, 이걸 우리는 과거 홀로코스트 시대에 있었던 의로운 이웃들을 생각하면서 이 상황에, 공간에서 내가 어떻게 할까를 시뮬레이션하면서 한없이 얘기하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바뀌어갑니다. 이게 바로 역사를 공부하고 특히 홀로코스트의 끔찍했던 과거를 잠시 얘기하고 듣고 공부하는 이유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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