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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악마화하지 마라”던 간디도 자신은 용서 못 했다

탄생 150주년 맞는 ‘20세기의 성자’

“상대를 악마화하지 마라”던 간디도 자신은 용서 못 했다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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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성자’라는 표현은 형용모순이다. 20세기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극에 달해 독가스로 수백만 명을 학살하고, 원자폭탄 한 방으로 수만 명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가며, 신비의 영역이던 달에 인류가 발을 디딘 시대다. 우주 작동의 원리를 밝히고, 티끌보다 작은 초립자 세계의 원리를 규명하며, 생명의 신비가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발견한 시대다. 

그런데 여전히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종교적 성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형용모순이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인간세상의 묘미다. 20세기의 성자로 불린 사람 중에서도 단 한 명만 뽑으라면 10월 2일로 탄생 150주년을 맞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1869~1948·사진)가 첫손에 꼽힐 것이다.


아힘사, 브라마차리아, 사티아그라하, 스와라지

9월 24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마하트마 간디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를 주최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AP=뉴시스]

9월 24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마하트마 간디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를 주최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AP=뉴시스]

간디의 위대함은 종교와 정치를 결합해 인류에게 ‘비폭력 투쟁’이라는 또 다른 형용모순의 길을 열어준 데 있다. 폭력과 전쟁으로 점철된 제국주의 시대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태어난 그는 고전적 형태의 제국주의에 안락사의 문을 열어준 주역이다. 1919년 3·1운동부터 2016년 촛불집회까지 20세기 한국사를 관통한, ‘부당한 권력에 맞선 집단적이고 평화적인 저항’의 윤리적·실천적 기초를 마련한 사람도 간디다. 

그는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곳으로 꼽히는 구자라트주(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주지사를 맡았던 지역) 포르반다르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힌두교 집안에서 부모와 교사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며 살았다는 점에서 ‘엄친아’에 가까웠다. 그러다 영국 유학으로 변호사자격증을 따고 같은 영국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에서 개업한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한 식민지 엘리트에 불과했다. 하지만 남아공에 이주해 살던 7만 명의 인도인에 대한 차별정책에 저항한 보이콧운동과 대규모 평화행진으로 1913년 인도인을 대상으로 한 모든 차별법 철폐를 끌어내면서 40대 중반에 세계적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간디 사상의 핵심도 이때 만들어진다. 힌두교 사상에 입각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을 뜻하는 아힘사(Ahimsa)와 ‘금욕’을 뜻하는 브라마차리아(Brahmacharya)를 두 기둥으로 삼아 ‘진실의 힘’이라는 뜻의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사상을 벼려냈다. 모든 형태의 폭력에 반대하되 평화로운 방식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실천해 진실의 승리를 구현해낸다는 사상이다. 이들 용어는 모두 산스크리트어인데 간디에 의해 재해석된 것이다. 



1915년 고국으로 돌아온 간디는 남아공에서의 ‘진리실험’을 인도에도 적용해가기 시작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협력을 통해 독립을 성취하려 했으나 1919년 영국이 반란진압조령(條令)을 제정하며 인도에 대한 무력통치 의사를 굽히지 않자 납세 및 취업 거부, 상품 불매라는 대대적 보이콧운동의 불을 지폈다. 이후 간디가 늘 지니고 다녔던 물레는 영국 면직물 제품을 대체할 의류를 자급자족하겠다는 의지의 구현체였다. 또한 산업화 국가인 영국에 맞서 본연의 전통적 방식으로 자립·독립하겠다는 스와라지(Swaraji·힌디어로 ‘자치’)운동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는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물산장려운동’과 궤를 같이한다.


