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1

2015.06.08

아, 흘러가버린 봄날이여

악극 ‘봄날은 간다’

  • 구희언 주간동아 기자 hawkeye@donga.com

    입력2015-06-08 10: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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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흘러가버린 봄날이여
    2003년 초연한 창작극 ‘봄날은 간다’는 기구하고 박복한 팔자를 가진 한 여인의 삶을 그린다. 배경은 황해도 어느 작은 마을 풍덕. 가위질 못지않은 입담으로 동네 제일가는 노총각 이발사 동탁은 마음씨 고운 처녀 명자와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이튿날 동탁은 “배우로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며 가출하고, 명자는 졸지에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와 고약한 시어머니, 폐병을 앓는 시누와 함께 생과부로 살게 된다. 쌍둥이 남매를 낳았지만 시어머니의 고집으로 어린 딸을 낳자마자 버린 명자의 가슴 한편에는 눅진한 죄책감이 내려앉는다. 모진 삶과 힘든 시집살이 속에서도 그가 웃을 수 있는 건 아들 범길 덕분. 그러나 월남전(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는다. 세월이 아득히 흘러 천신만고 끝에 명자는 동탁과 만나지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에 다시 마른 가슴을 태운다.

    그 시대 자체가 기구했던 걸까. 주요 인물들의 팔자는 하나같이 기구하다. 배우로 성공할 줄 알았던 동탁은 전쟁으로 절름발이가 돼 떠돌이 이발사로 삶을 이어가고, 명자는 삶에 볕이 들 만하면 운명이 심술을 부린다. 제목은 ‘봄날이 간다’지만 명자에게 ‘봄날’이 언제였나 싶을 정도다. 흔한 신파극이 될 법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은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다. 단장 역의 배우 윤문식과 동탁 역의 최주봉은 2003년 초연부터 작품에 참여했다. 올해는 정승호가 동탁 역에 더블 캐스팅됐다. 김성녀와 고(故) 김자옥의 뒤를 이어 명자 역에는 양금석이 캐스팅돼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한 많은 삶을 들려준다.

    아, 흘러가버린 봄날이여
    공연장에는 중·장년 관객이 많았다. 간간이 보이는 젊은 관객은 부모의 손을 잡고 객석으로 향했다. 보통 이럴 경우 예상되는 객석 분위기는 두 가지다. 지나치게 활기차거나,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거나. 공연 관람이 익숙지 않은 세대에게서 활기찬 반응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자발적으로 박수를 보내고 환호하는 관객들 모습에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어느덧 관객들은 명자의 처지가 돼 “아이고 저런” “쯧쯧” 같은 혼잣말을 되뇌었다.

    6·25전쟁, 분단의 아픔, 베트남전쟁 등 옛 세대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소재를 다뤘지만 젊은 관객에게도 부담스럽지 않다. 극 중 동탁이 선보이는 ‘이수일과 심순애’ 장면은 배우의 내공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이외에도 ‘갑돌이와 갑순이’ ‘청실홍실’ ‘차차차’ ‘서울의 찬가’ ‘꿈에 본 내 고향’ 등 중년층의 향수를 자극할 만한 노래들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이 시대 여인들이 순종과 인내의 아이콘인 명자의 삶을 들여다본다면 퍽 답답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힘든 것을 참고 살며 자식만 바라봐온 헌신적인 사람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6월 21일까지,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디큐브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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