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8

2010.10.18

일부일처 고수한 순정파 사생결단 당쟁에 ‘골머리’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0-10-18 11: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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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일처 고수한 순정파 사생결단 당쟁에 ‘골머리’

    숭릉 정자각에서 본 능침. 멀리 능침의 석물만 살짝 보이는 것이 조선 왕릉의 특징적 조영 방식이다.

    숭릉(崇陵)은 조선 제18대 임금인 현종(顯宗, 1641~1674)과 원비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 김씨의 능으로 쌍릉 형식이다. 숭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 내 서측 능선의 남쪽에 유좌묘향(酉坐卯向·서측에서 동향하는 것)하고 있다.

    현종은 제17대 왕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장남으로 병자호란 이후 1641년(인조 19) 2월 4일 부모가 볼모로 잡혀 있을 때 중국 선양의 심관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현종은 조선의 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이력을 갖고 있다.

    현종은 어려서부터 기질이 특이하고 용모가 장대했다. 큰아버지 소현세자가 청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돌아와 원인 모르게 급서하자, 둘째인 아버지(효종)가 왕위에 올랐다. 덕분에 현종은 19세에 왕세자에 책봉돼 8년간 세자교육을 받았다. 1659년 19세에 효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15년 3개월간 통치했다.

    현종은 아버지 효종이 추진하던 북벌정책을 이으려 했으나 청의 국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정책을 바꿔 조선중화주의를 펼쳤다. 선조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약화된 조선 왕조의 지배 질서 확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군비 강화와 재정 구조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현종 통치기에는 외침이 없었으며 안으로 사회가 안정을 되찾아가는 평화로운 시대였다.

    또한 현종은 조선의 통치철학인 유교를 근거로 사찰을 규제하고 성균관을 번성시켰다. 예제를 중요하게 여겨 고려조의 모든 능을 수리하고 봉심하게 했으며, 송시열 등의 건의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를 종묘의 태조실에 합사하고 파릉했던 정릉(貞陵)을 추복하고 전례를 갖추었다. 이후 단종을 노산군으로 추봉하는 등 왕조의 슬픈 역사를 복권했다.



    그러나 너그러운 품성의 현종이 송준길, 송시열 등 성리학자를 편애한 것이 정국을 당쟁의 격론 속으로 몰아가 결국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예송논쟁이 펼쳐졌다. 예송논쟁은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 장렬왕후의 상복 문제를 놓고 충돌한 사건이다.

    예송론의 핵심은 장자인 소현세자와 차자인 봉림대군의 대우 문제였다. 인조의 장자였던 소현세자가 죽자 서모인 장렬왕후는 왕의 승하 때와 같이 장자의 예로 3년간 상복을 입었다. 이후 차남인 효종이 승하하자 적통을 이었으므로 장자의 예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남인의 주장과, 차남으로 등용됐으므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서인의 주장이 충돌했다. 결국 송시열 등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1년복으로 결정됐다.

    일부일처 고수한 순정파 사생결단 당쟁에 ‘골머리’

    (왼쪽)하늘에서 내려다본 숭릉 전경. 정자각의 팔작지붕이 돋보인다. (오른쪽)숭릉 정자각의 팔작지붕은 조선시대 왕릉 중 유일한 형태다.

    평화로운 시기에 집권했지만 정국 혼란

    그러나 15년 후 장렬왕후(자의대비)의 며느리 격인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맏며느리의 상으로 봐 기년복을 입느냐, 나머지 며느리 때로 봐 대공복(9개월)을 입느냐로 또 충돌했다. 현종은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아버지 효종과 자신의 왕위 적통성을 고려해 직접 기년복으로 정했다. 이처럼 오락가락한 현종의 결정이 서인의 반발을 샀고, 이 일을 계기로 남인이 집권했다.

    현종 시대의 예송논쟁은 임란과 호란 등 혼란스러운 시대를 거친 뒤 안정된 사회에 국가 통치철학을 반영하려 한 지나친 시대적 격론으로 해석된다. 즉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 간의 정권 주도권을 둘러싼 성리학의 이념논쟁인 것이다. 학문적 논쟁이 정치 쟁점이 되면서 현종 이후 환국(換局·집권세력이 급격히 교체되는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국왕과 신하가, 또 붕당끼리 서로 비판하는 정국의 혼란이 이어졌다. 현종은 재정적 부족을 메우기 위해 공명첩(空名帖)을 대량으로 발행해 신분제 해체를 가져오기도 했다.

