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보다 많은 성평등 예산 청년 일자리도 ‘성인지’로 넘어가

  •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입력2019-12-0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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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평등 31조>일자리 25조의 내막

    • 기준 애매하면 다 ‘성인지 예산’?

    • 고용·복지 정책도 여성 우대한다면 ‘성인지 예산’으로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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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예산안만 보면 내년 역점 사업은 양성평등인 것처럼 보인다. 기획재정부가 9월 발표한 예산안에 따르면 보건, 복지, 노동 예산은 총 181조6000억 원. 이 중에는 성인지 예산(성평등 예산) 31조8000억 원이 들어 있다. 지난해에 비해 25.1% 늘었다. 이는 사상 최대 규모인 일자리 예산을 크게 앞선다. 2020년 일자리 예산은 25조8000억 원. 최근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제한으로 힘을 쏟겠다던 연구개발(R&D) 예산도 24조1000억 원에 불과하다. 

    그런데 예산을 자세히 뜯어보면 성인지 예산은 양성평등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보건복지부의 노인 지원 자금은 물론, 고용노동부의 일자리 관련 예산도 성인지 예산에 편성돼 있다. 그렇다고 아무 곳에나 이름을 붙여 예산을 따낼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보건복지부와 고용노동부, 여성가족부를 제외하면 대다수 정부 부처에서는 성인지 예산 신청액을 줄였다. 성인지 예산의 정체는 무엇일까.

    청년이 문제라면서 청년 없는 일자리 예산

    여성 일자리박람회 및 돌봄서비스는 대표적인 양성평등 정책으로 꼽힌다. [뉴스1]

    여성 일자리박람회 및 돌봄서비스는 대표적인 양성평등 정책으로 꼽힌다. [뉴스1]

    성인지 예산에 이렇게 많은 재원을 투입하는 이유는 저출산 문제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해 기준 국내 합계출산율(가임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자녀 수)은 0.98. 통계청 추산 올해 합계출산율은 0.8대로 떨어질 전망이다. 이에 지난해부터 정부는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내놓겠다고 공언했다. 지난 12년간 저출산 문제 해결에 116조 원의 정책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성평등 정책을 통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같은 내용을 담은 ‘저출산·고령사회 정책 로드맵’도 확정 발표했다. 

    이 정책은 발표 당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일자리 등 청년의 삶과 직결된 분야를 우선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등 정부 관련 연구기관의 보고서에도 성평등보다 청년 전체의 삶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지난해 발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에는 지난 12년간 정책 지원이 대부분 출산을 앞둔 기혼 가정에 집중됐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를 의식한 듯 내년 일자리 예산은 사상 최대 수준이다. 올해 약 21조2000억 원에서 내년엔 25조8000억 원으로 21% 늘었다. 내년에는 먼저 2조9241억 원을 투입해 노인, 장애인, 지역청년 등 취업 취약계층을 위한 재정 지원 일자리 95만5000여 개를 만든다. 올해 투입한 직접 일자리 예산(2조779억 원)에 비해 41% 늘었다. 하지만 가장 크게 변한 분야는 청년 일자리가 아닌 노인 일자리. 올해 61만 개에서 2020년 74만 개로 대폭 확대됐다. 반면 지역주도형 청년 일자리는 1만8000개에서 2만4000개로 소폭 증가에 그쳤다. 그나마도 노인 일자리 확대는 직접 일자리 지원이지만, 지역주도형 청년 일자리는 창업 지원금을 통해 지원된다. 이 예산은 2019년 2조5000억 원에서 2020년 2조3000억 원으로 줄어든다. 



    청년층을 위한 정책에는 청년추가고용장려금 제도가 있다. 이는 중소·중견기업이 청년 정규직을 1명 신규 채용할 경우 연봉의 3분의 1 수준인 900만 원의 인건비를 회사에 지급하는 제도다. 이외에도 다양한 고용장려금 관련 예산이 5조8000억 원에서 6조6000억 원으로 늘어난다. 실업소득 유지·지원 예산도 7조9000억 원에서 10조3000억 원으로 대폭 증가했다.

