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8

2005.06.07

8년간 203연승 ‘유도의 달인’

일본 선수권대회 9연패·올림픽·세계선수권 석권 등 불멸의 금자탑

  •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younglo54@yahoo.co.kr

    입력2005-06-02 18:5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일본 유도의 영웅 야마시타 야스히로는 일본에서 모든 종목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선수로 추앙받는다. 그가 현역 시절 세운 203연승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 때문이다. 203연승은 일본 유도뿐 아니라 지구촌의 다른 종목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불멸의 기록’이다.

    유도의 헤비급인 95kg 이상급에서 활약한 야마시타는 굳히기와 허벅다리후리기 기술이 뛰어났고, 경기 운영 능력은 도인의 경지였다.

    야마시타의 연승 행진은 1977년 10월 일본과 옛 소련의 친선 유도경기에서 소련의 그로니를 꺾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79년 9월 전(全) 일본 체급별 대회에서 쓰쿠바 대학의 마쓰이를 판정승으로 누르고, 대회 3연패를 하며 100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79년 12월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서 인도네시아의 고워크를 허벅다리후리기 한판으로 꺾으면서 117연승을 기록했고, 80년 4월 전(全) 일본유도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야마모토 선수를 이겨 대회 4연패를 기록하면서 128연승을 이어갔다. 또 81년 9월 세계유도권대회 결승전에서 아이슬란드의 기드손을 허벅다리후리기 한판승으로 꺾으면서 140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8년간 203연승 ‘유도의 달인’

    1980년 2월 한국을 방문한 야마시타 야스히로가 대한유도대학의 주소돈과 대전, 30초 만에 안아조르기로 한판승을 거뒀다.

    은퇴 후 일본 대표팀 감독으로도 맹활약



    계속해서 그는 83년 세계유도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폴란드의 레시크를 누르고 대회 3연패와 함께 196연승을 이어갔고, 85년 전 일본유도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사이토를 물리치고 대회 9연패를 차지하면서 대망의 203연승을 달성했다.

    야마시타는 84년 LA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203연승 기록과 함께 LA올림픽 금메달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올림픽에 한이 맺혔기 때문이다. 야마시타는 대학 1학년 때 맞이한 76년 몬트리올올림픽 때 최종 선발에서 2위에 그쳐 출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80년 모스크바올림픽 때는 다리 골절 부상을 극복하면서까지 출전 자격을 따냈지만 일본이 미국, 한국 등과 함께 올림픽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출전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니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올림픽인 LA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이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야마시타는 LA올림픽 무제한급 2회전에서 서독의 슈나벨 선수와 경기하다가 장딴지 근육이 파열되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슈나벨에게 자신이 부상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왼팔 업어치기로 한판승을 거두고 3회전에 올랐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다음에 싸울 선수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다리 통증을 참아가며 똑바로 걸어나왔다. 야마시타는 프랑스의 콜롬보와 치른 준결승전에서 경기 시작 30초 만에 허벅다리걸기 한판으로 콜롬보를 물리쳤고, 결승전에서는 이집트의 라슈완을 곁누르기 한판승으로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야마시타는 88년 서울올림픽과 96년 애틀랜타올림픽, 그리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선 일본 유도대표팀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84년엔 일본 정부로부터 체육인에게는 최고 영예인 국민영예상을 받았다.

    8년간 203연승 ‘유도의 달인’

    1984년 산토리 스포츠드링크의 광고 모델로 나선 야마시타.

    초등학교 6학년 때 170cm, 75kg

    야마시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집 근처 도장에 다니면서 유도를 시작했다. 유도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는지, 배운 지 1년 만인 6학년 때 구마모토 지역 대회에 출전해서 우승을 차지했다. 6학년 때 이미 체격이 키 170cm, 몸무게 75kg의 거구(?)였다.

    야마시타가 초등학교 대회에서 상대 선수를 쉽게 제압하는 것을 후지와라(藤原) 중학교 유도부의 시라이시 히로시게 감독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시라이시 감독은 야마시타가 결승전에서 상대 선수를 경기 시작 불과 5초 만에 한판으로 제압하는 것을 보고 “우리 학교 유도부로 오면 특별히 관심을 갖고 키워주겠다”고 권했고, 야마시타의 운명은 그때부터 유도 외길로 이어졌다.

    당시 후지와라 중학교는 일본 최고의 유도 중학교였다. 전 일본 중학교 유도선수권대회 9연패를 하고 있었고, 야마시타가 학교를 다닌 3년 동안에도 무패 행진을 이어가 12연패를 했다. 시라이시 감독은 선수들에게 이기기 위한 기술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품성과 체육인 본연의 자세를 가르쳤다. 시라이시 감독은 선수들에게 ‘유도로 세계 챔피언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인으로 챔피언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야마시타는 구마모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2학년 때 도카이(東海) 대학 부속 사가미 고등학교로 옮겼다. 당시 도카이 대학의 창설자이자 전 총장이었던 마쓰마에 시게요시가 야마시타의 자질을 높이 평가해 옆에 두고 키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마쓰마에는 당시 국제유도연맹 회장으로서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유도인이었다.

    야마시타는 사가미 고등학교에서 도카이 대학 유도부의 사토 감독을 만나 본격적인 유도 수업을 쌓는다.

    야마시타는 203연승 행진의 위업을 달성한 이후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시라이시 선생이 내 유도의 기초를 잡아주었고, 사토 감독이 완성시켜 주었다. 두 분이 나의 유도 인생의 절대자다”고 말했다.

    야마시타는 현역에서 은퇴한 뒤 1년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때의 경험이 그에게는 지도자로 생활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그는 유학 기간에 유럽 각국에서 열리는 국제 유도대회를 지켜보고 각국의 국가대표 유도팀의 합숙훈련을 참관하면서, 앞으로 지도자가 되면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익힐 수 있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