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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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깨십시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견디고 참고 기다리라’ 정신으로 대중과 호흡하며 정진

  • 유철주 불교 전문 자유기고가 jayu@buddhism.or.kr

    입력2010-09-06 14: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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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깨십시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통영 연화도에서 고산 스님.

    초하루법회(음력 6월 1일)가 열린 부산 혜원정사 대웅전. 조실(祖室) 고산혜원(山慧元) 대종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고는 이내 불자들을 위한 축원(祝願)을 시작했다. 스님은 이후에도 법상(法床)에 오르기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고 불자들과 함께 기도를 올렸다.

    사찰의 조실 스님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기도하는 것이 낯설다. 사실 원로 스님은 대부분 법회에서 법문만 한다. 그러나 고산 스님은 달랐다. 불자들은 “고산 스님의 ‘힘’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고 귀띔했다. 고산 스님은 1990년대 후반 총무원장을 역임하면서도 새벽예불과 108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법회가 끝나고 스님은 대중과 사찰 공양실에서 공양을 같이 하고 주석처인 방장실에서 글을 보고 있었다. 잠시 시간을 내달라는 청을 드리니 “들어와 차나 한잔 하라”며 방문을 열어주셨다.

    ▼ 법회를 직접 주관하시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대중과 늘 함께하려 합니다. 새벽에 도량석(道場釋)을 하는 동안 108배를 하고 참선을 합니다. 새벽예불이 끝나면 법당을 돌면서 참배하고, ‘원각경’과 ‘관세음보살 보문품’ 등을 읽습니다. 또 시간이 되면 참선을 하고 맨손체조도 합니다. 아침공양 후 틈틈이 텃밭과 화단을 가꾸고 책을 봅니다. 오후 일정도 비슷합니다. 하루가 금방 지나가 바쁘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습니다.”

    고산 스님은 매달 음력 초하루는 부산 혜원정사, 음력 8일은 부천 석왕사, 음력 15일은 하동 쌍계사, 음력 24일 관음재일은 통영 연화사에서 대중과 함께 기도한다. 모두 스님이 조실로서 후학과 불자들을 제접(提接)하는 도량이다. 이렇게 한 달 내내 일주일씩 4개 사찰을 순회한다. 한결같다는 얘기를 듣지 않을 수 없다.



    ▼ 출가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광복 1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제 나이 12세였습니다. 어머니가 그리워 참을 수 없었습니다. ‘명심보감’을 보면 눈물이 안 나올 거라는 어른들의 말씀에 책을 봤지만, 자꾸 어머니 생각이 나 눈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양산 통도사로 갔습니다. 구하 스님은 더 크면 오라고 하셨습니다. 며칠 뒤 아버지가 저를 부산 범어사 동산 스님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동산 스님은 ‘왜 이제 왔느냐’며 맞아주셨어요. 동산 스님에게 ‘스님 제자가 되면 우리 엄마와 만나게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스님은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셨어요. 범어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는데 먼저 출가한 행자들이 밥도 못하고 불도 잘 못 지핀다고 구박해서 6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갔더니 아버지가 왜 왔느냐고 호통치셨어요.”

    “꿈을 깨십시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범어사 도감을 볼 때의 사진. 맨 앞이 동산 스님이고 세 번째 줄 맨 오른쪽이 고산 스님.

    은사 동산 스님 가르침 가슴에 새겨

    다시 두 형이 있는 부산으로 가서 형들이 일하던 양복점을 시작으로 시계점, 서점 등에서 일했다. 어느 날 형수가 사주를 봤더니 기술자나 스님이 될 사주인데 특히 스님이 되면 많은 제자를 가르치며 살 거라고 했단다. 고민 끝에 범어사에서 정식으로 출가했다. 1945년의 일이다.

    ▼ 행자생활이 많이 힘드셨지요.

