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1

2013.11.04

맑고 깨끗한 곳에서만 피는 설상화

단풍취

  •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ymlee99@forest.go.kr

    입력2013-11-04 09: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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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고 깨끗한 곳에서만 피는 설상화
    하루하루가 너무 다르다. 봄 햇살 받고 태어난 신록과 여름의 짙푸름이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했는데 이제 단풍 빛이 완연하다. 이번 가을 단풍 빛은 유독 빠르게 무르익는다. 늦더위가 오래도록 머물러 가을이 늦춰지다 한꺼번에 휘몰아치는 형국이다. 매일 아침 만나는 광릉 숲의 풍광은 하루 자고 일어나 돌아보면 확 바뀌어 있다. 성큼성큼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그래서 또 아쉽다.

    사람들은 나무만 단풍이 드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풀잎에도 단풍이 들 수 있고 실제 들기도 하지만, 풀 대부분이 날씨가 조금 쌀쌀해졌다 싶으면 지상부가 사라져버려 낙엽이니 단풍이니 느낄 겨를이 없을 따름이다. 식물 이름에 단풍이 붙은 것이 여럿 있다. 먼저 당단풍, 중국단풍, 섬단풍, 설탕단풍 등 단풍나무 집안이다.

    그런데 단풍이 들지도 않으면서 이름만 빌려온 식물들도 있다. 돌단풍, 단풍마, 단풍제비꽃 등이 있으며 단풍취도 그중 하나다. 이들 식물들은 정말 식물학적으로 ‘단풍’ 현상이 일어나지도 않고, 단풍나무 집안의 계통식물학적 특징과도 무관하다. 다만, 잎이 단풍나무 잎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붙은 이름이다.

    단풍취는 국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공기 좋은 활엽수 숲에서는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주 오래전 대도시나 공단처럼 대기오염과 관련 있는 지역 주변의 숲과 오염과는 무관한 그야말로 청정지역 숲에 사는 식물들을 비교해본 적이 있다. 당시 깨끗한 지역에는 없고, 대기오염이 심한 지역에서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대기오염 지표종 같은 식물을 찾으려고 했는데 끝내 찾지 못했다. 반대로 공기가 깨끗한 지역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출현하는 식물을 발견했는데, 그 풀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단풍취다.

    그러니 단풍취가 발아래 펼쳐지는 숲길을 걷고 있다면 크게 기지개를 켜고 마음껏 숨을 쉬어도 좋다. 가을이라 단풍취가 떠올랐지만 어찌 보면 이 풀을 가을보단 여름 풀로 구분하는 이가 많을 듯하다. 꽃이 한여름에 피기 때문이다. 단풍잎을 닮은 잎사귀 틈에서 꽃대가 쭉 올라와 달리는데, 자세히 보면 아주 가느다란 설상화들이 개성 넘치게 피어 있다. 그러고 보니 천연림 속에 그토록 현대적인 감각의 잎과 꽃을 가진 단풍취가 자란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 멋지다.



    봄에는 어린싹을 나물로 먹는다고 하는데, 국화과 식물 대부분이 연하고 독성이 없어 먹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싶기도 하다. 한방에서 약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저런 문헌들을 살펴보니 단풍취는 산나물을 개발하는 연구에도, 식용기름 관련 연구에도 등장하고 있었다. 더욱이 항염증 작용을 비롯한 이 식물의 여러 약용 효과에 대한 연구 성과들이 나오고 있어 의약계의 주목을 받는다.

    단풍취는 괴발땅취, 괴발딱지, 장이나물, 좀단풍취 같은 독특한 별칭이 있다. 그만큼 예전부터 우리 곁에 있던 정겨운 식물이란 증거일 터다. 단풍 색깔에만 취해 있을 것이 아니라 단풍취처럼 단풍을 닮은 잎이 어떻게 가을을 나는지 관찰하는 일도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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