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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렴에 걸린 중국 혁명의 심장부

‘기의(起義)의 도시’에서 ‘기역(起疫)의 도시’가 된 우한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폐렴에 걸린 중국 혁명의 심장부

안개에 쌓인 우한의 도심. [GettyImages]

안개에 쌓인 우한의 도심. [GettyImages]

신종코로나바이러스의 발원지인 중국 우한(武漢)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중국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도시다. 현재 후베이(湖北) 성의 성도인 이 도시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에서 위 촉 오 3국의 접경지에 위치해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로 꼽힌 형주(荊州)의 북부에 해당한다. 조조 제갈량 주유가 활약한 적벽대전의 무대라 주장하며 1998년 도시이름까지 바꾼 츠비(赤壁)가 그 남서쪽으로 120km가량 가면 나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중국의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란 소리다.

‘동방의 시카고’

우한시 지도. [위키피디아]

우한시 지도. [위키피디아]

우한은 중국을 관통하는 양쯔강 중류에 위치한다. 또 산시(陝西)성에서 후베이 성을 관통하는 한수이(漢水)의 합류지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륙교통의 요지로 꼽힌다. ‘아홉 성을 연결하는 네거리’라는 뜻의 구성통구(九省通衢)로 불리는 이유다. 예나 지금이나 물산과 인구가 풍부했고 현재 중국 중부 도시 중 최대 인구(1100만·중국 내 7위)를 자랑한다. 

현재도 우한은 중국 교통의 허브 역할을 맡고 있다. 특히 1995년 개장한 우한 톈허 국제공항은 모든 국내선의 집결지였던 데다 2017년 8월 3터미널이 완공되면서 한국과 일본, 대만, 동남아는 물론 미주와 유럽, 호주까지 국제선노선을 급격히 늘려갔다. 우한이 미국 중부 내륙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에 빗대어 ‘중국의 시카고’로 불리는 이유다. 특히 중국남방항공은 지난해 우한-뉴욕 왕복 티켓 값을 29만 원대까지 낮추며 공격적으로 국제선 노선 확장에 나선 것이 신종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확산이란 부작용을 낳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우한이 동방의 시카고로 불리는 또 다른 이유는 ‘호수의 도시’이기도 해서다. 미국 오대호 주변에 위치한 시카고처럼 우한은 중국 내 담수호 중 두 번째로 큰 둥호(東胡)를 필두로 호수가 많은 도시다. 거기다 양쯔강과 한수이까지 합쳐 도시 총면적의 4분의 1이 물에 잠겨 있다. 과장법의 귀재인 중국인들은 그래서 우한을 ‘천개 호수의 도시’라고 부른다. 그러다보니 만성적 홍수에 시달렸다. 치수로 유명한 우임금과 인간에게 농사를 가르쳤다는 후직(后稷)을 기리는 ‘우직행궁’이 우한에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중국혁명의 심장부

1911년 우창봉기 이후 수립된 호북군정부 수립. [위키피디아]

1911년 우창봉기 이후 수립된 호북군정부 수립. [위키피디아]

우한은 또한 20세기 중국 혁명의 심장부였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화국이 수립된 1911년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된 우창봉기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본디 우한은 ‘우한삼진(武漢三津)’으로 불리는 3개의 내륙 항구도시로 나뉘어 있었다. 양쯔강 중류의 우창(武昌)과 한수이 북안의 한양(漢陽), 한수이 남안의 한커우(漢口)다. 서울이 조선시대 한양으로 불린 이유도 한강(漢江) 이북에 위치해 있다해 붙인 이름이란 점에서 무한삼진 중 하나와 그 지명의 기원이 같다. 한커우는 가장 늦게 도시화됐다. 명조 때 도시화가 이뤄졌으며 청조 들어선 우창과 한양을 능가하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우한삼진 중 가장 역사가 깊은 곳은 우창이었다. 우창의 랜드마크에 해당하는 건축이 있으니 황학루다. 악양루(후난성 웨양시 소재), 등왕각(장시성 난창시 소재)과 함께 ‘강남 3대 명루’로 꼽히는 이 누각은 삼국지 주역 중 하나인 오나라 손권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오나라 군사가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점령한 뒤 유비가 관우의 복수전에 나설 경우에 대비해 221년 이곳에 군사도시를 조성하고 망루를 세우면서 “무로 나라를 다스려 번창케하겠다(以武治國而昌)”고 밝혔는데 거기서 무와 창을 따서 도시 이름을 삼았다는 것이다.

