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9

2013.08.05

외로운 그 남자, 50년을 쓴 가면

나쁜 남자 길들이기

  • 마야 최 심리상담가 juspeace3000@naver.com

    입력2013-08-05 10: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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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운 그 남자, 50년을 쓴 가면
    “그 사람 속을 알 수가 없어. 무한정 자상하다가도 어느 순간 얼음처럼 식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자신을 잊는 법이 없으니까. 사람들과도 관계를 아주 잘 맺는 것 같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그 사람을 좋아하니까. 다른 여자들에게도 필요 이상으로 잘하고, 그걸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그 사람이나 나나 산전수전 다 겪고 만나는 거잖아. 그를 이해했다가도 다음 순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아. 참 매력적이고 좋지만 그를 만나면서 더 외로워졌어. 마음 단단히 먹고 헤어지려고 하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헤어지지 마’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고(웃음). 환청이겠지? 많이 혼란스러워, 요즘.”

    지인의 부탁으로 시작한 상담이었다. 강진오(55·가명) 씨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위로받지 않으려는 성향임에도 상담에는 순순이 응했다. 강씨가 매우 강하고 지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상담 첫날부터 느꼈다. 겉으론 깃털처럼 부드럽고 깍듯했으나, 속은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거리에서 지나치면 그냥 잊힐 얼굴이었는데도 만날수록 묘하게 잘생겨 보였다.

    상담 목표도 모호했다. 지인은 강씨의 심중을 알아내 자신과 잘될 수 있는 사람인지 판단해주길 원했지만, 그것은 역학자에게 궁합을 보는 편이 더 나았다. 내가 개인적으로 정한 상담 목표는 강씨가 사랑할 때 상대가 누구든 장애요소가 있다면 그 원인을 찾아 같이 해결하는 것으로 정했다.

    강씨는 왜 여자를 그토록 애닳고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대여섯 번 상담했어도 상담 내용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했다. 어떤 식의 물음도 그로부터 적절한 답변을 끌어내지 못했다. 어떤 식의 침묵도 그를 정서적 퇴행으로 이끌지 못했다.

    유리벽 세워놓고 접근 금지



    강씨는 다정하고 지적이지만 여자와의 거리두기에는 매우 탁월한 감각을 가졌기에 여자가 애끓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냥 그 상황을 즐기는 것일까. 아주 친밀한 관계를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일까. 그는 유복한 집안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나 자상한 아버지와 다소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사랑을 독차지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결혼 후 사별했고 딸 한 명이 있었다. 꽤 알려진 전문 사진작가로, 전시회와 강좌만으로도 생활은 풍족했다.

    강씨의 거리두기는 내게도 예외없이 적용됐다. 보통 세러피 장에서 거리두기를 해야 할 사람은 내담자가 아니라 상담자다. 그런데 강씨의 경우는 내가 발버둥을 치며 그와 가까워지려 하면 할수록 외려 거리를 유지하며 유유자적했다. 마치 내가 애쓰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런 강씨에게 화가 나면서도 좋았고, 얄미우면서도 정이 갔으며, 관계를 딱 끊고 싶다가도 관계가 끊어질까 두려웠고, 외면하고 싶다가도 자꾸만 보고 싶었다. 강씨는 요샛말로 ‘남자’였다. 내가 느끼는 이런 감정이 바로 지인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자석에 끌려가는 철가루처럼 어쩔 수 없이 끌려가다 거의 다 왔다 싶을 즈음 갑자기 유리벽이 턱 막혀 있어 더는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그래서 애간장 녹게 만드는 남자, 나쁜 남자!

    그는 사회생활도, 가족생활도, 개인생활도 아주 잘 영위했다. 단 연인관계에서만 여자를 어떤 부분에서 만족시키지 못할 뿐이었다. 그런 강씨를 붙잡고 진전도 없는 상담을 하는 것이 상담을 받으려고 대기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상담은 후반으로 접어들었고, 이성적으로는 당장이라도 그만두게 하고 싶었으나 묘한 미련이 남았다. 이왕 시작한 거 한 번만 기회를 더 주기로 할까. 하지만 그것은 내 미련에 대한 변명이었다. 한 번만 더 해보고도 진전이 없을 때는 종결하리라 마음을 다졌다.

