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05

2019.09.06

원포인트 시사 레슨

가부장제의 돌부리에 걸린 ‘제사의 민주화’

과거 제왕적 특권이던 제사는 왜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나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09-09 1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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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하면 차례를 떠올리는 것이 옛날 사람의 징표가 됐다. 추석 연휴 귀성객 행렬보다 해외여행객 행렬이 더 길어지면서다. 이 때문에 명절 때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는 종갓집 며느리들의 한숨만 더 깊어지고 있다. 제사 의무가 면제된 다른 친인척들이 여행을 떠난 사이 조상님 차례상을 꿋꿋이 지켜야 하는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집안 장손들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다. 

    이렇게 제사와 차례를 모시는 일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게 됐지만 과거엔 엄청난 권력의 상징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권력은 황제의 고유한 권력이었다. 귀족계급이 황제를 무력으로 보위했다면 사제계급은 그런 황제의 제사 수행을 보좌했다.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사제계급인 브라만이 귀족계급인 크샤트리아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듯이, 제국에서는 대부분 사제가 귀족보다 우위에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이런 사제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이 유가(儒家)로 불린 제의수행 집단이다. 이 유가집단의 성장은 제사 권한의 점진적 민주화와 연결돼 있다. 공자에서 시작돼 주자(주희)와 왕양명(왕수인)으로 이어진 유학의 확대는 곧 제사 지낼 권리의 확산과 맞물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나라에서 발원한 제사 전통

    고대 중국 상나라 때는 좌묘우궁(左廟右宮)이라고 해 도성 중앙에 종묘와 궁궐을 나란히 배치했다. 종묘는 상나라 사람들이 조상신을 모시던 사당으로 묘당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다 상나라의 제후국이던 주나라가 역성혁명을 일으키면서 이 묘당이 2개로 늘어났다. 

    하나는 상나라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요, 다른 하나는 주나라를 세운 희(姬)씨 씨족의 조상신인 사직을 모시는 사직단이다. 사(社)와 직(稷)은 본디 주나라의 시조에 해당하는 조상신이었는데, 후대에 각각 토지신과 곡식신으로 분화했고 춘추전국시대 이후에는 국토신이자 지신(地神)으로 일반화했다. 



    ‘주나라와 조선’의 저자 장인용 씨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주나라는 본디 상나라 서쪽 변방을 지키던 제후국이라 그 숫자가 적었기에 방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선 상나라인과 공동 통치가 불가피했습니다. 그래서 주무왕은 상나라와 최후 결전인 목야전투에서 승리하자마자 갑옷도 벗지 않고 상나라 종묘에 가서 먼저 자신들의 정당성을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닷새 뒤에야 자신들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수도 동쪽의 상나라 종묘에도 제사를 지내면서 자신들 고향에 가까운 서쪽에 자신들 조상신을 모시는 사직단을 세운 것입니다.” 

    이것이 궁궐을 가운데 두고 그 왼쪽(동쪽)에 종묘, 오른쪽(서쪽)에 사직단를 두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전통이 수립된 이유다. 그러니까 주나라 때만 해도 사직이 왕실의 조상신을 모시는 곳이고 종묘는 오히려 전대 왕실을 모시는 곳이었다가, 이후 왕조에서는 종묘가 개별 왕조의 조상신, 후직은 보편적 국토의 신으로 변모했으니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주나라의 모델을 그대로 들여온 조선도 서쪽에 사직단, 동쪽에 종묘를 뒀다. 그러니 사직단에 제사를 지낸 것은 결국 주나라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낸 셈이 되고 만다. 

    주나라는 종묘사직에 제례를 드리는 권한을 최고권력자에게 부여하는 원칙뿐 아니라, 가문의 법통이 적장자를 통해서만 이어지는 종법(宗法)제도도 확립했다. 인구가 적은 주나라 사람들이 방대한 상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왕의 형제와 조카들을 제후로 봉한 뒤 분할 통치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을 국가 전체에 적용하면 봉건제지만 가문에 국한해 보면 종법제가 된다. 종법은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으로 이뤄진다. 대종은 가문의 법통을 이어가는 적장자이고, 소종은 적장자 이외의 차남부터 그 아래 자식을 총칭한다. 곧 대종은 종갓집의 장남을 뜻하고 소종은 장남 외의 자식을 통칭한다. 

