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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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 아버지의 쓸쓸한 그림자

연극 ‘아버지’

  • 현수정 공연칼럼니스트 eliza@paran.com

    입력2012-09-17 10: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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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무게, 아버지의 쓸쓸한 그림자
    고전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감동을 자아내는 힘이 있다. 아서 밀러가 20세기 중반 발표한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도 그런 작품이다. 연극 ‘아버지’(김명곤 번안 및 연출)는 ‘세일즈맨의 죽음’ 속 배경을 현재 한국으로, 둘째 아들을 딸로 바꾸는 등 변화를 줬으나 원작 주제를 충실히 살렸다.

    아버지는 평생 한 회사에서 외판원으로 일했다. 물건을 팔려고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다. 과거에는 거래처도 많았고 꽤 ‘잘나가는’ 사원이었다. 그러나 거래하던 사람들이 차츰 세상을 떠나고 시대가 바뀌면서 아버지 처지도 달라졌다. 힘든 몸을 이끌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샘플을 싣고 가보지만, 허탕 치는 날이 부지기수다.

    아버지의 희망이던 아들은 과거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한 후 ‘삐뚤어졌다’. 농구 선수로 크게 성공할 수도 있었건만 일용직을 전전한다. 딸은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면서 겨우 용돈 벌이만 한다. 아내는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로 일생을 보낸 전형적인 주부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는 자꾸 정신을 놓는다. 그는 과거의 환상에 빠져, 말레이시아에 가서 돈을 벌자고 했던 형님과 대화를 한다. 혹은 한창 꿈에 부풀었던 시절 화목했던 가족과 담소를 나눈다. 평생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이 함몰돼가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평생을 바쳐온 회사에서 해고된다. 앞으로 가족을 부양할 길이 막막한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자기 목숨과 보험금을 맞바꾸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 옷에서 유서 대신 발견한 것은 마종기의 ‘며루치는 국물만 내고 끝장인가?’라는 시다. 국물을 다 내고 버려진 ‘며루치’가 다름 아닌 아버지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평생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순응하며 기계처럼 일한 아버지에게 장밋빛 미래는 없었다. 아들 역시 아버지의 기대 때문에 강박증을 갖고 살아온 희생자다. 자신도 모르게 물건을 훔치는 도벽 증상까지 보인다. 사회에서 강요하는 성공과 행복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이 이 가족을 불행으로 이끌었다.

    연극 ‘아버지’는 주인공이 악의적인 사회 환경에서 희생되는 ‘현대 비극’이다. 고전 비극의 영웅처럼 희생을 통해 사회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쓸쓸한 뒷모습을 남길 뿐이다. 그렇지만 가족을 위해 순교하는 아버지 모습은 또 다른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더욱이 친근한 아버지 캐릭터가 보여주는 진정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눈물을 쏟게 한다.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한없이 외롭고 쓸쓸한 존재. 자식에게 억압적인 것 같지만, 조금만 잘해도 뛸 듯이 기뻐하는 사람. 아내에게 호통 치거나 다른 여자한테 잠시 한눈을 파는 모습 등 단점도 보여준다.

    삶의 무게, 아버지의 쓸쓸한 그림자
    이 작품은 배우들의 연기로 정면 승부한다. 특히 아버지 역을 맡은 이순재, 전무송이 축적한 삶의 무게감으로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과정에서 흔들리지 않는 몰입 연기로 절제된 슬픔을 전달한다. 종종 플래시백이 이뤄지는 가운데 배우들이 과거와 현재의 시간 차이를 매끄럽게 보여준다. 진지한 가운데 적절한 유머도 곁들여 지루하지 않다.

    아버지 장재민 역으로 이순재와 전무송, 어머니 임선희 역에 차유경이 출연한다. 아들 역은 장은풍과 판유걸, 딸 역은 정선아가 맡았다. 이 밖에도 문영수, 고동엽, 계미경, 우지순, 권태진, 설현석 등 연륜 있는 배우를 다수 만날 수 있다. 서울 중구 이해랑예술극장, 9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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