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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끝판,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와 르완다 내전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혐오의 끝판,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와 르완다 내전

  • (7) 한건수 강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한건수 교수.

한건수 교수.

인류 역사에서 인종주의가 만든 혐오는 커다란 비극을 만들어냅니다. 오늘 말씀드릴 사례는 아프리카 두 나라에서 벌어진 인종주의와 민족학살에 관한 것입니다.

●정의의 회복이 무엇인지 보여준 남아공

아프리카 대륙에는 흑인들만 살고 있었던 게 아니죠. 식민지배 과정에서 백인들도 정착했고, 유럽의 제국이 식민통치에 필요한 인력을 확충하면서 아시아인 특히 많은 인도인들이 관리나 상인으로 대거 진출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처음 도착한 유럽인은 네덜란드계 이주민들이었습니다. 네덜란드계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국가도 만들고 언어를 비롯한 문화체계를 만들어 냅니다, 아프리카너스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죠. 영국이 이 지역의 네덜란드 이민자를 통합하고 식민화하면서 소수 백인들이 절대 다수인 흑인들을 통치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정권은 백인의 지배권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정책을 도입합니다. 겉으로는 서로 다른 인종이 각자 살면서 서로의 문화를 보존하자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극심한 인종차별이었습니다. 

살기 좋은 땅은 모두 백인들이 차지하고 백인들 거주지에서 흑인들을 몰아냈으니까요. 그러면서 백인 정권은 지배체제에 저항했던 흑인 지도자들을 암살하거나 투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저항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입니다. 그는 백인 정권에 대항하다 27년간 감옥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석방되어 1994년 직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넬슨 만델라는 대통령에 집권한 후 백인들에 대한 복수나 보복이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 구성원들이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가자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가 ‘진실과 화해 위원회’입니다. 1996년부터 위원회를 구성하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흑인 인권운동가였던 투투(Desmond Tutu) 주교를 위원장으로 임명합니다. 투투 주교는 위원회가 추구해야할 기본 원칙을 선언하면서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개념을 말합니다. 소수인 백인은 다수인 흑인이 집권하면 자신들은 복수의 대상이 될 거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데 집중했고 이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회복적 정의에 둔 것입니다. 인종차별 과정에서 사라진 정의는 공동체가 회복될 수 있는 정의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들 세상을 만드는 것으로는 공동체를 복원할 수 없다고 본 거죠.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세 가지 핵심 단계를 거칩니다. 첫째, 고백입니다. 과거 백인정권의 앞잡이로서 흑인들을 탄압했던 비밀정보원이나 인권탄압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저질렀던 수많은 범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형사 처벌을 면제해 준 것이죠. 처벌보다는 역사적 진실규명이 더 중요하다고 본 겁니다. 그리고 진실을 고백한 사람을 처벌하지 않고 용서했습니다. 이게 두 번째 단계였습니다. 세 번째는 배상이었습니다. 가해자들이 최대한 자기 힘으로 피해자에게 배상하도록 한 거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시도는 전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캐나다는 과거 백인들이 정착하면서 원주민들에게 저질렀던 죄악을 규명하는 위원회를 운영했고 우리도 광주 민주화항쟁 이후에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남아공이 보여주었던 고백과 용서와 배상으로 이루어지는 위원회의 성과를 성취하지 못 한 것 같습니다.

●비극적인 학살을 통합의 계기로 만든 르완다

두 번째 사례는 르완다라고 하는 동아프리카 작은 국가에 살고 있는 두 민족 투치(Tutsi)와 후투(Hutu)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두 민족은 오랫동안 함께 섞여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외모상 차이도 있었습니다. 신체적으로 투치족이 좀 더 크고 피부색이 연하며 조금 더 마른 체형입니다. 반면에 후투족은 전형적인 흑인 모습입니다. 생계 양식에 있어서도 투치는 주로 목축을 했고 후투는 농사를 지었습니다. 

두 민족은 별도의 구별된 집단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로 서로 교류하며 살다가 15세기 이후에 단일 왕국을 만듭니다. 왕국은 초기부터 투치족이 통치 세력을 차지합니다. 그러다 18세기 이후 유럽의 식민지체제로 편입됩니다. 

1884년 베를린에서는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를 분할하여 통치하는 굉장히 중요한 회의가 열리는데 1885년 연초까지 이어진 이 회의에서 르완다는 독일 지배를 받게 됩니다. 

독일은 처음에는 르완다의 제도를 그대로 존속시키며 통치했지만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자 벨기에가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벨기에 식민정부는 투치와 후투로 나뉘어 살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집단정체성을 부여하기 시작합니다. 투치족을 다른 아프리카인들보다 조금 더 우수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에티오피아에서 넘어온 유럽인들이 과거에 믿었던 성경에 나오는 함족의 후손이라는 말까지 합니다. 

1920년부터 벨기에는 후투와 투치 족에게 신분증을 발급해 투치인지 후투인지를 명기하게 하는 소위 서구식 민족개념을 부여합니다. 그 결과 소수의 투치 대 다수의 후투라고 하는 민족 집단이 공식적으로 등장하고 두 집단 모두 이러한 정체성을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벨기에 정부는 더 나아가 이 두 집단을 자신들의 편리대로 통치에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벨기에는 초기에 투치 중심 통치를 해 나가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독립을 향한 아프리카인들 요구가 늘어나자 갑자기 다수인 후투족 편을 들기 시작합니다. 식민통치의 긴 역사 속에서 두 집단의 집단정체성을 강화시켜 분리시키고 필요에 따라 두 집단을 통치에 교대로 활용했던 것입니다. 결국은 후투와 투치 간에 원한과 경쟁심이 커져 갑니다. 

