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03

2019.08.23

베이스볼 비키니

프리미어12, 왼손 사이드암 임현준을 뽑자!

국가대표팀이 변칙 투수를 사랑하는 이유

  •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kini@donga.com

    입력2019-08-2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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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KBO에서 유일한 왼손 
사이드암 투수인 삼성 라이온즈의 임현준. [동아DB]

    현재 KBO에서 유일한 왼손 사이드암 투수인 삼성 라이온즈의 임현준. [동아DB]

    “이 정도면 직업이 국가대표라고 할 수 있어요.” 

    제1회 세계야구소프트볼총연맹(WBSC) 프리미어12 B조 예선이 열린 2015년 11월 11일 대만 타오위안(桃園) 구장. 한국 대표팀이 몸을 푸는 동안 기자석에서 취재진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한국야구위원회(KBO)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직업이 국가대표였던 인물은 바로 ‘여왕벌’ 정대현(41·현 동의대 코치)이었습니다. 

    롯데 자이언츠 소속이던 정대현은 2014시즌이 끝난 뒤 팔꿈치 수술을 받았고 결국 다음 해 7월 28일이 돼서야 2015시즌 첫 1군 등판을 기록했습니다. 한국 나이로 서른여덟 살이던 투수가 팔꿈치에 칼을 댔다면 ‘한물갔다’는 평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 그러나 정대현은 그해 1군 무대 19경기에서 18과 3분의 1이닝을 평균 자책점 2.95로 막고 건재를 과시했습니다.

    왜 정대현이었나

    세계 최고 우완 언더핸드 투수로 불리던 정대현 동의대 코치. [동아DB]

    세계 최고 우완 언더핸드 투수로 불리던 정대현 동의대 코치. [동아DB]

    그리고 시즌이 끝난 뒤 프리미어12 대표팀에 합류하면서 개인 통산 아홉 번째 A대표팀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당시 정대현은 “사실 나는 구위가 떨어져 여기 오면 안 되는 선수”라면서도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부담을 느끼지 않으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리고 해야 하는 것에만 집중해서 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인식 당시 한국 대표팀 감독은 구위보다 경험을 믿었습니다. 김 감독은 대회를 앞두고 “한국시리즈에서 마무리를 맡아본 투수라 해도 국제대회 1~2점 차 경기에서 마무리로 올라갔을 때 느끼는 부담감과는 비교할 수 없다”며 정대현을 중용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한국 대표팀에 정대현이 꼭 필요한 순간이 찾아온 건 일본 도쿄돔에서 안방팀과 맞붙은 대회 준결승전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8회 말까지 일본에 0-3으로 끌려갔지만 9회 초 4점을 뽑으면서 4-3으로 경기를 뒤집었습니다. 김 감독은 망설임 없이 정대현을 마무리 투수로 투입했습니다. 

    정대현의 이 경기 첫 상대는 그해 홈런왕(38홈런)과 도루왕(34도루)을 모두 차지하면서 센트럴리그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야마다 데쓰토(山田哲人·27·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였습니다. 당시 일본 TV 중계진은 “정대현은 변칙적인 언더핸드 투수지만 이 타자(야마다)는 언더핸드를 크게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다”라고 말했으나 결과는 헛스윙 삼진. 이어 정대현은 일본 대표팀 4번 타자 쓰쓰고 요시토모(筒香嘉智·28·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를 1루수 앞 땅볼로 처리하면서 두 번째 아웃 카운트를 잡아냈습니다. 

    여기서 위기가 찾아옵니다. 5번 타자 나카타 쇼(中田翔·30·니혼햄 파이터스)에게 중전 안타를 허용한 것. 일본은 그해 퍼시픽리그 도루왕(34도루) 나카시마 다쿠야(中島卓也·28·니혼햄)를 대주자로 내보냈습니다. 그러자 한국 더그아웃에서 정대현을 마운드에서 내리고 이현승(36·두산 베어스)을 올려 그해 퍼시픽리그 홈런왕(37홈런) 나카무라 다케야(中村剛也·36·세이부 라이온스)를 상대하게 했습니다. 

    오른손 타자인 나카무라를 상대로 오른손 언더핸드 투수 정대현을 내리고 왼손 투수 이현승을 등판시킨 데 대해 선동열 당시 한국 대표팀 투수코치는 “허벅지 부상 중이던 타자보다 주자가 더 위협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언더핸드 투수는 투구 동작이 상대적으로 크기때문에 주자 견제에 애를 먹는 일이 많습니다. 정대현도 이미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야 하는 것에만 집중해서 하겠다”고 밝힌 상태라 아웃 카운트 하나를 남기고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현승이 나카무라를 3루수 뜬공으로 잡아내면서 한국은 일본을 꺾고 결승 진출에 성공으며, 결승전에서도 미국에 8-0 완승을 거두고 대회 초대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왼손 사이드암도 대표팀에!