    주나라에서 왕은 대종으로 이어지고 같은 성씨의 제후(이를 공(公)이라고도 한다)는 소종이 된다. 제후국에서 제후(공)가 대종이라면 소종들은 그 아래서 다시 식읍을 나눠 통치하는 경과 대부가 된다. 종법제 하에서 대종에게 제사를 지낼 권한뿐 아니라, 그를 뒷받침할 경제적 재원이 유산의 형태로 가장 많이 주어졌다. 

    그런 소종의 반열에도 못 드는 사람들이 관직에 오를 경우 이를 사(士)라고 했다. 공자는 이 사계급 출신이었다. 공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유가집단은 이런 봉건제와 종법제는 물론, 예악(禮樂)으로 통칭되는 각종 의례에도 정통한 지식인 집단이었다. 의례라 하면 관혼상제를 말한다. 그중 가장 빈번하게 이뤄진 것이 마지막에 나오는 제사다. 하지만 사계급까지 내려오면 관혼상제 가운데 앞의 셋에 해당하는 성인식, 결혼식, 장례식은 치를 수 있었어도 제사권까지 주어졌는지는 의문이다.

    가부장제의 덫에 걸리다

    공자가 부모 삼년상을 그토록 역설한 이유도 제사권의 획득 때문은 아니었을까. 당시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삼년상을 치르는 것은 왕이나 제후의 경우에도 드물었다. ‘논어’를 읽어보면 제자들이 공자에게 가장 많이 반기를 든 것도 이 삼년상의 논리였다. 

    어쩌면 공자는 삼년상을 통해 공경대부 못지않은 도덕적 정당성을 사계급에 부여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3년간 각종 제사를 모시게 함으로써 부모 기일마다 제사를 모실 수 있는 특권까지 자연스럽게 쟁취했을 공산이 크다. 

    송나라 때 성리학자들은 이런 사계급을 대부보다 앞세운 사대부라는 표현을 창안해낸다. 성리학자를 대표하는 주희는 왕실의 특권이던 종묘를 사대부 가문별 사당으로 확산시켰다. 그뿐 아니라 관직 진출 여부와 상관없이 학덕 높은 사계급의 선비를 추모하는 사당을 짓고 철마다 제사를 지내는 서원(書院)을 발명해 사대부에게 제사 모실 권리뿐 아니라 제사 받을 권리까지 부여했다. 

    명나라 때 왕수인은 사대부 계층에 국한됐던 제사에 관한 이런 특권을 모든 계층으로 확산시켰다. 심지어 대종과 소종의 차이까지 없애버렸다. 길거리에 걸어다니는 사람이 모두 성인이라는 ‘만가성인(滿街聖人)’이라는 표현이 이를 압축한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명절 때면 조상에 대한 감사함을 표하던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이런 유구한 전통이 유교적 기제사 문화와 접목된 것이 오늘날의 차례다. 하지만 사대부의 나라임을 자임했던 조선에서 이 제사권의 확대는 주희 수준에서 머문 채 왕수인 수준까지 확대되지는 못한다. ‘주자가례’를 통해 조선에 이식된 종법제는 적장자에게 제사권뿐 아니라 그 물적 기반까지 한꺼번에 몰아주는 권위주의적 가부장제로 바뀌고 만다.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 초까지 제사는 맏아들만 지내는 게 아니었다. 아들, 딸 구별 없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셨고 이를 위해 유산도 공평히 배분됐다. 하지만 17세기 중엽이 되면서 양반가에서는 대부분 ‘장남 제사 독점권’으로 불릴 만한 종법제가 일반화했고 적서차별과 남녀차별이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됐다. 그 결과 제사를 모신다는 이유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을 주색잡기로 탕진하는 무능한 장남과 제삿날마다 그런 장남 집에 모여 억지로 화목한 웃음을 짓는 기이한 가족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오늘날에는 공자가 강조한 부모 삼년상을 치르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공자가 그 삼년상을 통해 획득하려 했던 보편적 인간다움의 희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마찬가지로 기원전 11세기 경 중국에 세워진 주나라의 문물제도에 기초한 제사문화를 원형 그대로 고집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평등하게 조상에 대한 감사함을 표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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