이 과정에서 투치족 상당수가 르완다를 떠났습니다. 1960년대 이후에 1990년대까지 30여 년간 상당수 투치인들은 인접국가에서 난민으로 생활했습니다. 많은 젊은 세대들은 르완다를 가보지도 못 한 상태에서 난민 캠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후투족들은 이들이 돌아오는 것을 막고 오로지 르완다를 자신들만의 국가로 발전시키려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접한 아프리카 국가나 유럽의 구 식민지배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연결됩니다. 프랑스는 후투족을 지지했고 우간다를 비롯한 인접국은 투치족을 지원했습니다. 급기야 르완다는 미국, 프랑스를 비롯한 선진국과 이웃하고 있는 아프리카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1994년 비극적인 사건이 시작됩니다. 

르완다와 인접국의 분쟁을 종식하고 평화협정을 추진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동참했던 르완다와 부룬디의 두 정상이 암살된 것입니다. 두 정상은 평화협정 회의를 마치고 함께 전용기로 귀국하다가 키갈리 공항 인근에서 미사일 공격을 받고 사망합니다. 

이 사건의 배후에 투치족이 있다는 후투족 정치인의 선동은 르완다 정세를 혼란에 빠트립니다. 흥분한 후투족은 100일 동안 투치족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80만 명을 학살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이 학살된 사건입니다. 학살 과정은 너무나 끔찍하고 비극적이었습니다. 함께 살던 이웃 후투족이 갑자기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 투치족 이웃을 죽였고, 학살을 피해 교회와 성당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추적해서 공격했습니다. 성당과 교회에서도 민족정체성에 따라 보호받지 못한 투치족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비극 앞에서 국제사회는 개입을 주저했습니다. 르완다에는 유전도 없고 소위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칠 만한 위협 요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국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국제사회의 냉정함과 무책임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투치족에 대한 대학살은 인접 국가에 피신해 있던 투치족 무장 세력 특히 르완다애국전선이 르완다로 진격하여 수도 키갈리를 점령하면서 멈춥니다. 투치족 무장세력에 의해 점령된 르완다는 이제 거꾸로 후투족들의 대량 피란으로 이어집니다. 투치족을 학살한 후투족이 보복을 피해 도망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다른 대 학살이 진행될 위기에서 투치족 무장세력은 정부를 장악한 이후 후투족에 대한 집단 보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해결책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취했던 정책을 이어받습니다. 학살에 책임이 있는 주요 범죄인들은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Rwanda)에서 심판을 받았지만, 르완다 국내의 수많은 관련자들은 르완다의 전통 관습 법정(가차차 법정)에 회부되었습니다. 관습 법정은 사안과 규모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되었는데, 마을 단위에서의 관습 법정은 지역의 원로가 재판을 주재했습니다. 재판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가해자 처벌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아공에서와 마찬가지로 법정에서 가해자에게 요구했던 것은 단 하나. 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백하면 형사 처벌하지 않는 대신 피해자에게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상을 하라고 판결합니다. 농사를 돕거나 자기가 키운 가축 일부를 나누는 겁니다. 마을 단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살아가는 노력을 하자는 것이 르완다가 선택한 해결 방법이었습니다. 

이제 르완다에서는 더 이상 후투와 투치를 구별하지 않으려 합니다. 모두가 ‘르완다인’이라는 국민정체성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학살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한 다양한 노력도 하고 있습니가.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으려는 다양한 노력이 추모관, 기념관, 박물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후 르완다는 경제성장 면에서도 오늘날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정보통신기술을 가장 강력하게 도입한 국가가 됐고 국가 공무원이나 정부의 부패 문제를 가장 열심히 해결한 국가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정부 청렴도가 4위에 해당한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학살 이후에 르완다 여성들의 정치 참여 비중이 굉장히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2010년대 총선에서 당선된 여성 의원 비중이 전체 의원의 60% 이상을 차지합니다. 

이는 학살로 인해 남성 인구가 급감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학살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등 여성들이 치욕을 당했기 때문에 여성권리 신장을 위한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르완다는 비극적인 학살을 통해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싸매고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집단정체성의 긍정성

오늘 저는 집단정체성이라고 하는 것과 그 집단정체성이 만들어낸 혐오의 문제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과 르완다의 민족학살을 사례로 설명드렸습니다. 

집단정체성은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함으로써,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 열정을 갖게 합니다. 이러한 소속감과 열정은 인류 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정이 반대로 상대를 혐오하고 차별하고 탄압하고 심지어 학살하기까지 합니다.

집단정체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하고 활용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지속적으로 던져야 될 질문입니다. 그에 대한 명확한 성찰이 없으면 우리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대상화하고 차별하고 탄압하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민족이라는 정체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족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절대적이고 고유하고 본질적이고 변화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사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민족을 학살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집단정체성이 인류 역사와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유지하고 발전시키고 새로운 환경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 때입니다. 감사합니다.





주간동아 1260호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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