    일부일처 고수한 순정파 사생결단 당쟁에 ‘골머리’

    전서로 쓴 숭릉의 비문. 전면에는 왕과 왕비의 묘호와 능호가 새겨져 있다. 후면에는 왕과 왕비의 출생과 즉위, 승하일, 능역 위치 등이 적혀 있다.

    명성왕후 김씨는 인조 20년(1642) 5월 17일 장통방(長通坊) 사제에서 태어났다. 1651년 10세에 세자빈에 책봉된 후 1659년 왕후가 됐다.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金佑明)은 진사 출신으로 종9품인 능참봉(康陵)에 있다가 딸이 중전으로 간택돼 하루아침에 정1품 청원부원군에 봉해졌다. 할아버지 김육은 서인과 대항한 세력의 영수였으며 사촌오빠 김석주는 남인과 제휴하기도 하고 남인을 제거하기도 하는 모략가였다. 그래서인지 김우명은 서인, 남인 등의 당론에 개의치 않는 과격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를 닮았는지 명성왕후는 머리가 좋았으나 성격은 감정적이고 거칠었으며, 아들인 숙종 때 조정 일에 관여해 비판을 받았다. 숙종 2년(1675)에 숙종의 이복 당숙인 복창군과 복선군이 궁녀를 건드려 아이를 낳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왕권에 대한 도전이며 종친의 문란이었다. 조정에서는 복선군을 처형할 것을 권고했으나 왕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는 종친의 신임을 얻기 위해 숙종을 불러들여 호통을 치며 대성통곡하고 협박해 당쟁에 끌려다니는 왕권을 종친의 힘을 빌려 확립하려 했다. 이 사건를 ‘홍수(紅袖·붉은 옷소매, 궁녀를 가리킨다)의 변’이라 한다.

    1674년 8월 현종이 어머니 인선왕후의 국장을 치른 지 두 달 만에 열이 심하게 올라 약제를 쓰고, 침을 놓고, 인삼차를 들게 하는 등 온갖 정성을 다했으나 열흘 후인 8월 18일 한밤중에 창덕궁 재려(齋廬)에서 승하했다. 현종의 상태가 위독하자 재려전으로 옮겨 임종을 준비했다. 임금은 하얀 겹모자에 하얀 옷을 입고, 하얀 평상에 부들자리를 깔고 하얀 요를 편 데 누워 하얀 이불을 덮은 채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있었고 세자(숙종)는 평상 아래서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복창군 등 종친은 옆에 있었다. 여러 신하가 하교를 물었으나 답변을 듣지 못했다. 이때가 현종 재위 15년으로 그의 나이 34세였다. 당쟁에 휘둘린 탓인가, 어머니의 상중(喪中)에 과로한 탓인가.

    중전인 명성왕후는 효종의 천장과 인선왕후 국상 때 너무 많은 비용이 들었다며 현종이 근심했음을 들어 현종의 능제를 간소화하고 국장 준비를 궐내에서 하며 해당 관청에 진배(進排)하지 말도록 했다. 상복도 간편하게 했으며 시어머니 인선왕후의 산릉 제례도 중지시켰다. 능지도 일부 반대가 있었으나 동구릉으로 결정했다. 석물은 민폐를 덜기 위해 아버지 효종의 초장지에 썼던 것을 쓰게 했다. 명성왕후의 독선과 정치력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따로 영악전을 짓지 않고 재궁을 잠시 정자각에 봉안케 해 백성의 노고를 덜었다. 정자각의 상량문도 쓰지 않도록 했다. 이때 조사기(趙嗣基)의 아들 조감(趙 ) 등이 영릉의 석물을 쓰는 것에 대해 “아버지가 먹다 남은 음식으로 아들의 제사를 하지 않는다”며 반대 상소를 했으나 송시열과 유생 등의 변론에 따라 어린 숙종은 그대로 행할 것을 명했다. 이때 공주들도 오례의 예에 따라 3년복을 입었다. 숙종은 돈화문에서 사배례를 하고 이별을 고했다.

    팔작지붕의 정자각 조선 왕릉서 유일

    일부일처 고수한 순정파 사생결단 당쟁에 ‘골머리’

    숭릉의 석물은 현종의 아버지인 효종의 영릉 초장지에 썼던 것을 다시 사용함으로써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주었다.

