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92

2021.06.04

‘환갑’에 ‘수술’받는 국정원 “환장하겠다”

“정치화된 국정원, 靑 실력자 눈치만”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21-06-10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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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설 60주년을 맞은 국가정보원이 6월 2일 공개한 새 엠블럼(우측 상단)과 국가정보원 청사. [사진 제공 · 국가정보원]

    창설 60주년을 맞은 국가정보원이 6월 2일 공개한 새 엠블럼(우측 상단)과 국가정보원 청사. [사진 제공 · 국가정보원]

    올해가 5·16 군사정변(1961) 60주년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이는 많지 않다. 만주군 군관 시절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살았고, 해방 직후엔 한국군 장교로 위장한 ‘남로당 영남 유격사령관’ 박정희. 이후 그의 삶은 대한민국으로 ‘전향’해 장성이 됐다 쿠데타로 집권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박정희는 기적 같은 산업화를 이루기 전 이념 문제부터 확실히 정리했다. 쿠데타 성공 한 달도 안 된 6월 10일 중앙정보부(중정)를 창설한 것.

    박정희의 중정, 신군부의 안기부

    그랬던 박정희가 1979년 10월 26일 중정 부장 김재규의 총을 맞고 서거했다. 그리고 중정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개칭됐으니, 중정을 만든 자가 중정과 함께 사라졌다고 할 수 있겠다. 김영삼에 이어 집권한 김대중은 안기부를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바꿨다. 안기부는 신군부 세력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그에 따라 이 조직의 비전도 춤을 췄다.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指向)한다’던 중정의 부훈(部訓)은 안기부까지 이어졌으나, 국정원이 되면서 ‘정보는 국력이다’로 변경됐다(1999, 김대중 정권). 그런데 마치 옛 정보통신부의 모토를 연상케 한다는 지적에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2008, 이명박 정권)을 거쳐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2016, 박근혜 정권)로 변신했다. 박지원 원장이 이끄는 현 국정원은 새 엠블럼을 공개한 데 이어 모토도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또 바꿨다.

    모토가 바뀐 것은 조직의 성격과 목적이 변했다는 뜻이다. 지난해 문재인 정부는 검찰과 함께 국정원을 크게 바꾸겠다며 ‘권력기관 개혁’을 밀어붙였다. 더불어민주당(민주당)이 절대다수인 국회에서 국정원 인사처장 출신 김병기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가정보원법 전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됐다. ‘환갑’을 맞은 국정원이 수술대에 누운 것. ‘검찰 수술’은 윤석열 덕분에 강한 저항을 일으켜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국정원은 음지에서 움직이는 속성과 대통령 직속기관이라는 구조 탓인지 ‘찍’ 소리도 못 하고 수술을 당했다.

    중정 때부터 청와대는 판공비 일부를 국정원 예산으로 편성해 사용했다. 국정원 예산은 대부분 용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특수활동비(특활비)라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윤석열이 참여한 특검(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팀은 박근혜 정권의 마지막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으로부터 국정원 특활비를 청와대로 보낸 사실을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국정원 특활비를 국정원장들이 자리 보전을 위해 상납한 뇌물로 보고 수사했다. 결국 국정원 직원 180여 명이 수사를 받아 20여 명이 구속되고 역대 국정원장 3명(남재준, 이병기, 이병호)은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대북(對北) 정보기관으로서 국정원은 북한에 침투하는 공작과 북한의 침투를 막는 대공(對共) 업무를 해왔다. 대공 업무를 진행하려면 수사관이나 에이전트(agent)를 북한과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조직에 침투시키는 와해공작, 고정간첩을 이용해 북한과의 접선 방법을 파악하고 북한 간첩의 침투를 유인하는 고첩공작, 대북공작 파트로부터 얻은 정보와 비공개 탈북자로부터 구한 정보 등을 융합해 북한을 분석하는 수집공작 등을 해야 한다. 경찰청 산하 국가수사본부(국수본) 안보수사국(옛 경찰청 보안국)과 국군 군사안보지원사령부(옛 국군기무사령부)도 비슷한 일을 하지만 국정원의 역량이 독보적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청원, 찬반 양론 격돌

    현 여권은 국정원이 대공 업무를 빌미로 국내 정치에 개입한다고 판단해 ‘김병기 법안’으로 이를 도려낼 수 있게 했다. 2년 뒤 국정원은 대공 업무를 국수본 안보수사국으로 이전해 국정원 대공 파트는 개점휴업 상태가 됐다. 5월 국정원 대공 파트가 충북 청주지역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압수수색한 것은 ‘놀고먹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노력이라는 해석이 많다. 그러나 국정원 대공 파트는 더 큰 도전에 직면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등 진보 성향 단체가 결성한 ‘국가보안법폐지국민행동’이 ‘국가보안법 폐지’ 국회입법 청원을 조기에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청원에 국민 10만 명 이상이 30일 내로 동의하면 국회는 소관 위원회에 심사를 하게 한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행동의 청원은 열흘 만에 10만 명의 동의를 얻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 단체는 국회의원 전원에게 ‘국가보안법 폐지 특별법’ 공동 발의에 동참하라는 서신도 보냈다. 국정원 활동을 지지하는 세력은 뒤늦게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청원'을 냈는데, 이 것 역시 6월9일부로 10만 동의를 넘겼다. 국가보안법 철폐는 국정원법 개정에 이어 좌우 세력의 대결장이 된 것이다.

