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2

2000.02.24

“흙 살리러 농촌으로 떠납시다”

생명공동체운동 깃발 든 이병철씨… “생명농업만이 농촌-도시 함께 사는 길”

  • 입력2006-07-19 14: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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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 살리러 농촌으로 떠납시다”
    “돈 벌 생각이면 농촌 오지 마시오.” 귀농운동을 한다는 이가 대뜸 꺼내는 말이다. 당혹스럽다. ‘농촌에서도 열심히만 일하면 돈 벌 수 있다’고 애써 설득해도 혹할까 말까 한데, 그는 “불편함, 배고픔을 각오하는 사람만 농사지으러 오라”고 오금을 박는다.

    전국귀농운동본부장 이병철씨(51). 그가 ‘전도’하는 귀농은 단지 산업사회에서 설자리를 잃어가는 농촌을 경제적으로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죽어가는 우리네 흙과 밥의 생명을 살려내는 ‘공동체운동’으로서의 귀농에 방점이 찍혀 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농약을 치고, 제초제를 쓰며 땅의 생명력을 파괴시키는 농업이란 아예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구는 현재 모든 생명체가 생존 자체를 위협받을 만큼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환경은 파괴되고 자원은 고갈돼가고 있어요.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화두는 ‘발전’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입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대안문명이 필요한데, 그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농업적인 문명’이에요.”

    고향의 땅과 소비자의 밥상을 살려내는 ‘생명 살리기로서의 귀농’.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이런 생명운동을 주창한 것은 아니었다.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그는 그저 ‘진보적 이념을 지닌 농촌운동가’ 였다. 민청학련 세대 학생운동가 출신인 그가 농촌에 투신한 것은 지난 75년의 일. 그 자신 농군의 자식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상록수’를 읽은 이래 내내 농촌운동을 꿈꿔온 그로서는 자연스런 선택이었다.

    76년 가톨릭농민회 경남지부 초대 회장을 역임한 그는 이후 10여년간 가농에서 일하며 ‘민중민주화 투쟁의 일환으로서’ 농촌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조직국장으로 일하면서, 그리고 결과적으로 ‘미완성으로 그친 시민혁명’을 겪으며 그는 이념을 앞세운 정치적 투쟁에 한계를 느꼈다. 삶의 전반을 아우르는, 보다 근원적인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생명운동이었습니다. 기존 농촌운동은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계급운동’이었지만, 이같은 사고방식은 결국 농업생산물을 ‘상품’으로밖에 바라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밥은 상품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에요. 이 밥을 생산해내는 농민은 ‘생명을 살려내는 건강한 일꾼’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농업에 대한 새로운 개안(開眼). 그리하여 그는 88년부터 농민은 생명력이 살아있는 농업생산물을 책임지고 길러내고, 도시 소비자는 이렇게 공들여 길러낸 단위 농촌의 생산물을 또한 책임지고 소비해주는 도-농 공동체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밀살리기운동,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이다.

    96년에는 농촌살리기운동본부, 가농, 생활협동조합중앙회 등 200여 단체와 뜻을 모아 귀농운동본부를 발족해 체계적인 귀농교육을 시도했다. 80년대 이후 농촌을 떠난 인구는 대략 600만명. 우리 땅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젊은 인력을 농촌에 수혈하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한 기에 6개월에서 1년간 진행되는 귀농학교가 46기에 이른 지금까지 배출한 수강생 수는 모두 1617명. 이들 중 실제로 귀농하는 이는 20%가 채 안된다.

    하지만 이곳 출신 귀농자들은 여느 귀농자에 비해 중도포기하는 경우가 적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학교는 농업기술이나 농촌에서 돈버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생명중심의 올곧은 농업관을 세우는 교육에 주력하기 때문이다. 농업이 바로 선다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개개인의 삶에 어떤 축복과 혜택을 선사하는지 충분히 고민한 만큼, 이곳 출신 귀농자들은 실제 농촌에서 생활하며 부닥치는 어려움이나 불편함도 비교적 거뜬히 극복해낸다는 것.