    나 혼자의 결정이지만 마지막 상담이라고 정하자 마음이 심란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허둥지둥대는데, 멘토이자 친구이기도 한 신부님이 불쑥 찾아왔다.

    “연필통은 왜 쏟아 정리하누?”

    신부님은 툭 던지듯 물었다.

    얼굴이 빨개진 나는 대답 대신 ‘교구식구들은 잘 지내는지’ ‘신부님 고혈압은 어떠한지’를 물었다. 그는 내가 말을 돌리는 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 상담실 안을 왔다 갔다 하며 헛기침을 했다. 여유롭게 상담실을 거니는 신부님이 얄미울 정도였으나 그를 그치게 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신부님에게 강씨에 대해 털어놓았다. 세례를 받으면 답을 주겠다는 가벼운 농으로 대화 물꼬를 튼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잡을 새도 없이 훌쩍 떠났다.

    “최 선생, 빛은 존재하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제. 하지만 거시기 뭐여, 내 눈 속에 빛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외부 세계의 빛도 알아보지 못하는 거지라잉.”

    강씨가 찾아왔다. 나는 말 한 마디 없이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감정에 집중했다. 강씨도 말이 없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영영 그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채 상담을 종결할 것만 같았다. 강씨가 고개를 비껴 돌려 창 밖을 바라봤다. 옆얼굴에 햇볕이 들었다. 검은 가면을 쓴 듯 콧잔등의 3분의 2 정도를 가르며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그의 눈이 깊고 어두워져 점점 알 수 없는 빛을 띠었다. 30분가량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그의 눈빛과 침묵에 가슴이 점점 먹먹해졌다.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슴에 찰랑찰랑 차오르는 듯했다. 내 안에 빛이 있어야 밖의 빛을 본다고 했던가. 아, 그렇다면 그 안의 그늘은 내 그늘로 보는 것이었구나!

    “외로우시군요.”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을 때 어두운 눈에서 빛났던 눈물 한 방울. 그는 평생 외로웠다고 했다. 가족과 있건, 일터에서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건 늘 외로웠다고. 그것은 특별한 원인이 있는 외로움이라기보다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의 정신세계를, 자신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종종 천재들에게서 보이는,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격리하는 데서 비롯한 외로움이었다.

    자의식이 필요 이상 강한 사람

    그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늘 자신을 둘러싼 유리벽 안쪽에서 밖을 관찰했다. 누구도 유리벽 안으로 들인 적이 없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 존재적 외로움을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고, 손을 내밀어준 사람도 한 명 없었다. 특히 그처럼 자의식이 강하며 감정표현에 서투른 사람은 슬퍼도 외로워도 늘 웃고 예의 바른 법이다. 누구 한 사람도 웃는 표정 안쪽에서 울고 있는 그의 본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가 50년 넘게 써온 가면에 나도 까딱 속아 넘어갈 뻔했다. 그와 나는 닮았다. 자신의 속을 결코 드러내는 법 없이 겉으론 웃지만 속으론 우는 것이. 자의식이 필요 이상으로 강한 사람의 속성이다.

    그가 자신을 둘러싼 유리벽을 조금씩 깨자, 그와 나는 숨결을 교환하며 뼛속들이 깊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눴다. 경계가 풀리자 작은 실수에도 우리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회의와 의심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서서히 마음을 열어갔다.

    연장 상담이 끝날 즈음 그는 유리벽을 거두고 타인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생전 인사치레를 않던 그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과 한 시간을 지내면 석 달 동안 웃을 것을 다 웃는 것 같았어요. 온전히 이해받고 또 완전히 나 자신을 놓아버리는 경험이었습니다. 못 잊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배웅할 때 “모두 자신이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길을 잃고, 또 그 때문에 오랫동안 방황한다!”는 괴테의 말이 떠올랐다. 문득 벽거울을 들여다보니, 거울 안에서 그가 활짝 웃고 있었다.

    원래 나쁜 남자란 없는지도 모른다. 단지 외로운 남자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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