    성평등 무관해 보여도 성평등 예산으로 흡수

    지난해 3월 세계 여성의날을 기념해 한국여성대회에 참가한 시민들. 하지만 성인지 예산은 이와 전혀 무관한 곳에 더 많이 쓰이고 있었다. [동아DB]

    지난해 3월 세계 여성의날을 기념해 한국여성대회에 참가한 시민들. 하지만 성인지 예산은 이와 전혀 무관한 곳에 더 많이 쓰이고 있었다. [동아DB]

    일자리 지원 금액은 전부 회사나 단체에 지급하는 금액이다. 직업훈련을 돕는 ‘평생내일배움카드’도 일자리 정책에 포함돼 있다. 이는 취업준비생이나 실직자는 물론, 자영업자까지 구직에 필요한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국가에서 교육비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교육이 필요한 사람에게 교육비를 지급하는 대신, 교육시키는 학원에 교육비를 지원한다. 

    그렇다면 청년을 위한 일자리 사업의 정책 예산은 어디에 가 있을까. 의외로 성평등 예산에 포함돼 있었다. 성평등 예산의 정식 명칭은 성인지 예산. 총 31조7639억 원 규모로 책정됐는데, 지난해(25조4000억 원)에 비해 25.1% 늘었다. 그런데 정작 성평등에 직접 기여하는 중점 추진사업 예산은 1780억 원으로 전체의 0.6%에 불과하다. 중점 추진사업 예산이란 관계부처 및 상설 협의체의 논의를 통해 선정된 성평등 사업 관련 예산을 말한다. 

    성평등을 위한 주요 사업에는 여성가족부의 ‘성범죄자의 신상정보 공개 고지시스템 구축 및 운영’(약 6억 원), 경찰청의 ‘치안 정책 성주류화제도 운영’(1억 원)과 ‘여성 범죄 예방 인프라 구축’(15억 원), 교육부의 ‘대학 성희롱·성폭력 근절 지원체계 구축’(4억 원)이 포함됐다. 이외에도 여성가족부가 신청한 ‘여성경제활동 촉진 지원’(585억 원) 등을 더하면 넓게 봐도 성평등과 직접 관련된 예산은 2000억 원이 조금 넘는다. 

    성인지 예산은 대부분 보건복지부 예산이다. 사실상 출산, 육아 관련 정책 자금은 거의 다 성인지 예산으로 배정됐다. 보건복지부의 성인지 예산은 총 10조9669억 원으로, 올해에 비해 41.8% 늘었다. 증가분은 대부분 내년부터 만 7세 미만으로 지급 대상이 늘어나는 아동수당(2조2833억 원)이었다. 이 밖에도 영유아 보육료 지원(3조4056억 원), 장애인 활동 지원(1조2752억 원), 가정 양육수당 지원(8157억 원), 보육서비스 지원 및 교사 근무환경 개선(2215억 원) 등에 예산을 쓴다. 여성가족부도 관련 예산으로 아이돌봄 사업에 2440억 원을 쓰겠다고 밝혔다. 

    물론 출산 및 육아 부담을 줄이는 것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돕고 경력 단절을 예방한다는 장점이 있다. 넓은 의미에서 성인지 예산으로 보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하지만 보건복지부가 성인지 예산으로 신청한 내역 중에는 성평등이나 저출산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1조1991억 원)과 ‘자활근로 사업’(5087억 원)도 포함돼 있다. 

    고용노동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청년 취업 정책 및 사회적기업 육성도 전부 성인지 예산 항목에 있다. 고용노동부의 내년 성인지 예산은 총 2조8129억 원. 이 중 가장 큰 금액을 차지하는 것은 ‘사회보험 사각지대 해소’(1조1629억 원)다. 고용 형태에 따라 일부 노동자가 국민연금, 고용보험 등의 보장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있는데 이를 해결하겠다는 것. 일용직 아르바이트 근로자나 특수고용직이 주로 수혜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다음이 청년내일채움공제로,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청년에게 정부와 회사가 공동으로 목돈을 만들어주는 제도다.