    “경제적인 수익을 생각하면 귀농 못합니다. 농사짓고 살면 도시에서 돈 잘버는 사람 수입의 10%나 벌 수 있을까 말까. 저는 수강생들에게 늘 ‘사기쳐서 돈을 벌려고 해도 도시에서 하는 편이 낫다. 돈 벌려면 농촌 오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농사는 인간에게 정직한 삶을 가능케 해줍니다. 남을 거꾸러뜨리지 않으면 내가 생존할 수 없는 도시의 경쟁적 삶과 달리 자연과 이웃과 평화롭게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자라나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꼭 한 번쯤은 농촌에서 흙과 더불어 살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지금 흙 속에서 살지 못하고 있다. 서울의 귀농운동본부와 마산의 집을 바삐 오가며 사람을 조직해내고 교육시키느라, 그리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귀농학교 출신 농군들을 ‘시집간 딸 챙기는 친정아버지 심정’으로 일일이 찾아다니며 보살피느라 직접 농사지을 엄두를 못내고 있는 것. 대신 그는 일상의 삶 속에서 늘 작고 꾸준한 실천을 한다. 그 하나가 ‘조금 쓰고 조금 버리기’다.

    “자연 속에는 ‘버려지는 쓰레기’란 없습니다. 똥이 곧 퇴비가 되어 밥을 만들어내듯, 자연의 모든 물질은 순환생성됩니다. 반면 산업문명은 물질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고, 버립니다. 많이 생산해서 많이 쓰는 것이죠. 그러나 적게 쓰고 적게 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풍요로움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던히도 물건을 안사고, 안쓴다. 겨울 한 철을 두툼하니 누빈 생활한복 한 벌로 버텨내고, 한창 멋부릴 두 딸아이에게도 남이 입던 헌옷을 얻어 입히곤 한다. 식사는 하루 두끼. 서울에 올라가는 날은 그나마도 한끼로 줄인다. 식탁에서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안먹을 수 있다면 먹지 말자’는 철저한 소식주의. 80년 이후로 최근 몇 년 전까진 ‘서구문명의 산물’인 커피나 껌 따윈 아예 입에 대지도 않는 쇠고집을 부렸고, 아내가 결혼할 때 새로 사온 가스레인지는 “연탄도 못때는 사람이 있는데!”라고 호통치며 10년을 못쓰게 했다.

    그의 아내 박정희씨(45·마산대학 교수)는, ‘운동가의 아내’가 대저 그렇듯, 평생 생활비 한 번 변변히 내놓지 않은 남편을 대신해 가정을 이끌어왔다. 가족보다는 늘 일이 우선인 남편에게, 싫은 소리 한번 않고 묵묵히 살림 꾸리며 두 딸 아라(19), 나라(16)를 건강하게 키워낸 아내. 그 아내의 고마움을 나이 마흔 넘어서야 뒤늦게 깨달은 이씨는 ‘아내는 도인이다’ ‘아내는 밥이다’라는 시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

    요즘 이씨는 퍽 들떠 있다. 올 연말이면 드디어 마산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그토록 꿈꾸던 농촌 생명공동체로의 투신을 실행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작년 말 마산에서 자동차로 30여분 떨어진 함안군 산인리 숲안마을에 논 두 마지기를 사둔 그는 올 한 해 부지런히 땅을 갈아엎고, 집 한 채라도 지어올린 뒤 온가족과 함께 이곳에 깃들일 예정이다. 집 지어올릴 돈이 마련될까 걱정이긴 하지만, 에이, 그것도 아내가 벌어다주겠지.

    벌써부터 그는 구수한 땅냄새에 한껏 파묻혀 살 생각에 혼곤히 취해 마음이 벌렁거린다. 밥을 살려내고, 그래서 겨레를 살려낼 그 귀하디 귀한 흙과 더불어 남은 평생 살아갈 생각에.

    [프로필]

    ●49년 경남 고성 출생

    ●74년 부산대 재학 중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 출감

    ●76년 가톨릭농민회 경남지부장

    ●87년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조직국장

    ●한국 가톨릭농민회 사무국장,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기획실장, 우리밀살리기운동 부산경남본부장 등 역임

    ●현재 전국귀농운동본부장, 환경운동연합 감사, 한살림 감사 등으로 활동중

    ●저서 ‘밥의 위기, 생명의 위기’, ‘살아남기, 근원으로 돌아가기’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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