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0

2013.08.12

아내가 첩자라니?

뮤지컬 ‘스칼렛 핌퍼넬’

  • 김유림 월간 ‘신동아’ 기자 rim@donga.com

    입력2013-08-12 1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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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평등이라는 희망을 품은 민중이 결전의 내일을 준비하던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웅장함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뮤지컬 ‘스칼렛 핌퍼넬’을 보고 조금 씁쓸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는 이 작품은 프랑스혁명 이후 귀족사회에서 시민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 즉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시민들은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자 “공화국 만세!”를 외쳤지만, 이내 지도자는 권력을 공고히 하려고 귀족, 예술가, 반대파 등 무고한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인다.

    ‘그렇다면 그들은 혁명에서 승리한 것인가. 여기서 선과 악은 무엇인가.’ 혼란스러워하는 관객 앞에 마침내 영웅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는 전형적인 영웅 모습이 아니다. 영국 귀족 퍼시는 실없는 농담이나 즐기며 레이스, 모자, 무도회에 관심 많은 한량이다. 그는 무고한 사람들이 단두대에 끌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친구들과 비밀결사대 ‘스칼렛 핌퍼넬’을 꾸린다. 퍼시를 비롯한 귀족들은 ‘스칼렛 핌퍼넬’ 대원임을 들키지 않으려고 사치를 부리고 얼빠진 척한다.

    이들이 프랑스인을 구하는 방법은 치밀하지 않다. 처형을 앞둔 단두대 주변에 거위를 풀어 난장판을 만들거나 꼽추인 척 소동을 벌여 군인들의 정신을 빼놓은 뒤 죄수들을 탈출시키는 수준이다. 이토록 문제해결 방법이 비현실적인 점은 작품에서 진지한 무게감을 덜어내려는 수단으로 해석된다.

    많은 궁금증을 풀려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바로 이 작품의 원작소설을 쓴 바로네스 오르치가 영국 남작 부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프랑스혁명이라는 극적 배경을 차용했을 뿐 결과적으로는 이 작품을 통해 귀족의 유머러스함과 모험심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태양 같은 왕과 귀족의 존재가 한순간 사라진 프랑스혁명기야말로 가장 극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있는 배경이 아닐까.

    이만하면 왜 프랑스 민중을 구하는 영웅이 영국 귀족일 수밖에 없었는지, 왜 혁명을 지지하는 프랑스 시민이 이토록 잔인하고 무능력하게 그려졌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스칼렛 핌퍼넬’은 당시 프랑스 귀족이 혁명군에 의해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던 영국 귀족들의 반감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화려하지 않지만 은은한 향기를 남기는 꽃 스칼렛 핌퍼넬처럼, 이 작품은 호탕한 유머 속에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퍼시는 아내 마그리트가 로베스피에르의 첩자라고 의심하면서 결혼식 날부터 아내를 경멸한다. 믿음이 없으면 사랑이 떠난다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사랑으로 믿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홀로 서서 각자의 마음을 표현하는 ‘내가 당신을 바라볼 때(When I look at you)’와 ‘그녀가 거기 있었네(She was there)’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빛나는 곡들이다.

    사실 ‘레미제라블’의 청년 마리우스와 앙졸라가 꿈꾸던 아름다운 미래가 고작 이런 건가 하는 마음으로 보면 허무할 수도 있다. 하지만 18세기 귀족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풍성하게 그린 작품이다. 또한 히어로 스칼렛 핌퍼넬의 통쾌한 활약상을 감안한다면 꽤나 볼만하다. 9월 8일까지, 서울 LG아트센터.

    아내가 첩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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