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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본질 흐리는 ‘토착왜구’

‘왜구 중 조선인이 많았다’는 식민사관에 포획된 표현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왜구의 본질 흐리는 ‘토착왜구’

여몽연합군에 맞서 해전을 벌이는 일본군을 그린 ‘몽고습래회도(1293)’. 1350년 이후 고려를 침공한 왜구는 일본 남조 정부군이었다는 점에서 이와 비슷했을 가능성이 크다 [위키피디아]

여몽연합군에 맞서 해전을 벌이는 일본군을 그린 ‘몽고습래회도(1293)’. 1350년 이후 고려를 침공한 왜구는 일본 남조 정부군이었다는 점에서 이와 비슷했을 가능성이 크다 [위키피디아]

언제부터인가 ‘토착왜구’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친일파’를 낮춰 부르는 용어로 ‘겉은 한국인인데 속은 (한국을 싫어하는) 일본인’이란 비아냥거림이 담겼다. 문재인 정부 들어 한일관계가 악화되자 일본과 관계개선을 요구하는 이들을 저격할 때 많이 등장한다.

역사학자 전우용 씨는 1910년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토왜천지(土倭天地)’라는 글에서 토왜를 ‘얼굴은 한국인이나 창자는 왜놈인 도깨비 같은 자,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인종’으로 규정했다며 그 사용을 지지했다. 이에 힘입어 ‘일본과 잘 지내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을 토착왜구로 낙인찍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나카무라 히데다카의 왜구관

중국 명대 원작을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왜구도권’ 중 명군(왼쪽)과 왜구의 해전도 [도쿄대사료편찬소]

중국 명대 원작을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왜구도권’ 중 명군(왼쪽)과 왜구의 해전도 [도쿄대사료편찬소]

하지만 이런 한국인들을 지켜보며 지하에서 웃고 있을 사람이 따로 있다. 왜구가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해적 집단이란 주장을 처음 들고 나온 나카무라 히데다카(1902~1984)다.

나카무라는 1926년 스물넷의 나이에 일본 도쿄제국대(일본사 전공)를 졸업하고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일원으로 촉탁이 됐다. 이후 1945년 일본 패전 때까지 무려 19년간 조선사편수회에서 황국사관과 식민사관의 주구(走狗)로 활동한 인물이다.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총독부 직할기관으로 창립된 시점이 1925년이니 조선사편수회의 ‘살아있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당시 그의 나이가 젊었기에 조선사편수회의 지도적 위치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수사관 편수관 교학관을 두루 거치고 마지막에는 간사 역할까지 겸임했다. 게다가 조선에서 이런 경력을 발판 삼아 일본으로 돌아와 나고야대학과 덴리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전후 조선사 연구의 1인자’로 불리게 된다.



30년 가까이 왜구를 연구해온 이영 방송통신대 교수(일본학)에 따르면 이 나카무라에 의해 왜곡된 왜구관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왜구는 일본 전국시대 규수 일대 다이묘들의 지시를 받고 움직인 정규군사 집단이었으며 여기에 참여한 조선인은 극소수였다. 나카무라는 이런 왜구의 실체를 감추기 위해 고려사와 조선사를 교묘하게 짜깁기 해 역사에 기록된 왜구의 상당수가 왜구로 가장한 조선인이라는 학설을 유포한 주역이다. 그는 이를 지칭하기 위해 ‘가왜((假倭)’라는 용어를 썼다. ‘토착왜구’라는 용어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두 종류의 왜구가 있다

왜구의 본질 흐리는 ‘토착왜구’
왜구라는 한자표현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문(414년)의 ‘왜구신라(倭寇新羅)’란 표현이다. 여기서 구(寇)는 ‘떼 지어 침략하다’라는 동사로 쓰였다. 고려사에도 고종10년(1223년) ‘왜가 김해를 침략했다’는 ‘왜구금주(倭寇金州)’를 필두로 주로 동사로 쓰이다가 1300년대가 되면서 ‘왜구’ 자체가 ‘일본 해적’이란 뜻의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고려말 왜구의 침략 횟수는 500회가 넘는다.

