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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을 추모하며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을 추모하며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을 추모하며
서너 달에 한 번씩은 통화하던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의 휴대전화 전원이 꺼져 있었다. 불길한 마음에 재단 사무실로 연락했더니 역시나…. 서울 대형병원에서 “더는 손쓸 수가 없다”는 선고를 받고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기운이 완전히 소진해 대화도 겨우 나눌 정도라고 했다. 

11월 24일 일요일, 강원 원주 집에 들러 그의 남편 김지하 시인과 함께 병문안을 갔다. 병실은 차남의 장모가 지키고 있었다. 짧게 깎은 머리를 한 채 누워 있는 김 이사장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간병인은 “밤낮이 바뀌었다. 깨어 있으면 알아보실 텐데”라고 말했다. 말갛고 동그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생전의 소녀 같던 웃음소리와 따뜻한 목소리가 귓전에 쟁쟁했다. 혹여 방해될까 싶어 손도 잡지 않고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11월 25일 아침에 날아든 소천 소식. 이렇게 황망하게 가실 줄 알았다면 손이라도 잡아볼걸 하는 후회가 가슴을 친다. 

24일 병실에 들르기 전 원주 집에서 만난 김지하 시인은 극도의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지푸라기에 기대는 심정으로 마지막 민간요법 치료를 알아보고 있다. 다음 달 중순 꼭 퇴원해 집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그에게 김 이사장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늘 남편을 ‘김 시인’이라고 불렀던 고인은 김지하 시인의 가장 가까운 말벗이자 동지였다. 민주화 투쟁에 따른 극도의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고 시대의 아픔과 미래를 고민하는 올곧은 집념으로 ‘할 얘기는 어떤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한다’던 그의 단호한 용기 뒤에는 항상 응원하고 지지해준 김 이사장이 있었다. 

김 시인은 기자에게 “아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평생 행복하게 해준 적이 없다. 꼭 살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인은 김 시인을 정신적, 영적으로 가장 깊이 이해하고 받아주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주던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 1972년 유신 선포로 쫓기던 김 시인이 어머니(박경리 선생)의 집으로 찾아와 숨겨달라고 했을 때 ‘내가 가진 복을 이 사람에게 반만이라도 나눠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고인은 이듬해 4월 명동성당 반지하 묘역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김 시인과 결혼한다. 하지만 첫아이 출산을 앞두고 남편은 어디론가 끌려가 1년간 생사를 알 수 없었고, 이후 6년간 옥바라지가 시작됐다. 가족 모두 24시간 감시를 받았다. 출소 후에는 남편이 20년간 12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양육부터 집안 살림, 간호까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그 자신도 숱한 건강의 고비를 넘어야 했다. 

김 시인 역시 “아내는 나 때문에 끝없이 아파하고 괴로워했다. 내가 살해당할까, 모략과 음모의 희생물이 되지 않을까, 조직적으로 매장당하지 않을까, 혼자 걷다 테러당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걱정하는 동안 멍들고 병들고 속이 시커멓게 썩어버린 사람”이라고 했다. 그가 유례없이 조용하게 살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몇 년 전 차남 혼사를 치른 뒤에야 “겨우 숨 좀 돌리고 살 만하다”고 했다. 



2013년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김지하와 그의 시대’로 인연을 맺어 교류하게 된 고인은 그토록 힘든 삶을 살았으면서도 분노나 미움이 없었고 늘 주변을 챙기며 베푸는 사람이었다. 겉으로만 정의니 공정이니 진보를 외쳐대고 뒤로는 야합하면서 거짓을 일삼는 사람들만 도드라지는 요즘, 이념을 뛰어넘어 정의를 위해 바른 소리를 조리 있게 하면서도 비난하는 사람들까지 따뜻하게 껴안던 그의 삶이야말로 ‘포용’과 ‘통합’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평소 “힘들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던 그의 입에서 2년 반 전 암이 발병해 항암치료를 시작하면서 “힘들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 와중에도 토지문화관 일을 모두 챙겼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박경리문학제, ‘토지’ 일본어판 발간을 위해 해외 출장도 마다않고 동분서주했다. 생전에 글을 별로 남기지 않은 고인이 지난해 봄 한 문예지에 쓴 ‘아버지를 위한 진혼곡’은 결국 유작이 됐다. 6·25전쟁 때 아무 죄 없이 잡혀가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추억하며 쓴 글에는 어머니 박경리에 대한 그리움도 절절하게 담겨 있다. 

돌아가시기 전날 원주에 갔을 때 김 시인은 김 이사장의 방문을 열어 보여줬다. 정갈하고 깔끔한 주인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말대로 김 이사장이 훌훌 병마를 털고 일어나 다시 이 방으로 돌아오길 기도했지만 허사가 되고 말았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졸기(卒記) : 졸기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뜻하는 말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당대 주요 인물이 숨지면 졸기를 실었다.






주간동아 2019.11.29 1216호 (p80~80)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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