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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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on the stage

이념을 사명으로 착각한 우리 이야기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

  • 공연예술학 박사  ·  동아연극상 심사위원회 간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7-10-17 11:5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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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족상잔의 비극적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 이데올로기의 상처는 지워지지도, 잊히지도 않는다. 이로 인해 상실의 아픔을 겪은 사람이 상대에 대해 눈과 귀를 닫은 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의 골수에 사무친 한이 무력한 체념이나 설욕의 복수로 대체돼선 안 된다.

    따라서 역사의 핏빛 그림자를 감성으로 다독이는 이해가 필요하다. 나에게 칼을 겨누던 사람도, 그들과 맞서 싸운 사람도 ‘과연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목숨과 바꿀 만한 것인지’에 대해 성찰하거나 교육받지 못했다. 선택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충실하던 민초였다. 

    여기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상생과 화합을 위한 공연이 있다. 외모가 출중한 남자 배우 6명이 등장하는 가볍지만 무거운, 웃기지만 진지한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다.

    때는 6·25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 포로들은 이송 중인 배 안에서 폭동을 일으킨다. 그런데 때마침 기상악화로 배가 전복된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국군 2명은 북한군의 인질이 돼 무인도에 고립된다. 살아갈 양식도, 변변한 잠자리도 없는 무인도에서 이들은 목숨을 연명하고자 처절하고 야만적으로 변해간다. 유일하게 수송선을 수리할 수 있는 북한군 순호는 잔혹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줄을 놓아버린 상태.

    이에 국군 대위는 순호에게 ‘여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의외로 순호는 섬에 살고 있는 여신 이야기를 들으면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드디어 배를 수리해 섬을 탈출할 수 있게 된다. 단, 섬에 고립된 6명은 섬을 탈출하고자 모두 여신이 계신다는 전제하에 규칙을 정해놓고 행동한다. 신분, 계급 불문하고 지위고하 상관없이 모두 평등하다. 섬에는 명령이 아니라 부탁만 존재한다. 왜? 여신님이 그걸 좋아하니까.



    그러자 저마다의 여신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던 그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여동생, 꿈에도 잊히지 않는 어머니, 자신의 존재 이유인 딸…. 남북한 군인들은 형과 동생 사이로 변하고, 진한 인간애를 느끼며 각자의 선택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중하기 시작한다. 서로를 위협하던 수류탄을 고기잡이용으로 사용하면서 그들은 자신이 누구를 위해 싸우고 있는지 고민한다. 그들은 수송선이 수리되면 떠나온 곳으로 각자 돌아가야 한다. 모두 사상적 이념을 사명적 신념으로 착각했을 뿐, 막상 사색과 사유의 장이 주어지면 그들은 사상보다 사람이 먼저였다. 

    정치권을 보면 여전히 답답하다. 한쪽에선 ‘타파해야 할 적폐’라 하고, 또 다른 한쪽에선 ‘정치 보복’이라 하고. 영화 ‘남한산성’을 본 정치인들의 해석도 각자 처지에 따라 나뉜다. 그들이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를 관람한다면 어떤 해석을 내릴지 궁금하다. 혹시 아나. 그들에게 마법의 여신님이 강림하실지….

    음악과 극으로 승화된 해한(解恨)의 예술적 살풀이로 건강한 감정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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