    “13세에 출가해 3년간 행자생활을 하면서 매일 대중예불이 시작되기 전 법당에 가서 108배를 했는데 일 배 일 배마다 어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원했습니다. 1948년에 사미계를 받고 얼마 뒤 부산 기장 해불암으로 갔습니다. 농사지으며 틈틈이 정진했는데 나중에는 ‘요리사’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공양주 소임을 잘 살았습니다. 밥을 지을 때 첫째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고, 둘째는 대중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고, 셋째는 나의 심신을 단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밥도 잘됐습니다. 그 후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고 본격적으로 참선과 경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꿈을 깨십시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1 시간이 날 때마다 텃밭을 가꾸는 고산 스님. 2 1977년 석암 스님(가운데)과 함께.

    스님은 동산 스님에게 매일 ‘선요(禪要)’를 배워가며 참선했다. 동안거에는 하루 12시간씩 정진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때부터 스님은 새벽예불, 도량청소, 오전정진, 사시마지(巳時麻旨), 오후정진, 저녁예불, 저녁정진, 취침의 순서로 어김없는 규칙생활을 이어갔다.

    ▼ 은사인 동산 스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모범적인 대중생활을 하신 분입니다. 도량석을 하기 전에 먼저 일어나서 모든 전각을 돌며 참배했고 마지막에 대웅전에 와 대중과 함께 새벽예불을 하셨습니다. 아침 공양을 하고는 가장 먼저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청소했지요. 또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선방에 가서 정진하셨습니다. 일과를 꾸준히 하다 보니 누구든 스님의 모습을 보고 배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산 스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감인대(堪忍待·견디고 참고 기다리라)’의 정신으로 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직도 저는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 고봉 스님에게 전강(傳講·제자로 인정함)도 받으셨습니다.

    “범어사에 있을 때 고봉 스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스님께 상을 차려 공양을 올렸는데 스님이 공양 차린 사람이 누구냐고 묻더군요. 제가 올렸다고 했더니 ‘알겠다’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저를 잘 보셨나 봅니다. 하루는 고봉 스님이 스님의 맏상좌인 우룡 스님과 저를 불러 ‘둘은 경(經)을 보라’고 하셔서 ‘능엄경’ 공부부터 했습니다. 그 뒤 합천 해인사, 김천 청암사, 부산 범어사, 울산 태화사 등에서 고봉 스님을 모시고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15년을 공부하고 직지사에서 전강을 받았습니다. 그때 고봉 스님으로부터 고산이라는 법호를 받아서 지금도 혜원이라는 법명보다 고산이라는 법호를 쓰는 것입니다.”

    고봉 스님은 선(禪)과 교(敎)에 두루 능했던 선지식이다. 당대의 대선사(大禪師)인 전강 스님과 선문답(禪問答)을 자유롭게 주고받았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막힘이 없었다고 고산 스님은 회고했다. 고산 스님은 또 석암 스님으로부터 전계(傳戒)를 받았다. 동산 스님과 고봉 스님, 석암 스님을 한꺼번에 스승으로 모신 것은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선, 교, 율(律) 각 분야에서 최고의 선지식이었기에 고산 스님은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 종단의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으로서 후학들에게 계를 내려주는 막중한 소임을 맡고 계십니다. 수행자들에게 계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수행자가 계를 청정하게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집 지을 때 하는 기초공사가 수행자에게는 바로 계입니다. 또 옛 어른 스님들은 그릇을 바로 놓아야 물이 많이 담긴다고 하셨습니다. 계가 수행의 바탕이라는 말씀이지요. 이와 함께 그릇에 담긴 물은 흔들리지도 않아야 합니다. 바로 놓인 그릇에 지혜의 달이 크게 비칠 것입니다. 그래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은 늘 같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전계대화상은 계를 전하는 종단 최고의 계사(戒師)로 계단(戒壇·수계식을 위해 쌓은 단)의 설치와 운영, 수계식 등을 관장하며 원로회의의 추천을 받아 종정 스님이 위촉한다. 스님은 2008년 10월부터 조계종 전계대화상을 맡고 있다.

