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0

2003.04.17

오싹… 짜릿… 황홀한 추락

  • 허시명 / 여행작가 storyf@yahoo.co.kr

    입력2003-04-10 10: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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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싹… 짜릿… 황홀한 추락

    번지점프를 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공포와 쾌감이 번지점프의 매력이다.

    스키 시즌도 끝나고 수상레저를 즐기기에는 이른 봄날,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권할 만한 게 번지점프다. 속이 확 뚫리는 청량음료 같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뇌성벽력 같다.

    청풍문화재단지 건너편 충주호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62m 높이의 번지점프장이 있고, 철원 직탕폭포 앞 태봉교에는 유일하게 강으로 떨어지는 번지점프대가 있다. 번지점프장은 전국에 10여개가 있는데 서울 근교에서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곳이 분당 율동공원 번지점프장이다. 시민공원이라 무료로 주차할 수 있고, 산책로가 잘 닦여 있어 여유 있게 걸어볼 수도 있다.

    거두절미하고 율동공원 45m 높이의 번지점프대에 섰다. 50살 이하로 제한하는 곳도 있는데 이곳은 15살 이상이면 누구라도 설 수 있다. 물론 임산부, 심장질환자,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피해야 한다. 각서를 쓰고 간단한 주의를 듣는 것은 필수다.

    바람이 그리 세차지도 않은데 T자형 철탑 번지점프대가 흔들렸다. 오금이 저려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다. 앞을 바라보기조차 겁났다. 눈앞의 산자락이 파도처럼 춤을 췄다. 쇠기둥을 붙들고 나서야 간신히 발 밑을 내려다본다. 땅 위의 사람들이 부러진 성냥개비처럼 작아 보였다. 그 사람들이 나를 올려다본다. 말 그대로 백척간두에 섰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발 아래를 내려다본다. 물빛이 푸르다. 그러나 수면에 초점을 맞추기가 어렵다. 높이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스라하다.

    “자! 준비됐습니까?”



    번지마스터의 목소리가 추상같다. 번지점프대의 끝자락에 서보는데 자꾸 무릎의 힘이 빠진다. 뒤돌아 도망치고 싶다.

    “두 팔을 벌리고, 심호흡을 하십시오!”

    번지마스터의 말에 따라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 이빨을 사려 문다. 나보다 먼저 뛰었던 여자들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까짓 것 나라고 못 뛰겠어, 나는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소용이 없다.

    “준비되셨습니까? 두 팔을 벌리고 새처럼 뛰어오르십시오. 무섭다고 끈을 잡거나 제 팔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까?”

    답답함 날리는 스릴 만점 레저

    오싹… 짜릿… 황홀한 추락

    번지점프를 하기 위해서는 상체와 허리에 안전끈을 조여 매야 한다(왼쪽). 수백 가닥의 고무줄 뭉치인 번지점프줄은 탄력이 좋아서 충격을 완화해준다.

    반 발자국 앞으로 나서 점프대 끝에 서보지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대답을 하면 주문에 홀린 듯 뛰어내리게 될 것 같다. ‘이게 무슨 짓인가’ 후회막급이다. 나는 두리번거리면서 번지점프줄이 안전하게 매어져 있는지 다시 확인한다. 번지점프줄은 가는 고무줄 940가닥이 뭉쳐 있다. 그 줄이 내 몸과 점프대의 쇠줄에 잘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하는 일엔 실수가 있는 법인데, 행여나 내 차례에 실수가 생기면 어떻게 한다, 걱정이 밀려온다. 결국 나는 뒷걸음질하고 만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한번 뛰기로 마음먹었을 때 뛰어야 덜 무섭습니다. 자꾸 아래만 내려다보고 번지점프대에 오래 서 있으면 두려움만 커집니다. 제가 다섯을 셀 테니까 과감하게 뛰어내리십시오. 알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나는 목청껏 소리쳐본다. 소리를 지르고 나자 담력이 붙는 것 같다. 내가 이렇게 겁쟁이는 아니었는데, 왜 이러나 싶다. 이제는 발 밑을 바라보지 않기로 했다. 산등성이 너머의 허공을 바라본다. 허공 속으로 새처럼 비상하는 거다. 멋지게, 아름답게, 화려하게…. 모든 것은 번지마스터와 번지줄에 맡기기로 한다.