샤덴프로이데에 반하는 사상

사티아그라하 사상의 특징은 저항의 대상을 적대시하거나 악마화하지 말라는 데 있다. 그들의 잘못과 죄는 미워하되 사람에 대한 믿음과 희망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간디가 영국 국가(國歌)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의 2절 가사의 부적절함을 지적한 이유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여왕의 적들을 쓸어버리고 / 그들을 패배하도록 하시며 / 그들의 정치를 어지럽히고 / 그들의 부정한 계략을 좌절시키소서.’ 간디는 어떻게 상대편을 부정한 자들이라 단정하고 그들에게 일방적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사티아그라하 사상은 상대를 비하하고 모욕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상대편은 사악한 게 아니라 오판과 실수를 저질렀을 뿐이니, 우정과 아량을 베풀어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할 ‘잠재적 동지’다. 제로섬게임에 반대하는 사티아그라하는 독일어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의 대척점에 선 사상이다. 샤덴프로이데는 ‘남이 당하는 불행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뜻한다. 한국어에도 그와 궤를 같이하는 수동적 표현이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적이든 라이벌이든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그가 불행해지면 통쾌함을 느끼는 비열함을 부추긴다. 나치의 법학자로 불리는 카를 슈미트가 “정치의 본질은 적대에 있다”고 갈파할 수 있었던 인간관 역시 여기서 출발했다. 간디는 이런 서양적 인간관에 정면으로 맞섰다. 상대를 절멸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도 ‘우정 어린 설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고 도덕적 대의에 걸맞게 도덕적 방식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이런 저항투쟁은 서양인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그래서 ‘수동적 저항’이라는 표현을 썼다. 간디도 잠시 이를 수용하는 듯했으나 사티아그라하가 본질적으로 능동적 저항이라는 점에서 이를 최종 기각했다. 한국 촛불집회나 홍콩 우산시위에 참가해본 사람은 알 수 있다. 부당함에 맞서 거리로 나서는 것이 얼마나 적극적인 의지의 산물인지, 또 그 동력이 된 분노를 폭력으로 표출하지 않으면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간디로부터 시작된 사티아그라하 사상은 1947년 인도 독립으로 결실을 맺는다. 비록 힌두교(인도)와 이슬람교(파키스탄)로 분할 독립된 인도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간디의 노력은 1948년 그의 암살로 미완으로 끝났지만.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간디

마틴 루서 킹과 넬슨 만델라, 마사 누스바움(왼쪽부터). [gettyimages]

마틴 루서 킹과 넬슨 만델라, 마사 누스바움(왼쪽부터). [gettyimages]

그러나 간디가 죽은 뒤 그의 사상은 세계 곳곳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1960년대 미국에서 펼쳐진 민권운동과 1970년대 남아공에서 펼쳐진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은 사티아그라하의 씨앗이 맺은 결실이었다. 두 운동을 이끈 마틴 루서 킹 목사와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이 자타 공인 ‘간디의 계승자’로 불리는 이유도 거기 있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87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에서 펼쳐진 반정부 평화시위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간디를 만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같은 아시아권 사상가임에도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사상에 대한 한국의 연구는 원론적 수준에 맴돌고 있다. 오히려 그 대척점에 서 있다고 여겨지던 서양 정치사상가들이 사티아그라하 사상을 더 깊이 파고들고 있다. 사티아그라하의 본질이 비폭력이 아니라 비분노라고 갈파한 미국 정치사상가 마사 누스바움의 ‘분노와 용서’가 대표적이다. 

누스바움은 사티아그라하의 핵심이 불의에 분노하되 원초적 복수감정에 물드는 것을 차단하고 미래지향적인 사랑 공동체를 구현하는 것에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비분노의 사상이라고 재정의한다. 이는 흑백차별에 맞서 백인들을 우군으로 포섭하고자 고군분투했던 킹 목사와 만델라 전 대통령에게서 더욱 적극적으로 발현된다. 

무릇 모든 사상은 그 씨앗을 뿌린 사람보다 씨앗을 개량한 제자들에 의해 더욱 빛을 발하기 마련.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누스바움이 경탄스러운 점은 그 창시자인 간디의 한계까지 꿰뚫어본 점에 있다. 

간디는 정욕에 대한 거부감이 매우 커 40대 이후에는 아내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고 아기를 낳는 것에도 부정적이었다. 대다수 사람은 이런 수도승적 자세를 성인의 면모로 여겼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부친에 대한 죄의식과 불효막심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가 깔려 있었다. 

13세 때 동갑내기 아내와 결혼한 간디가 조혼에 반대한 이유를 ‘사랑 없는 결혼생활’ 때문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간디의 경우는 반대였다. 아내를 너무 사랑해 강박적으로 질투하고 집착할 정도였다. 결정적으로 16세 때 그가 지극 정성으로 병간호하던 아버지가 임종을 맞는 순간 아내와 사랑을 나누느라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렸다. 그는 자서전에 이때의 죄책감을 이렇게 적었다. ‘만일 내 동물적 정욕이 내 눈을 어둡게 하지만 않았던들 아버지의 임종을 못 지키는 형벌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됐다.’ 

간디는 타자에 대한 가학적 분노는 통제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에 대한 피학적 분노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자신을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간디의 심리를 연구한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고인이 된 간디를 청자로 삼아 이런 충고의 말을 건넸다. “당신 자신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당신의 몸에 비폭력으로 접근하십시오.” 위대한 간디도 결코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주간동아 2019.09.27 1207호(창간기념호③) (p6~8)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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