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5

2005.03.08

영조 때 ‘정희량 반란’두고두고 수난과 상처

소론과 군사 일으켜 여러 고을 접수 … 강동마을 정온 고택 말없이 증언

  • 글·사진=신정일/ 황토현문화연구소장 hwangtoh@paran.com

    입력2005-03-03 17: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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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 때 ‘정희량 반란’두고두고 수난과 상처

    빼어난 풍광으로 유명한 경남 함양군 화림동계곡.

    전북 장수군에서 백두대간의 줄기인 육십령을 넘으면 아름다운 남강 줄기로 소문난 경남 함양군 화림동계곡을 만난다. 오늘의 목적지 안의면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곳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계곡 초입에 우뚝 선 거연정(居然亭). 무지개다리인 화림교를 통해 드나들게 되어 있는 거연정 앞에는 “안의현 서쪽 화림동에는 새들(新平) 마을이 있는데, 임천(林川)이 그윽하고 깊으며, 산수가 맑고 아름다워 화림제 전공이 세상이 어지러울 때 이곳에 은거하였다”라고 쓰인 화림제전공유허비(花林齊全公遺墟碑)가 서 있다. 1613년 지어진 거연정의 모양새만 봐도 화림동에 대한 이 극찬이 넘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커다란 바위 위에 8각 주초석을 놓고, 네 모서리에 활주를 세워 안정감을 더한 이 정자는 뛰어난 조형미를 자랑하는 건축물이다.

    1815년 복권될 때까지 지역 사람들 벼슬길 못 나가

    거연정 바로 아래쪽에는 조선 전기 문신 정여창이 지었다는 군자정이 있고, 얼마쯤 더 내려가면 동호정이 보이며, 조금 더 아래편으로는 농월정이 있다. 이처럼 많은 정자가 한곳에 모여 있는 것만 봐도 이곳의 경관이 얼마나 빼어난지 눈치 챌 수 있다.

    특히 농월정은 조선 선조 때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낸 박명부가 정계에서 은퇴한 뒤 지은 정자로, 그 안에 서면 1000여평 너비로 펼쳐져 있는 너른 소나무 숲이 한눈에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2003년 가을 원인 모를 화재로 정자가 불타버려, 지금은 검게 그을린 기둥 두어 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천하의 일은 뜻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뜻이 지극해진 뒤에는 기가 따르게 마련이다”라고 했던 박명부의 기상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아쉬움을 안고 화림동계곡을 지나면 마침내 함양군 안의면에 이른다. 안의의 진산은 성산. ‘비단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은 이 고장의 시내 금천 변에는 조선 태종 12년(1412) 현감 전우가 지은 뒤 여러 차례 중건된 광풍루가 서 있다.

    사실 ‘안의’의 역사는 신라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안(利安)’이라 불리던 평범한 시골 마을이 역사의 중심에 등장한 때는 고려 의종 시절. ‘감음현’이라 불리던 당시, 이 지역 사람 ‘자화’가 현의 아전인 ‘인량’ 등과 함께 임금 등을 저주했다는 무고를 받으며 체포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자화는 산 채로 강에 내던져지는 형을 당했고, 현은 천민 거주지인 부곡으로 강등돼버렸다.

    영조 때 ‘정희량 반란’두고두고 수난과 상처

    안의를 둘러 흐르는 ‘비단내’금천,안의면 금천 변의 광풍루,‘강동마을’에 있는 정온의 고택.(왼쪽부터)