    숙종 9년(1682) 12월 5일 현종의 비 왕대비 청풍 김씨 명성왕후가 42세를 일기로 창경궁 저승전(儲承殿)의 서별당에서 승하했다. 명성왕후는 승하 이전에 자신 국장의 모든 절차와 부장품을 간소화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니 이를 통해 그녀의 성격을 가늠해볼 수 있다. 능호를 숭릉(崇陵)으로 한 것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崇禎帝’의 숭(崇)자를 딴 것으로, 친명배청 사상을 강조한 당시 조선의 북벌정책을 반영한다. 숭릉의 자리 잡기와 능원 조성 내용을 기록한 ‘(현종)숭릉산릉도감의궤’와 ‘(명성왕후)숭릉산릉도감의궤’가 서울대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에 남아 있어 능제 복원 및 관리 연구에 도움을 준다. 또한 1677년 능을 수리한 기록물인 ‘숭릉수개도감의궤’와 ‘숭릉지’ 등이 있다. 이런 기록물 덕에 이번 조선 왕릉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 진정성 확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선의 의궤(儀軌)는 5~8부가 제작되는데 임금(왕실)이 보는 어람용과 보관을 위한 분상용으로 구분한다. 분상용은 의정부, 예조, 춘추관, 적상산(지리산)에 나눠 보관했다. 이 중 어람용을 가장 정성껏 만들었다. 어람용 중 하나는 강화의 외규장각에 보관했으나 병인양요 때 약탈당해 지금은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나머지 분상본은 장서각과 규장각, 국립문화재연구소 등에 흩어져 있다. 일부가 일본의 국립도서관, 왕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루빨리 이들의 자료 정리 및 반환, 번역 같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능제 복원 및 관리 보존을 위한 진정한 진정성 확보가 가능하다.

    숭릉의 봉릉(封陵) 제도는 조부인 인조의 장릉(長陵)을 따르고, 석물은 아버지 효종의 영릉(寧陵)을 따르되 백성들의 폐단을 고려해 1년 전 현종이 자신의 아버지 능을 여주로 천장하면서 묻어놓았던(현 동구릉 원릉터) 것을 이용했다. 숭릉의 왕릉과 왕비릉은 모두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으로 연결돼 있으며, 각 능침 앞에 혼유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장명등과 망주석의 대석에는 할아버지인 인조의 장릉(長陵)의 것과 같은 화문(花紋)이 새겨져 있으며, 망주석의 세호가 뚜렷하고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문무석인은 옷 주름을 비롯해 얼굴의 이목구비가 입체적이지 않고 선으로 표현돼 있으며, 정자각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팔작지붕인데 이는 조선 왕릉 중 유일한 형태다. 정자각 정청(正廳) 양 측면에 반 칸 규모의 익랑(翼廊)이 덧붙어 있어 규모가 더 크다. 정자각 왼편에는 원형의 어정이 있다.

    일부일처 고수한 순정파 사생결단 당쟁에 ‘골머리’

    방지원도형으로 만들어진 숭릉의 연못. 철 따라 철새들이 찾아와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숭릉 능역 입구에는 좌청룡수와 우백호수 계류의 물을 모아놓은 지당(연못)이 있다. 지당의 형태는 음양오행설에 따라 조영된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으로, 이곳에는 철 따라 철새가 날아와 아름다운 경관을 만든다. 연지를 지나면 숭릉 우백호 끝자락에 고종 황제의 비인 명성황후의 초장지로 결정돼 공사를 하던 흔적이 있어 눈여겨볼 만하다. 만약 그곳에 조영됐다면 한글 이름이 같을뿐더러 조선의 왕비 중 정치적 장부의 기질을 가졌다는 점 또한 같은 명성왕후(明聖王后)와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역이 인접할 뻔했다.

    원래 동구릉에는 외홍전문 앞에 외금천교와 지당이 있었으나 1970년대에 사라져 아쉽다. 다행히 금천교의 아름다운 유물이 동구릉 영내에 보관돼 있어 복원이 가능할 듯하다. 복원하면 동구릉 능역의 원형을 찾고, 아울러 조선 왕릉 유일의 아름답고 웅장한 석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지가 도로 건너편에 방치돼 있다. 방지원도형인데 조선의 모든 왕이 태조의 건원릉 봉양 때 쉬었다 간 것으로 많은 기록에 나타난다. 연지도 복원해야 한다.

    현종은 명성왕후 김씨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제19대 숙종이다. 현종은 조선의 왕 중 일부일처의 원칙을 고수한 유일한 왕이다. 명성왕후와의 금실이 좋았던 때문일까? 아니면 명성왕후의 과격한 성격 탓일까? 숙종의 능호는 명릉(明陵)이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 지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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