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그리움 노랗게 물들었나

진노랑상사화

  • 이유미 국립수목원 산림생물조사과장 ymlee99@forest.go.kr

    입력2013-09-30 10:4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가을의 그리움 노랗게 물들었나
    대지의 기운이 이미 서늘하다. 가을은 어느새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들어와 아릿아릿 서글픔마저 들게 한다. 세상 끝까지 갈 것 같던 뜨겁던 여름이 너무 급속히 밀려나간 허전함도 한몫하는 듯하다. 여전히 푸르지만 이미 빛이 바래기 시작한 숲 속에서 때 아닌 노란 꽃들이 눈에 보인다. 진노랑상사화다. 가을의 애잔함 때문일까. 지난여름부터 피기 시작한 그 꽃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상사화도 아닌, 진노랑상사화. 이름이 좀 생소하다. 연분홍빛으로 피어나는 상사화는 꽃이 필 때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때 꽃이 없어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사연을 담은 아름다운 꽃이다. 식물이 결실을 보는 데 필요한 인연의 두 주체는 꽃과 잎이 아닌 수술의 꽃가루와 암술머리지만, 형태적으로 볼 땐 잎과 꽃은 바늘과 실 같은 존재다.

    어찌 됐든 상사화는 한여름에 꽃을 피우고 이미 져버렸다. 알고 보면 우리 땅에서 난 자생 토종 꽃도 아니다. 반면, 상사화가 질 무렵부터 꽃을 피워 지금까지 만날 수 있는 진짜 귀한 우리 꽃이 바로 진노랑상사화다. 이름에서 이미 짐작했겠지만 꽃 색깔도 다르다. 진노랑색이라기보다 우윳빛이 아주 많이 섞인 은은한 노란색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꽃이 몇 포기씩 무리지어 피어난다.

    혹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어온 토종 우리 꽃 이름에 왜 외지에서 들어온 꽃의 이름인 상사화가 붙었는지 의아해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진노랑상사화는 우리 땅에서 자란 지 오래됐고,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 식물이다. 다만, 식물학자들이 이 꽃에서 기존 상사화와 다른 무엇이 있음을 발견하고 최근 새 이름을 붙여주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진노랑상사화뿐 아니라 주황색 꽃이 피는 백양꽃, 진한 주홍색 꽃을 피우는 꽃무릇(석산)이 모두 꽃과 잎을 동시에 볼 수 없는 상사화와 한 집안 식물이다.

    가을의 그리움 노랗게 물들었나
    이 집안 꽃들은 백합과 식물답지 않게 한쪽이 깊게 패이고 벌어져, 마치 부챗살이 펼쳐지듯 꽃이 피는 공통점을 지닌다. 주로 사찰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땅속에 있는 비늘줄기를 약으로 쓴다는 점도 닮았다. 이 비늘줄기에는 알칼로이드가 함유돼 있어 그냥 먹으면 독이 될 수 있지만 잘 쓰면 약이 된다. 해독, 가래 제거, 종기 치료는 물론, 소아마비 등 마비로 인한 통증에 예부터 처방해온 약재라는 점도 같다.



    여러해살이풀인 진노랑상사화는 꽃자루가 올라왔을 때 키가 가장 큰데, 다 자라면 60cm 정도 된다. 잎은 봄에 나왔다 지고, 느지막이 꽃대를 올려 그 끝에 큼지막한 꽃송이를 몇 개씩 사방으로 매단다. 성큼 다가선 가을바람에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다면, 영광 불갑사 같은 전라도 지방의 사찰을 찾아갈 것을 권한다. 지금쯤 그 주변에 가면 마지막 남은 진노랑상사화를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꽃이 질 무렵이면 다시 새로운 붉은색 꽃무리가 장관을 이룬다. 바로 석산이다. 이번 가을, 진노랑상사화를 보면서 그리운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