역사학계에선 왜구를 전기 왜구(고려말 왜구)와 후기 왜구(조선시대 왜구)로 구분한다. 전기 왜구는 원나라 말기인 14세기 한반도와 중국 산동성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최영과 이성계, 최무선, 정지를 전쟁영웅으로 만들어준 바로 그 왜구다. 후기 왜구는 명나라 중기인 16세기 주로 장쑤성, 저장성, 푸젠성 등 중국 남동부 해안을 무대로 밀무역과 약탈을 벌였다. 거기엔 중국인이 많았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런 둘의 차이에 더 주목했다. 전기 왜구가 주로 식량 약탈에 치중했다면 후기 왜구는 밀무역업자의 성격이 더 강했다. 명나라 조정은 외국과 민간무역을 엄금했는데 당시 동남아 일대를 장악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상인들은 비단과 도자기 같은 중국 공예품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땅이 척박해 농사짓기가 어려웠던 푸젠성 사람들 중심으로 밀무역 종사자들이 늘어났다. 그들 중 명 조정의 추적을 받게 된 일부는 남중국해와 가까운 일본 규슈 지역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규슈 지역의 일본 영주(다이묘)들의 후원을 받아 밀무역과 약탈 수익을 나눠가진 것이다. 그래서 후기 왜구 중 상당수는 중국인이라는 게 정설이다.

실제 일본 규슈에 가면 안휘성 출신이라고 ‘휘왕(徽王)’ 또는 바다를 평정했다 하여 ‘정해왕(淨海王)’을 자처한 왕직(王直)과 ‘천차평해(天差平海)대장군’을 참칭한 서해(徐海) 같은 중국인 해적왕들의 유적이 남아있다. 심지어 명나라 수복운동을 벌여 한족의 영웅으로 꼽히는 정성공(鄭成功·1624~1662년)도 푸젠성 출신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규슈 히라도섬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중국계 왜구의 후손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왜구가 다국적 경계인이라고?

일본 규슈 나가사키 북쪽 히라도섬에 있는 중국계 왜구 왕직(王直)의 동상 [중국 바이두백과]

일본 규슈 나가사키 북쪽 히라도섬에 있는 중국계 왜구 왕직(王直)의 동상 [중국 바이두백과]

후기 왜구가 창궐하던 16세기는 해적의 시대였다. 훗날 영국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프랜시스 드레이크(1545?~1596)가 신대륙에서 해적으로 맹활약하던 시기도 이때였다. 세계 최대 규모 은광이었던 남아메리카 현재 페루의 포토시에서 식민본국인 스페인으로 실어 나르는 은 수송함대를 노린 네덜란드와 영국의 해적들이 국가적 영웅으로 신분전환이 가능한 시대였다.

그 당시 해적들은 국적과 신분, 종교 같은 정체성에서 자유론 존재였다.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고, 어디에도 충성하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프랑스 사상가 자크 아탈 리가 규정한 ‘호모 노마드’로 규정되기도 한다. 아르헨티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집 ‘불한당들의 세계사’에 등장하는 중국 청나라 때 여해적 칭이나 재패니메이션 ‘원피스’ 역시 이런 낭만적 해적관의 산물이다.

일본에선 이런 낭만적 해적관을 왜구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왜구가 일본이란 특정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낭인집단의 무리였다는 ‘경계인론’이다. 그에 따르면 후기 왜구의 주축이 중국인+일본인이라면 전기 왜구의 주축은 조선인+일본인이 된다. 결국 조선인 중에 토착왜구가 많다는 소리가 되고 만다.