    정의당 강은미 의원과 민주당 민형배 의원 등은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을 발의해놓았다. 국가보안법 폐지 청원은 해당 법안과 맞물려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거나 대폭 개정되면 국정원 업무를 이관 받은 국수본 안보수사국도 활동 근거를 상당 부분 잃게 된다. 간첩 사건은 형법 등을 근거로 국수본 안보수사국이 해야 하니, 안보수사국은 해체되거나 수사국 내 과(課)로 축소될지도 모른다. 국가정보원이 위축된 지금 국가보안법마저 폐지되면 한국의 안보 지형은 크게 바뀔 수 있다. 보안법 폐지 반대 청원도 10만을 넘겼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심각한 내전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한 내전의 한 가운데에 박지원의 국가정보원이 있으니, 정체성을 찾기 어려워진다.

    미국은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 이스라엘은 모사드와 신베트, 영국은 MI-6와 MI-5, 독일은 연방정보원과 연방헌법수호청으로 해외·국내 정보기관을 각각 나눠 운영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정보기관 개혁 방안은 한마디로 국정원을 대북 및 해외 정보 수집 업무 중심의 정보기관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국내 정보 업무는 경찰청 산하 국수본 안보수사국이 맡는 방식이다. 그러나 미국 등 상당수 국가는 국내 정보기관을 경찰과 별개로 운영하고 있다. 일본만 예외적으로 경찰이 국내 정보기관 역할을 한다.

    현재 국정원은 국외 정보기관으로 변신하고 있을까. 서훈 원장 시절 국정원은 남북회담에 전력했으니 대북공작은 사실상 개점휴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소식통은 “그때(서훈 원장 재임 시절)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다. 비밀 공작팀들이 가동한다”면서도 “그렇게 하는 목적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북한 정권의 와해가 아닌, 우리와 대화하지 않는 김정은과 소통하기 위해 국외공작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공작은 ‘두더지(mole)’라고 하는 고첩(고정간첩)을 심는 것으로 시작된다. 두더지 공작이 재개됐으니 그래도 실력은 유지할 것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대북공작을 하려면 CIA 등 미국 기관과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과도 협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원장이 비밀리에 움직여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한 직후인 5월 26일 박지원 국정원장이 미국을 방문해 CIA 국장 등을 만나고 6월 1일 귀국했다. 비밀이어야 할 것 같은 박 원장의 동선이 노출된 것은 그가 김유정 전 의원의 페이스북 계정에 “어제 DC도 오늘 NY도 비가 5도다(어제의 워싱턴DC와 오늘의 뉴욕도 비가 온다)”라는 댓글을 달았기 때문이다. 정치인 출신인 박 원장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자신의 행적을 노출했다.

    5월 26일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출국하고 있다. 박원장은 방미 중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자신의 동선을 노출해 논란을 빚었다.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5월 26일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출국하고 있다. 박원장은 방미 중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자신의 동선을 노출해 논란을 빚었다.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정치가 지배하는 국정원

    국정원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 아무리 국정원장이 믿을 만해도 청와대는 방심하지 않는다. 비밀리에 원장 등 간부진의 움직임을 살피는 이들을 투입한다. 이러한 ‘빨대’는 인사를 통해 국정원에 들어간다. 특정 인사를 요직에 앉히도록 청와대가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잦으면 지휘관(국정원장)이 아니라 민정수석 등 청와대 실력자에게 충성하는 요원이 늘어난다. 대북공작처럼 원장마저 몰라야 할 업무까지 청와대에 알려지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청와대와) 연이 없는 이들은 가만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청와대를 바라본다. 실력 있는 요원들이 그런 행보를 보이면 원장도 요원들을 장악해 국정원 고유의 일을 하기보다 청와대가 바라는 정치적 행동을 우선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 이것만큼 국가 정보기관을 오염시키는 일도 없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국정원이 코로나19 백신 도입에 그 나름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정권의 이익과 국익에 모두 도움이 되니 한 것인데, 국정원이 국익에만 도움이 되는 일도 그렇게 해내고 있는지 의문이다. 더구나 지금 원장은 닳고 닳은 정치인 출신이다. 국정원은 너무 정치화됐다”고 평가했다.

    윤석열 전 총장은 재임 시절 외풍으로부터 검찰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법 출국금지 사건’으로 검찰과거사위원회가 된서리를 맞았기에 문재인 정권의 ‘검찰개혁’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었다. 국정원은 외풍을 막을 만한 원장이 없었다. 결국 해체 수준의 개혁을 당했다. 엠블럼과 모토만 거듭 바꾸며 ‘선한 양’ 같은 존재로 변모하고 있다. 국정원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는 한 국정원 예비역은 “(국정원) 환갑을 맞아 환장할 지경이다. 국정원은 다른 방면으로 너무 정치화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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