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2

2005.09.13

자발적 유폐 9년 면벽 좌선

  • 입력2005-09-07 1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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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역(인도)에서 온 스님에게 공덕을 자랑하며 얼마나 복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왕(양무제)에게 “공덕이 전혀 없다”고 일갈한 달마 스님은 “진리는 없다”는 혁명적 말 한마디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가 간 곳은 깊은 산속 절. 후에 왕 무제는 달마가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부랴부랴 사람을 보내 그를 찾아보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경전에 따르면 달마 스님이 머문 곳은 숭산(嵩山)이라는 산에 있는 소림사(少林寺) 내 토굴이었다. 토굴 하면 으레 동굴 같은 것을 연상하지만, 먹고 자는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공간을 말한다. 달마 스님은 무려 9년 동안 이곳에서 면벽좌선을 한다. 나중에 그는 이 오랜 면벽으로 ‘벽관바라문(壁觀波羅門)’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다.

    그의 이 자발적 유폐는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이역만리에서, 그것도 목숨을 건 행로를 넘어 물설고 낯선 땅에 오로지 법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온 이국인(異國人)인 그가 왕과의 대화 한 번에 산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렸으니 말이다. 왕 생각이 저 수준이니 다른 사람들은 말해봐야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라는 허탈감이었을까, 아니면 진실로 ‘구하는 자에게만 법을 전하겠다’는 ‘아는 자’의 기개였을까.

    허탈감에서 비롯됐든, 기다림에서 비롯된 것이든, 달마 스님에게 9년 면벽세월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은 절대고독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포교를 위해 왔으면 경전을 번역하든지, 요즘 세상 같으면 자서전을 쓰든지, 아니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설법을 하든지 해서 세간의 관심을 끌겠다고 생각했으면 못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불법을 전하겠다는 애초의 목적조차 헌신짝처럼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이론이나 학문으로서의 불교의 한계, 그것을 넘어서는 지점에 있는 선불교의 근본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직답을 주는 일종의 퍼포먼스라고나 할까.

    달마 스님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이처럼 혁명가였으며 전위(아방가르드)였다. 달마 스님의 ‘면벽’은 언뜻, 가만히 벽을 보고 앉아 명상수행을 하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여기서 ‘벽’이란 사실 여러 가지를 상징하는 단어다.

    벽은 단절이며 분리이고 경계의 상징이다. 사방 벽으로 통제된 방은 고독과 유폐의 공간이다. 하지만 벽은 곧 허물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또한 일단 허물어지면 분리나 단절을 무색케 하는 밀물 같은 쏟아짐, 완전무결한 소통으로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달마 스님에게도 실제로 이뤄진다. 무려 9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그와 완벽하게 소통할 한 남자가 그의 앞에 등장하니 말이다(다음 주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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