이런 논리의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 나카무라 히데다카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 ‘일선관계사 연구(1966)’에서 고려사에 왜구의 소행으로 기록된 것 중 상당수가 왜구를 가장한 고려사회 하층민의 반란이었으며 일본인들이었다 하더라도 대마도나 규슈 해안가 일대 민간인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황국사관의 아킬레스건, 왜구

일본 남북조 시대 남조를 연 고다이고 일왕의 초상화(왼쪽). 일본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자신들과 동일시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동상 [Monkan-bō Kōshin, David Moore]

일본 남북조 시대 남조를 연 고다이고 일왕의 초상화(왼쪽). 일본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자신들과 동일시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동상 [Monkan-bō Kōshin, David Moore]

이영 교수는 ‘왜구와 고려·일 본관계사’ 및 ‘황국사관과 고려말 왜구’ 같은 저술을 통해 그 허구성을 낱낱이 파헤쳤다. 그에 따르면 전후기 왜구는 모두 일본 내란기에 군량미 아니면 전비 확보를 위한 정규군 활동의 일환이었다. 서구적 개념에 따르면 왜구는 자발적인 ‘비공인 해적’으로서 파이어리츠(pirates)가 아니라 국가나 종교의 지원 아래 활동한 공인해적 코르세어즈(corsairs)였다.

전기 왜구는 일본의 왕실이 남조와 북조로 나뉜 남북조시대(1333~1392) 남조에 충성했던 규슈 지역 사무라이 세력이 군량미 확보를 위해 원나라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한반도와 중국 산둥성 일대 해안가를 약탈한 것이었다. 고려에서 왜구의 노략질이 급증하고 대규모환 시점이 1350년 이후인데 일본 남조와 북조 간 투쟁이 극심해지는 시점과 일치한다. 또 왜구 침략이 격감한 시점 역시 1392년 남조의 몰락 직후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 무려 500척의 함대에 기병 7000까지 대동한 대규모 군사집단을 민간 무력집단으로 호도할 수는 없다.

이는 당시 교토를 장악한 북조와 고려 조정 간에 오간 서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376년 무로마치 막부(북조)가 왜구의 침입을 항의하는 고려사신을 통해 ‘(막부) 조정에서 장수를 보내 (남조가 다스리는) 규슈 일대 진압작전에 나섰으니 진압이 완료되면 더 이상 해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서신을 보냈다.

후기 왜구 역시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진 전국시대(1493~1573) 규슈 일대 다이묘들이 전비 마련을 위해 중국 해적과 손을 잡고 밀무역과 약탈전투를 벌인 것으로 봐야하다. 실제 왕직은 히라도번의 다이묘인 마쓰라 다카노부의 비호를 받았고, 서해는 사쓰마번의 다이묘인 시마즈 가문의 용병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명나라 군대가 이들 왜구와 벌인 전투도를 청나라 때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왜구도권’에 등장하는 왜구의 깃발을 확대해본 결과 1555년에 해당하는 ‘고지(弘治) 4년’이란 일본의 연호가 확인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나카무라는 왜 이런 왜구의 정체를 감추려했을까. “에도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 세력은 1333년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남조의 고다이고(1288~1239) 일왕과 그를 도운 구스노키 마사시게(1294~1336)를 자신들의 역할모델로 삼았습니다. 메이지일왕 역시 혈통 상 북조를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다이고 일왕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천명했습니다. 그런데 노략질을 일삼은 왜구의 배후가 고다이고 혈통이 다스린 남조임이 밝혀지는 것이 곤혹스러웠던 겁니다. 그래서 왜구를 일본 조정과 무관한 민간인집단으로 둔갑시키거나 다국적 연합세력이라고 물타기를 하는 겁니다.”

이 교수의 이런 설명을 듣고도 토착왜구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할 수 있을까. 황국사관과 식민사관의 주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자제할 필요가 있다. 꼭 써야겠다면 친일파, 정확하게는 일본에 붙어 반역하는 부역(附逆)의 무리라는 뜻의 ‘부일배(附日輩)’라는 표현으로 족하지 않을까.






주간동아 2020.03.27 1232호 (p56~59)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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