    2019 WBSC 프리미어12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김경문 전 NC 다이노스 감독. [동아DB]

    2019 WBSC 프리미어12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김경문 전 NC 다이노스 감독. [동아DB]

    당시 대표팀에는 ‘맏형’ 정대현을 비롯해 심창민(26·상무 야구단), 우규민(34·삼성 라이온즈), 이태양(26·한화 이글스·당시 NC 다이노스) 등 ‘옆구리 투수’ 4명이 이름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전체 투수 엔트리가 13명이었으니 30% 넘는 투수가 ‘변칙’ 투구폼으로 공을 던졌던 겁니다. 

    송진우 당시 대표팀 코치(현 한화 이글스 퓨처스 투수코치)는 “사이드암 투수는 도미니카공화국, 쿠바 등 중남미 선수들에게는 생소한 유형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빠른 공으로 승부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미국전에서도) 사이드암 투수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결과도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4명은 총 12이닝을 던져 3점(2자책점)밖에 내주지 않았습니다. 

    KBO가 7월 23일 공개한 올해 대회 1차 예비 엔트리 90명의 명단을 살펴보면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 계속 ‘사이드암 우대’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명단에 오른 오른손 투수 30명 가운데 30%인 9명이 언더핸드 또는 사이드암 투수입니다. 

    반면 왼손 투수 13명 가운데는 사이드암 투수가 한 명도 없습니다. 이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현역 프로야구 선수 가운데 KBO에서 공식적으로 ‘좌완 사이드암’으로 분류하는 선수는 임현준(31·삼성) 한 명뿐입니다. 요컨대 저는 임현준이 대표팀에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송 코치의 이야기처럼 사이드암 투수는 기본적으로 ‘낯섦’을 무기로 삼는 유형. 그렇다면 왼손 사이드암처럼 낯설고 또 낯선 타입도 없습니다. 일본에서 201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때 왼손 사이드암 투수 모리후쿠 마사히코(森福允彦·33·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대표팀에 뽑은 이유도 이 생소함과 관계 있을 겁니다(평균 자책점 9.00으로 결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특히 이번 대회 상대팀을 보면 왼손 사이드암이라는 생소함이 더욱 빛을 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은 이번 대회 예선에서 캐나다, 쿠바, 호주와 만납니다. 캐나다는 올해 팬아메리칸경기대회에서 야수 엔트리 11명 중 6명을 왼손 타자로 채웠습니다. 임현준이 캐나다를 상대로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야 하는 것에만 집중해서’ 경기를 풀어줘도 대회 전체 투수 운용에 숨통을 틔울 수 있습니다. 이번 대회는 3개 조 상위 2개 팀이 ‘슈퍼 라운드’ 방식으로 결선을 치르기 때문에 조 1위를 차지하는 게 지난 대회보다 더 중요합니다.

    진짜 선발전은 이제 시작

    실제로 성적을 살펴봐도 이런 활용법이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임현준은 사이드암으로 변신한 2016년 이후 왼손 타자를 타율 0.178로 막았습니다. 예비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90명 가운데 이 기간 왼손 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이보다 낮은 건(0.173) 오른손 투수 하재훈(29·SK 와이번스) 한 명뿐입니다. 임현준은 같은 기간 외국인 타자를 타율 0.231로 묶었습니다. 이 3년 반 동안 외국인 타자 평균 타율은 0.297이었습니다. 

    원래 이번 대회 예비 엔트리는 9월 3일까지 45명을 뽑아 WBSC에 제출하면 됩니다. 그런데 KBO에서 서둘러 90명 명단을 발표한 건 넘치거나 부족한 자원은 없는지 공개적으로 검증받으려는 목적도 있을 겁니다. 그런 이유로 90명 명단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KBO에서 진짜 프리미어12 예비 엔트리를 발표할 때는 임현준이라는 세 글자를 보고 싶습니다. 그게 ‘디펜딩 챔피언’ 한국이 대회 2연패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경험 부족이 문제겠지만 기회를 주지 않으면 영원히 경험을 쌓을 수 없습니다. 혹시 압니까. 이번 대회를 발판으로 임현준도 직업이 국가대표인 선수가 될 수 있을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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