    “꿈을 깨십시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법회에서 불자들을 위해 축원을 하는 고산 스님.

    ▼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꿈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탐진치’ 속에 사는 것은 잠꼬대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한심하고 슬픈 일입니까? 꿈을 깨야 합니다. 꿈을 깨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고 깨달음입니다. 수행자가 해야 할 일 역시 중생이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날 때 지금 각자 서 있는 자리가 깨달음의 자리입니다. 우리 수행자들은 특히 자신의 깨달음과 함께 남을 위해 사는 삶이 중요합니다.”

    ▼ 어떤 화두로 공부를 하셨나요? 정진 중에 경계를 체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동산 스님께서 주신 ‘이뭣고?’ 화두로 공부했습니다. 자나 깨나 ‘이뭣고?’였는데 김천 청암사에서 어느 날 경계가 느껴졌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데, 모든 세상이 보였습니다. 절에 오고 있는 신도들도 보였습니다. 고봉 스님과 경봉 스님께 여쭈었더니 더 공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3개월 뒤 다시 두 분께 말씀드리고 인가(印可)를 받았습니다.”

    1966년 음력 4월 20일 새벽예불이 끝나고 고산 스님은 한 시간 동안 관음정근(觀音精勤)을 하고 이산 혜연선사의 발원문을 읽은 다음 청암사 보광전 법당에서 참선에 들었다가 경계를 느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스님이 설명한 대로 다시 정진을 시작했다. 3개월 뒤 마침내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심행일장몽 식심즉시교 몽교일여중 심광조대천(心行一場夢 息心卽是覺 夢覺一如中 心光照大千)’, 즉 ‘마음 작용은 한바탕 꿈이요, 한 마음 쉰 것이 곧 잠깬 것이라. 꿈과 잠깸이 한결같은 가운데 마음 광명이 대천세계에 비추도다’였으니 앞서 말한 대로 스님은 꿈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1966년 음력 7월 10일이었다. 스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봉 스님에게 게송을 말씀드리고 ‘이 우주에 오직 나 하나뿐’이라고 했다. 고봉 스님은 “이제 됐다”고 했다. 고산 스님은 경봉 스님에게도 갔다. 경봉 스님 역시 인가해주었다.

    그 후 스님은 1977년 하동 쌍계사에서 정진할 때도 ‘산하대지비로체 초목함영석가행 일월성숙제불안 쌍계유수고산심(山河大地毘盧體 草木含靈釋迦行 日月星宿諸佛眼 雙磎流水山心)’, 즉 ‘산하대지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몸이요, 초목과 준동함영은 석가 부처님의 작용이로다. 일월성숙이 모든 부처님의 눈이요, 쌍계에 흐르는 물은 고산의 마음이로다’는 게송을 읊기도 했다.

    부처님 광명 통해 직접 계를 받는 ‘서상수계’

    ▼ 같이 공부하신 스님 중 기억에 남는 분은….

    “30여 명의 도반이 지금은 거의 다 떠나, 우룡 스님과 보성 스님(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등 몇 명 남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구수한 입담을 가진 대흥사 조실 천운 스님마저 떠났습니다. 우룡 스님은 함께 경책을 하며 어려울 때 항상 옆에서 저를 부축해주고 위로해준 사람입니다. 보성 스님도 해외 성지순례는 물론 국내 여러 사찰에서 함께 공부했습니다. 먼저 입적하신 해인사 일타 스님과도 밤새 토론을 했습니다. 모두 제 공부에 도움을 준 소중한 인연입니다.”

