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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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

가을 우체국 앞에서

  • 마야 최 심리상담가 juspeace3000@naver.com

    입력2013-10-28 10: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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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
    가을이 무르익던 날 그녀가 불쑥 찾아왔다. 그녀는 내게 묻지도 않고 자리를 꿰차 앉은 뒤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큰일 났어요, 선생님.”

    “무슨 일인데요?”

    웬만해선 호들갑을 떨지 않는 그녀의 낯선 모습에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그녀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주위를 살폈으나, 상담실 안에 그녀와 나 둘밖에 없는 상황이라 그녀 행동이 과장돼 보였다.

    “정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어요. 며칠 안 됐어요. 그게 선생님이 하는 상담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이렇게 뛰어온 거예요.”



    상담과 먹거리 적절히 연관시켜

    그녀는 말 그대로 약속도 없이 불쑥 상담실을 찾아왔다. 내가 만일 상담 중이었어도 그녀는 내담자에게 “잠시 나가달라”고 얘기하고도 남을 기세였다.

    “선생님, 요즘 분노나 우울증, 무기력증, 이유 없는 통증 환자 많죠? 제게 좋은 방법이 있어요. 식이요법과 상담요법을 병행하는 거예요.”

    그녀는 뭔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양 자랑스럽게 웃음을 띠었으나, 그녀가 제안한 내용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병행 세러피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담계에서는 색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나의 시큰둥한 얼굴을 봤는지 그녀는 약간 실망한 표정이었으나, 예의 그 발랄하고 경쾌한 모습으로 돌아와 생긋 웃으며 두 주먹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뜻 같았다.

    “오른쪽이요.”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왼쪽.”

    너무 시시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니요. 오른쪽은 상담자 마음이고요, 왼쪽은 내담자의 가슴이에요. 둘이 처음 만나 어떻게 말문을 열고, 더 나아가서는 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거예요.”

    그녀가 매우 심오한 표정으로 말해 나도 그녀의 분위기에 빨려들 듯 진지해졌다.

    아이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
    “먼저 상담자가 가슴을 열겠죠. 보세요. 이렇게 펼쳐지면 왼쪽 주먹, 즉 내담자의 꽁꽁 닫힌 주먹을 감싸게 돼요. 그리고 따뜻하게 녹여주죠. 그런데 그다음은 뭐죠? 그다음은요? 이렇게 상담자가 내담자의 꽁꽁 닫힌 마음을 계속 감싸고 있으면 내담자는 자기 마음을 열 수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물러나 줘야 해요. 그러면 순간적으로 왼쪽 주먹, 즉 내담자 마음은 허전하고 쓸쓸할 거예요. 상담자를 원망할 수도 있죠. 그래도 그런 원망은 필요한 것이기도 하니까. 원래 상담자는 잘해도 욕, 못해도 욕먹는 거잖아요. 부모처럼(웃음). 여하튼 이렇게 물러난 뒤에는 내담자의 꽁꽁 닫힌 마음을 바라보며 물러난 오른손이 내담자에게 먹이를 가져다주는 거예요. 어떤 먹이를 가져다주느냐에 따라 왼쪽 주먹이 빨리 펴지기도 하고 느리게 펴지기도 하고, 또 쫙 펴지기도 하고 펴지다 말기도 하고, 혹은 아주 재수 없는 경우엔 펴다가 다시 주먹이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먹거리’가 중요한 거예요. ‘어떤’ 음식을 먹일 것인지의 문제죠.”

    나는 그녀의 말에 쏙 빠져들었다. 그녀가 똑똑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았지만, 이토록 상담과 먹거리를 적절히 연관시키는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럼 연희(가명) 씨는 그 먹거리가 뭐라고 생각해요? 문화적 소양, 뭐 그런 건가요?”

    나는 그녀에게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

    “왜 비틀어 듣나” 한 방 맞고 어이쿠

    갑자기 그녀가 깔깔깔 웃었다. 나도 모르게 머쓱해졌다. 왜 그녀는 저렇게 웃어젖힐까. 저렇게 웃는 그녀를 보면 나는 자꾸만 어린아이로 되돌아가고 싶어졌다. 저렇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기 무릎에 엎어지기도 하고, 내 책상을 인정사정없이 때리기도 하며, 발을 쾅쾅 구르기도 하다가 자기 배를 움켜잡고 꼭 옆으로 구를 것처럼 비스듬한 자세로 웃기 시작하면 아무리 엄숙한 어른이라도 픽 하고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한참을 웃어젖힌 그녀가 눈물이 찔끔 나온 반달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쿡쿡거리다 다시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이번엔 나도 그녀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그냥 웃겼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상담을 끝낸 후에도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날이면 나는 늘 즐거웠다. 그녀는 종잡을 수 없었고, 예측불가였으며, 가끔은 아주 슬퍼 보였고, 보통 때는 까불까불하는 아이 같았다. 그런데 한 번 화를 내면 정말 무서웠다. 그런 그녀는 늘 새로운 것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같이 밥을 먹는 법도 없이 그냥 바람처럼 들렀다 바람처럼 사라졌다.

    “선생님. 문화적 소양 같은 것은요, 다 각자 알아서 취향에 맞게 쌓아요. 중요한 것은 주먹을 잘 펴게 하려면 먹거리, 즉 어떤 음식을 먹이는가 하는 점이라고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비죽 내밀며 ‘어떻게 그걸 모르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모르게 위신을 세우고 싶었기에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 인문학적 소양 외 다양한 분야의 소양을 먹거리라고 하는군요.”

    나는 마치 정답을 댄 아이처럼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에는 거만의 미소까지 띠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차가워진 얼굴로 건조하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좋았어요. 그런데 오늘 느낀 건데, 선생님은 뭘 그대로 듣지를 못하네요. 제가 먹거리라고 하면 그냥 왜 먹거리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왜 꼭 그것에 뭔가 다른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비틀고 뭘 붙이세요? 그러면 상담 온 사람의 말을 어떻게 들으세요? 그냥 들으세요. 그냥 느끼세요. 그리고 그냥 맡으세요. 자꾸 자기 렌즈를 끼고 보려 하지 말고요. 아무래도 요즘 우리는 잘못된 먹거리 때문에 코랑 귀가 막힌 거 같아요. 잘 알아듣지를 못해요.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자연식을 하세요. 인공식을 하면 냄새도 못 맡고 청력도 떨어지니까요.”

    나는 그녀가 떠난 뒤 정말 내 귀와 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 한동안 어벙하게 앉아 있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아득한 곳에서 가만가만 노랫소리가 들렸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처음 듣는 노래였다. 하지만 나는 그전에도 계속 들려오던 노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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