    오싹… 짜릿… 황홀한 추락

    두 팔을 벌리고 새처럼 날면 된다(큰 사진).번지점프대 높이가 30m가 넘으면 낙하지점은 수심 5m 이상의 수면이라야 한다.

    ‘믿자, 믿어! 목숨을 거는 것은 레저가 아니다. 레저는 즐기는 것이다. 번지점프는 안전하다. 세 가지 안전장치가 있다지 않은가. 설령 줄이 끊어진다 해도 940가닥의 고무줄이 뭉쳐 있어서 한 번에 끊어지지는 않는다. 또 낙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지더라도 45m 높이에서 추락하는 게 아니고 탄력을 가장 많이 받은 낮은 지점(수면 위 3m 지점)에서 떨어지는 것이니 다칠 염려가 없다지 않은가. 게다가 5m 깊이의 물로 떨어지니 크게 다치지는 않을 게 아닌가. 다리끈은 이중으로 연결되고 허리끈에도 보조줄이 연결되어 있으니 믿자, 믿어! 파이브, 포, 스리, 투, 원, 제로!’

    두 발을 힘차게 박차고 허공 속으로 몸을 날렸다. 두 눈 질끈 감고, 벼랑에서 떨어지던 다이빙선수의 자세를 연상하며 한 마리 새가 되었다. 그런데 팔을 벌린 것도 잠시 몸이 추락하고 만다. 아아아악! 수직으로 곤두박질친다. 이성도 육신도 나를 통제할 수가 없다. 내 몸이 엄청난 속도로 가늘고 깊은 통 속으로 빨려든다. 두 눈을 부릅떴다. 마지막 풍경일지 모르니 봐둬야 한다. 이라크전쟁의 여파일까, 내 몸이 전투기에서 투하되는 폭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옥 유황불 속으로 뛰어드는 순간이 이럴까. 몸은 번지점프대에 그대로 있고, 영혼만 육체를 이탈하는 거라면 좋겠다. 꿈이라면 좋겠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번지점프줄이 내 두 발을 잡아채는 느낌이 들었다. 내 몸은 물로 처박히지 않았다. 다행이다, 살았다!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내 몸이 다시 솟아오른다.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워졌다. 비로소 거꾸로 매달린 내 눈에 풍경이 들어왔다. 율동공원을 에워싸고 있는 둥근 산자락이 마치 그릇 테두리 같다. 내 처지는 물그릇 속으로 추락하는 한 마리 벌레나 다름없다. 하늘은 넓고, 산은 낮고, 물은 푸르다. 박수소리가 들린다. 구경하는 사람들이다.

    내 몸이 45m에서 추락해본 적이 있던가. 물론 없다. 깡통 같은 경비행기를 탈 때도, 대바구니 같은 열기구를 탈 때도 이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그때는 내 몸을 의지할 기구들이 있었다. 그 기구들을 필사적으로 붙들었기에 두려움이 크지 않았다. 그런데 번지점프는 기댈 것도 없고 줄을 붙잡을 수도 없다. 그저 맨몸으로 허공 속으로 도약할 뿐이다.

    번지점프 도약대에서 뛰어내려, 거미처럼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때까지 30초쯤 걸릴까? 그 30초가 마치 30년을 압축해놓은 것 같다. 두렵고, 절박하고, 아찔하고, 아련하고, 편안하고, 즐겁고, 후련하다.

    이 봄날 나른하고 답답하고 무료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이라면, 무언가 새로운 변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번지점프대에 서보라. 생과 사의 갈림길 같은 백척간두에 서보면, 내가 필사적으로 뛰어들어야 할 곳이 어딘지 번갯불처럼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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