    스님은 특히 보성 스님과 정진하며 부처님 광명을 통해 직접 계를 받는 서상수계(瑞祥受戒)를 하기도 했다. 고산 스님은 보성 스님과 같이 쌍계사 대웅전에서 7일 용맹기도를 시작한 후 5일째 되던 날인 1988년 음력 7월 21일 오후 3시에 삼존불(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미륵보살) 아래 금자(金字) 사구게가 허공에 나타나는 체험을 했다. 사구게는 ‘심직명지계 심곡명훼범 직심근수행 이리구원성(心直名持戒 心曲名毁犯 直心勤修行 二利俱圓成)’, 즉 ‘마음이 곧으면 계를 가짐이요, 마음이 굽으면 계를 범함이라. 곧은 마음으로 부지런히 수행하면 자리와 이타를 원만히 이루리라’는 말이었다.

    ▼ 불자와 국민이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다섯 가지 욕심이 있습니다. 첫째는 재물에 대한 욕심, 둘째는 색욕(色慾), 셋째 식욕(食慾), 넷째 명예욕(名譽慾), 다섯째 수욕(睡慾)입니다. 이 다섯 가지 욕심만 없다면 반대적인 모든 나쁜 일은 다 없어지고 고생이 되더라도 부지런히 배우고 노력하면 다 행복하게 살고 반드시 성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조건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부처님께서 나의 미몽을 깨우쳐주시니 감사함이요, 부모님이 나를 낳아 키워주시니 감사함입니다. 둘째는 미소를 짓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달프고 괴롭고 슬픈 일이 있더라도 항상 미소를 짓고 밝은 얼굴로 남을 대하고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座臥語默動靜)에 웃는 얼굴로 모든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침묵입니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보아도 못 본 척, 늘 침묵하고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듯 행복하려면 감사의 마음과 미소, 침묵 세 가지를 꼭 지켜야 할 것입니다.”

    시종일관 꼿꼿한 모습으로 그렇게 스님은 당신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막힘이나 걸림도 없었다. 말씀이 끝나고 스님은 다시 밀짚모자와 장갑을 찾았다. 방장실 앞 텃밭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스님은 글을 하나 보여주었다. ‘물위걸용지인 능위서타지인(勿爲乞容之人 能爲恕他之人)’, 즉 ‘남에게 용서를 구걸하지 말고 남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고산 스님이 제자들에게 자주 당부하는 말씀이라고 했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당당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스님은 다시 강조했다. 그러고는 문을 열고 고무신을 신었다. 이렇게 스님은 또 길을 나서고 있었다.

    긴 여운 남긴 1년간의 총무원장

    종교 화합에 앞장…매일 아침 예불과 108배 실천


    “꿈을 깨십시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고산 스님은 1998년 12월부터 1년여간 총무원장을 역임했는데 종단이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애초에 총무원장을 할 마음이 없었는데 대중에게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총무원에 들어갔습니다. 1년여 짧은 시간이었지만 성과라 할 수 있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먼저 종교평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수많은 훼불 행위가 일어났습니다. 스님들과 불자들이 많이 격앙됐습니다. 그대로 두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르겠다 싶어 김수환 추기경과 정진석 당시 명동성당 대주교,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김동환 목사를 만나 종교평화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와 함께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도 만들어 종교 간 화합을 도모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당시 팽배하던 우주종말론을 잠재웠습니다. 2000년대가 가까워 오면서 수많은 종말론이 퍼져 나갔습니다. 부처님법에 근거해 많은 언론 종사자와 얘기를 나누며 종말론에 현혹되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세 번째는 민족 간, 종교 간, 노사 간, 부부간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은 탐욕 때문이라며 ‘초발심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짧은 1년의 시간 동안 스님은 종교화합을 위해 노력했다. 또 스님은 총무원장 선거 과정이 위법이라는 법원 판결이 나오자 곧바로 걸망을 메고 나와 종단 분란의 소지를 없앴다. 앞서 밝혔듯 총무원장직을 수행하면서도 새벽예불과 108배를 하루도 거르지 않은 것은 아직까지도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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