오나라 손권이 세웠다는

오나라 손권이 세웠다는 '황학루' [위키피디아]

중국 청조 말엽 우창은 그 이름에 걸맞은 도시가 됐다. 1900년 우한에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신군(新軍)을 주둔시키고 철강과 화약 중심의 병기창이 조성되며 군사도시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빠르게 서양문물이 밀려들었다. 그와 더불어 과학보습소, 일지회, 문학사, 공진회, 진무학사 같은 혁명조직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들의 사상은 자연스럽게 신군 병사들에게 전파됐고 1911년 10월 10일 군사봉기가 성공하면서 후베이 성 일대를 장악한 군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우창기의(武昌起義)로도 불리는 이 봉기의 성공은 들불처럼 중국 전역으로 번졌고 1912년 쑨원을 대총통으로 삼은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296년을 이어온 청제국의 몰락인 동시에 2000년 넘게 중국을 지배한 황제체제의 종언이었다. 

우한삼진이 하나의 도시로 처음 합쳐진 것은 1926년이었다. 1925년 쑨원 사망 후 국민당은 장제스가 이끌던 국민당 우파와 왕징웨이(汪精衛)가 이끈 국민당 좌파로 나뉜다. 공산당과 손을 잡은 국민당좌파는 혁명의 성지인 우창, 한양, 한커우를 통합해 우한이라 이름붙이고 1927년 이를 수도로 삼은 우한정부를 출범시킨다. 우한 정부는 그해 9월 장제스가 이끄는 난징정부 의해 재통합되면서 우한3진으로 다시 나뉜다. 그러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해 그해 12월 난징이 함락되자 다시 11개월간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 역할을 하게 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우한에 둥지를 튼 것도 이 기간이었다. 국공내전 후반부인 1949년 5월 우한 3진을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다시 하나의 도시로 통합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한기역

'우한 힘내라' 라는 응원구호가 적힌 우한시내를 마스크를 착용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신화=뉴시스]

공산화 이후 우한은 중국 산업화의 심장부이기도 했다. 1952년 중국 최초의 일괄제철소 우한강철이 세워지며 ‘중국 3대 용광로’로 불리며 마오쩌둥 시대 대약진운동을 상징하는 도시가 됐다. 1957년 공산화 이후 양쯔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교량인 ‘창강대교’ 역시 그런 중국 산업화의 상징이었다. 마오쩌둥이 수영으로 양쯔강을 건너면서 소동파의 ‘수조가두(水調歌頭)’를 원용한 ‘수조가두 유영(游泳)’에서 “창강대교가 남북을 가로지르니 천연의 요새가 탄탄대로로 변했다”고 칭송한 이유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마오를 극렬 지지하는 조반파와 보수파 홍위병 간 사실상 내전이 벌어져 수백 명이 사망한 1967년 ‘7·20사건’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현대 중국인들의 뇌리에 우한이 ‘기의(起義)의 도시’로 각인된 이유다. 

최근 의식 있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이런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바이러스를 우한기역(武漢起疫)으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중국어 발음상 ‘역(疫)’과 ‘의(義)’가 똑같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은폐하고 안일하게 대처한 중국정부의 무능으로 인해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우한이 시진핑 독재체제에 항거하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암시가 담긴 표현이다. 

세계적 유행병에 그 발원지 이름을 붙이면 그곳의 이미지가 나빠진다하여 ‘우한폐렴’을 ‘신종코로나바이러스’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병의 발원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한다는 발상 자체가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그 병으로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책임을 물어야할 것은 잘못된 정부정책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정부가 돼야하지 않을까. 우한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동시에 이번 발병으로 가장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한시민의 고통을 나누자는 취지로 ‘우한기역’이라 부르면 어떨까.





주간동아 1225호 (p4~6)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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