    사라진 일자리 예산이 여기에

    직장을 찾는 청년들의 진로탐색부터 취업알선까지 도와주는 취업성공패키지에도 2447억 원 예산을 쓸 예정이다. 이외에도 ‘지역산업 맞춤형 일자리 창출 지원’(1791억 원), ‘사회적기업 육성’(1015억 원)에 배정했다. 중소벤처기업부도 중소기업기술혁신개발과 창업 지원 정책 등으로 총 9845억 원 예산을 신청했다. 행정안전부는 ‘지역주도형 청년 일자리 사업’과 ‘특수상황지역개발’에 4656억 원을, 국토교통부는 ‘도시재생사업’에 6840억 원을 성인지 예산으로 쓰겠다고 했다. 

    성인지 예산이라지만 사실상 복지 정책은 물론 창업 지원 정책, 성평등 관련 사업, 도시재생 등 다양한 예산이 잡탕처럼 섞여 있는 상황. 기획재정부 한 관계자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는 “성인지 예산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성 불평등 실태를 획인하자는 의미다. 각 정책이 성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다. 따라서 복지 정책이라 할지라도 이 정책이 성별 간 지원의 차이, 그에 따른 사회 현상들을 확인할 수 있다면 성인지 예산에 포함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용노동부의 청년 취업 관련 정책을 예로 들면서 “예산을 사용하는 부처가 청년 취업 관련 지원 사업이 성별에 따라 지원 규모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남녀 지원 규모를 조정해 성 불평등을 해소하겠다고 설명하면 취업 지원 예산도 성인지 예산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성인지 예산 관련
기준표.

    성인지 예산 관련 기준표.

    기획재정부의 설명은 사실일까. 10월 국회예산정책처가 발행한 ‘성인지 예산서 분석’을 보니 사실이었다. 여기에는 성인지 예산의 기준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 이에 따르면 여성 대상 혹은 성평등 제고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사업 외에도 사업수혜자를 성별로 구분 가능하거나, 사업체 대표 성별에 따라 수혜 기업을 구분할 수 있거나, 가구주 성별에 따라 가구를 구분할 수 있는 사업이 포함돼 있었다(사진 참조). 노인복지, 탈빈곤, 복지급여 제공도 성평등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성인지 예산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고용노동부에 확인한 결과 성인지 예산으로 분류된 청년 취업 지원 사업에서 여성 수혜자 비율이 과거에 비해 크게 높아졌다. 고용노동부 관계자에 따르면 취업성공패키지는 지난해 기준 수혜자의 60% 이상이 여성이었다. 제조업에서 먼저 시작한 청년내일채움공제도 2016년까지만 해도 여성 수혜자가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수혜자의 40%가 여성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기존에는 남성 수혜자의 비율이 높아 여성에게도 혜택을 확대하겠다는 내용 때문에 성인지 예산으로 분류된 것으로 안다. 그간 청년 지원 사업은 대부분 제조업, 중소기업 재직자에 집중돼 있었다. 이를 서비스업이나 일반 사무직까지 확대하는 방식으로 여성 수혜자의 비율을 높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성인지 예산의 기준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부처마다 천차만별이다. 정부 부처 관계자는 “(고용 정책 중) 회사나 단체에 지원금이 가면 일자리 정책, 사람에게 직접 지원금이 가면 성인지 정책으로 알고 있다”며 “사람에게 지원금을 주는 방식이라면 전부 성인지 예산”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부처 관계자들은 외려 “직간접적으로 양성평등, 혹은 여성의 권익 향상에 영향을 미쳐야 성인지 예산에 포함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성인지 예산과 그 기준에 대해 모호한 답변을 내놓는 곳도 있었다. 

    부처별 성인지 예산을 보면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중소벤처기업부,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가 상대적으로 많다. 다른 부처들은 이에 비해 현저히 적은 편으로 통일부(469억 원), 산업통상자원부(366억 원), 국방부(281억 원), 환경부(166억 원), 해양수산부(155억 원), 기획재정부(3억 원) 순으로 총 1440억 원의 성인지 예산을 신청했다. 법무부는 올해 성인지 예산이 1160억 원에 달했으나 내년 예산에서 610억 원으로 절반가량 줄였다. 정부 부처 관계자도 “사실 복지 및 지원 사업이라면 대부분 성인지 예산에 포함될 수 있다. 기준이 모호해 각 사업의 성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업을 어떻게 설명하는지가 예산을 결정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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