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1

2006.04.18

스웨덴만 만나면 작아지는 잉글랜드

앞선 전력 불구 38년간 한 번도 못 이겨 … 에릭손 감독, 모국과의 대결 ‘부담 백배’

  • 박문성 SBS 해설위원 mspark13@naver.com

    입력2006-04-12 16: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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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잉글랜드의 사령탑 스벤 고란 에릭손 감독은 지난해 12월10일 조추첨 직후 이렇게 하소연했을 법하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스웨덴과 맞서야 하니 오죽했겠는가. 그것도 2002년 한일월드컵에 이은 두 번째 만남이다. 얄궂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승부 세계에서 사사로운 감정에 매여서는 안 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야릇한 느낌은 어쩔 수 없으리라. 잉글랜드, 스웨덴, 파라과이, 트리니다드토바고가 묶인 2006년 독일월드컵 B조의 얽히고설킨 사연을 들여다봤다.

    루니, 램파드, 베컴 등 역대 최강 전력 자랑

    에릭손은 조추첨에서 B조에 스웨덴이 호명되자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호불호(好不好)가 아닌 숙명을 탓하는 듯한 묘한 표정이었다. 조추첨 결과 잉글랜드는 또다시 스웨덴과 한 조에 편성됐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죽음의 조로 꼽힌 F조에서도 만난 바 있어 2개 대회 연속 격돌이다. 확률적으로 가능한 일이나 에릭손으로선 하늘을 원망할 일이다. 모국인 데다 지긋지긋한 징크스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에릭손은 스웨덴 출신이다. 2000년 유럽선수권 조별예선 탈락 등 흔들리던 축구 종가의 명예를 재건하기 위해 2001년 1월 전격 영입됐다. ‘전격’이라는 표현을 쓴 건 에릭손이 잉글랜드 축구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기 때문이다. 고든 뱅크스와 보비 찰턴, 잭 찰턴 형제 등의 활약에 힘입어 우승한 1966년 잉글랜드 대회 외에는 월드컵 정상과 인연을 맺지 못한 데다 2000년 전후의 극심한 침체가 부른 ‘사건’이었다. 종가의 고집과 자존심을 우선 가치로 삼았던 잉글랜드가 이방인에게, 그것도 클럽이 아닌 대표팀 감독 자리를 내주었다는 점에서 충격적인 일이었다.



    에릭손은 1980, 90년대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리그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며 숱한 영광을 이끌었다. 벤피카를 이끌며 포르투갈 리그 2연패를 일궜고, AS로마·피오렌티나 ·삼프도리아를 지휘하며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도 성공신화를 써나갔다. 에릭손이라는 이름을 세계 무대에 알린 것은 97년부터다. 로마 연고의 라치오 사령탑으로 98년 이탈리아컵과 슈퍼컵, 99년 UEFA(유럽축구연맹) 위너스컵과 UEFA 슈퍼컵, 2000년 리그 정상 등 유럽 무대를 호령했다.

    에릭손과 스웨덴의 얄궂은 운명은 복잡하다. 잉글랜드의 스웨덴 징크스 때문이다. 객관적 전력에서는 잉글랜드가 앞서나 이상하게도 스웨덴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 68년 마틴 피터스, 보비 찰턴, 로저 헌터 등의 연속 골로 3대 1로 제압한 이래 승리가 없다. 38년간 공식 A매치 통산 전적이 11전4무7패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선 F조 첫 상대로 만나 한 골씩을 주고받으며 무승부를 거뒀다. 2004년 3월 평가전에선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에게 결승골을 내주며 0대 1로 패했다. 잡힌 발목을 떼어놓기가 참으로 힘든 잉글랜드다. 더군다나 이번엔 스웨덴을 꼭 잡아야 한다. 스웨덴에 밀려 조 2위로 16강전에 올라갈 경우 A조 1위가 예상되는 개최국 독일과 만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에릭손으로선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연속해서 스웨덴을 만난 것만도 그런데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이어져온 징크스마저 깨야 하니 속이 탈 일이다. 잉글랜드 멤버는 최강이란 평가다. 세계 축구계가 주목하는 웨인 루니를 비롯해 프랭크 램파드, 스티븐 제라드, 데이비드 베컴, 조 콜 등 66년 잉글랜드월드컵 우승 당시와 견주어도 손색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웨덴만 만나면 작아지는 잉글랜드

    스웨덴의 스트라이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운데).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사임이 내정된 에릭손으로서는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당초 계약 기간은 2008년까지였으나 지역예선 부진, 축구협회 여비서와의 스캔들, 프리미어리그와 선수들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 등으로 독일월드컵을 마지막으로 잉글랜드 대표팀과의 인연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 때문에 스웨덴과의 일전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느냐를 살펴보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산타크루즈 버틴 파라과이 ‘다크호스’

    B조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신구 세대의 격돌이다. 잉글랜드의 웨인 루니, 스웨덴의 이브라히모비치, 파라과이의 호케 산타크루즈가 신성의 대표주자라면, 트리니다드토바고의 드와이트 요크는 90년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호령한 구관의 상징이다.

    85년생인 루니는 볼 때마다 신비감을 준다. 만 스무 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재능으로 수비진을 헤집고 골을 잡아낸다. 오죽했으면 아스날의 아르센 벵거 감독이 숙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의 루니를 가리켜 “내가 본 선수 중 최고다”는 극찬을 했겠는가. 10대이던 2004년 여름 에버튼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옮기며 기록한 5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이적료가 루니의 잠재력을 대변한다. 루니는 17세 111일의 나이로 2003년 2월 호주전 A매치에서 데뷔해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연소 대표선수 출장 기록을 세웠고, 이듬해 유로2004에서는 주전 공격수로 4골을 퍼붓는 등 종가의 핵심 병기로 급부상했다.

    루니에 맞서는 이브라히모비치 역시 거물급 뉴페이스다. 190cm가 넘는 장신으로 포스트플레이에 능하면서도 유연한 테크닉과 정교한 골 결정력을 지녀 80, 90년대 최고의 골잡이로 각광받은 ‘반 바스텐의 재래’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주인공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교체 멤버로 활약했으나 유로2004를 거치며 바이킹 군단의 확실한 주포로 자리매김한 만큼 이번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기대를 모은다.

    산타크루즈는 실력만큼이나 조각 같은 외모로 숱한 여성 팬을 몰고 다니는 스타 플레이어다. 1999년 파라과이 축구 역사상 최고 이적료인 1200만 달러에 독일 최고 명문 바이에른 뮌헨에 입단한 그는 발군의 파워와 감각적인 볼 컨트롤, 수비진의 공간을 파고드는 순간 움직임 등 파라과이 최고 스트라이커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앞선 신예 모두가 80년대생인 반면 요크는 71년생으로 우리나이로 36세. 박지성의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성기이던 99년 3관왕 멤버이기도 한 요크는 아스톤 빌라, 블랙번, 버밍엄 시티 등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만 15년간 활약한 백전노장이다. 98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최고 이적료를 기록했고, 99년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등 선명한 자취를 남겼지만 유독 월드컵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트리니다드토바고가 매번 고배를 들었기 때문이다. 사상 첫 본선 무대를 밟는 조국만큼이나 가슴 설레고 각오가 남다른 까닭이다. 과연 세월의 무게가 겁 없는 영파워를 누를 수 있을까. 요크와 루니, 이브라히모비치, 산타크루즈의 맞대결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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