    조선 태종이 이곳에 관아를 두고 ‘안음현’의 중심지로 삼으면서 이 지역은 다시 장삼이사의 고을이 되었지만, 그 평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영조 34년이던 1728년, 이 지역 출신의 정희량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관군에 진압돼 참수되는 사건이 ‘또’ 벌어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연혁’편에는 “역적 정희량이 역모하여 혁폐하고, 현의 땅을 함양과 거창에 분속시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사건으로 안의는 이름조차 찾을 수 없는 땅이 돼버린 셈이다. ‘정희량 사건’의 여파는 상당히 커서, 1815년 이 지역이 복권될 때까지 안의뿐 아니라 경상도 사람들은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을 정도였다. 이것이 안의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정희량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이 지역은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의면’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부활했지만, 아직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정희량 시대의 수난과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희량은 조선 중기 학자인 동계 정온의 4대손. 그의 선조인 정온 역시 꼿꼿한 선비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정온은 광해군 시절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다 10여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했고,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에는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했는데도 ‘명나라를 배반하고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끝까지 전쟁을 주장했다. 인조가 끝내 청 태종에게 항복하기 위해 성에서 내려가자, 정온은 칼로 배를 찔러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정온의 아들이 창자를 배에 넣고 꿰맨 덕에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그는 이후 고향으로 돌아간 뒤 다시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죽은 안의 사람 산 함양 사람 열 당해낸다”

    그의 후손 정희량의 기세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정희량은 영조가 임금이 된 뒤 벼슬 등에서 차별받아 온 소론 일파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청주, 안음, 거창, 합천, 삼가 등 여러 고을을 ‘접수’하며 세를 떨쳤다. 하지만 거창에서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 체포돼 끝내 참수되고 만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안음현’ 조에는 “(이 지역 사람들은) 억세고 사나우며 다투고 싸움하기를 좋아한다”고 쓰여 있다. 함양군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금까지도 “안의 송장 하나가 함양 산 사람 열을 당한다”는 말이 전해진다고 한다. 부침이 심했던 안의의 역사가 바탕에 깔린 이야기일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안음현에 속했으나, 오늘날에는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로 행정구역이 바뀐 ‘강동마을’엔 정온의 고택이 남아 역사를 묵묵히 전해주고 있다. 여든 넘은 종부가 집을 지키고 있는데, 종부에 따르면 ‘정희량의 난’ 이후 정국에서 소외된 소론 집안들은 서로 혼사를 맺으며 가문의 맥을 이어나갔다. 현재 정온의 종부는 경주 최부잣집의 큰딸로, 그의 동생은 하회 유성룡 가문의 종부이며, 시고모는 전남 해남 윤선도 집안으로 시집갔다고 한다. 요즘 재벌가나 정·재계 고위 인사들의 얽히고설킨 혼맥과 다를 바 없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영조 때 ‘정희량 반란’두고두고 수난과 상처

    안의초등학교에 있는 박지원사적비.

    안의에 가면 중요민속자료 제207호로 지정된 ‘허삼둘 가옥’도 볼 만하다. 이 집은 1918년 윤대흥이라는 사람이 진양 갑부 허씨 문중에 장가든 뒤 아내 허삼둘과 함께 지은 집. 윤대흥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여주인 허삼둘의 이름을 붙인 것이 이채롭다. 집 안에 들어가 봐도 경제적 실권을 쥐고 있던 안주인의 의견이 상당 부분 반영된 내부 구조가 눈에 띈다.

    영조 때 ‘정희량 반란’두고두고 수난과 상처

    맑은 물과 조촐한 정자가 아름다운 수승대, 정온의 고택을 지키고 있는 해주 정씨 종부.

    허삼둘 가옥에서 50m쯤 골목길을 따라가면 조선시대 안의현청이 있던 안의초등학교도 둘러볼 수 있다. 조선 후기 북학파의 대표적 사상가이던 연암 박지원은 55세 되던 해 안의 현감으로 부임한 뒤 5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40여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그 덕에 안의초등학교에는 박지원의 사적비가 있다.



    ● 가볼 만한 곳

    조선시대 안음현에 속했던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는

    수승대(搜勝臺)가 있다. 맑은 물과 조촐한 정자, 큰 바위들이 어우러진

    수승대는 거창 사람들이 나들이 장소로 애용하는 곳으로

    갖가지 옛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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