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5

2001.08.02

정성으로 빚는 자존심 센 술

  • < 여행칼럼니스트 > storyf@yahoo.co.kr

    입력2005-01-14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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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으로 빚는 자존심 센 술
    ”음식으로 사람은 살아가지만, 음식으로 사람은 병을 얻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득선 씨는 술을 빚을 때면, 집안에 있는 아홉 대문(솟을 대문, 안큰대문, 일각문, 중문, 샛문, 사랑대문, 안대문, 쪽문, 월각문)을 모두 걸어잠근다. 목욕재계하고,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전화도 받지 않고, 대문 밖에서 누가 불러도 대꾸하지 않는다.

    똑같은 재료로 똑같은 비율로, 똑같은 노력을 들여 빚은 술이 어떨 때는 망치고 어떨 때는 잘되었다. 그게 이상해 곰곰 돌이켜보았더니, 술을 빚을 때 누군가와 이야기하면 꼭 탈이 났다. 그 사실을 나이들어 절감하였다. 그래서 그는 술을 빚을 때는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하고, ‘일구월심(日久月深) 지극 정성으로’ 술에 전념한다.

    어디 그뿐인가 술독도 손없는 방위에 놓아야 한다. 무진년이면 서쪽이 삼살방, 북쪽이 대장군으로 흉한 방위다. 그래서 남쪽과 동쪽에 술독을 두고 빚는다. 올해 신사년은 동쪽에 삼살방, 북쪽에 대장군이 있으니, 술독을 남쪽이나 서쪽에 둬야 한다. 그리고 술 빚는 날 일진을 봐서 손이 없는 방위를 다시 선택한다. 물론 동쪽과 북쪽은 배제한 상태다. 서쪽에 손이 있으면 남쪽에만 술독을 둔다. 이렇게 까다로운 절차 속에서 연엽주(蓮葉酒)를 빚는다.

    정성으로 빚는 자존심 센 술
    이득선 씨는 참판댁에 사는데 참판의 손자다. 할아버지는 조선 말엽에 이조참판을 지냈다. 벼슬은 이조판서까지 지냈으나, 일제가 섭정을 시작할 무렵에 오른 자리라 무시하고 참판을 고집했다. 참판 할아버지는 고종의 아들 이은을 가르쳤고, 일제의 섭정이 깊어지자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여 가난하게 살았는데, 고마움과 안타까움의 표시로 고종은 집을 하사했다. 집은 본디 70칸이었으나, 지금은 아홉 대문을 거느린 30칸 한옥으로 남아 있다. 비원의 낙선재를 본따 지었는데, 중요민속자료 제195호다.

    연엽주는 이 집에 5대째 가양주로 내려오고 있다. 연엽주와 그 한옥이 터를 잡은 곳이 외암리 민속마을이다. 충청남도 아산시 설화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인위적으로 조성하지 않고,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민속마을로 지정했다. 그래서 요란하게 보여주는 것 없지만, 가보면 정겹고 편안한 동네다. 돌담장 고샅길이 구비지고, 뒷산에서 타고내린 내[川]가 마을 앞을 감돌아 나간다. 마을 앞에 물레방앗간이 있고, 마을 안에는 한옥과 초가가 어우러져 있으며 연자방앗간도 있다. 원래 강씨와 목씨가 살았는데, 440여 년 전인 조선 명종(1534~1567) 때 장사랑 벼슬을 지낸 이연(李涎) 일가가 정착함으로써 예안 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정성으로 빚는 자존심 센 술
    이연의 후손인 이득선씨는 이 마을에 11대째 살고 있다. 그는 대학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러 낙향했다. 그때가 1970년대 초반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정 의례를 간소화하라며 장례 때 굴건 베옷을 입지 말고, 하얀 두루마기에 베헝겊 완장을 하라고 지시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씨는 벌금을 내더라도, 자식으로서 부모의 은공을 갚는 길은 굴건 베옷을 입는 것은 물론이요 시묘살이까지 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씨는 무덤 앞에 여막을 치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곡을 하며 3년상을 치렀다. 그 뒤로 이씨는 외암리를 떠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제사 때면 옛 법대로 술을 빚었는데, 제주가 문화재가 되고 나서는 자식들 학비나 마련할 겸해서 한 달에 한 독 정도 술을 빚는다. 그러니 술을 판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술이 있다고 알리지도 않는다. 마을 입구 어디에도 연엽주 안내 간판 하나 없다.

    참판댁 대문 옆에 도자기 술병 하나와 “대궐 연엽주 팝니다”고 적어놓은 게 전부다. 그것도 술에 거나하게 취해 한잔 더 마시려고 청하거나, 행실이 고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예 내주지 않는다. 돈 때문에, 사당까지 모시고 있는 집안을 술집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연엽주는 손수 빚은 누룩으로 빚는데, 쌀·찹쌀·연잎·감초·솔잎을 재료로 쓴다. 연잎은 처마 밑에 매달아 말려, 고두밥과 누룩과 함께 넣고 비빈다. 술 항아리에 연잎이 너덧 장 들어가는데, 세게 휘젓다 보면 찢어지고 둥둥 뜬다. 연잎을 구할 수 없는 겨울엔 연뿌리를 넣는다. 감초는 마지막에 댓 장 띄우는 정도다. 술은 겨울이면 20일 정도, 봄가을이면 14일 정도, 여름이면 7일 정도 숙성시킨다.

    정성으로 빚는 자존심 센 술
    술빛은 잘 익은 벼이삭 같고, 까놓은 알밤 같다. 첫맛이 침이 괼 정도로 새콤한데, 술이 오래되어 시큼한 것과는 다르다. 연잎 때문인지, 누룩에 들어가는 여러 재료 때문인지 맛의 근원은 좀더 음미해 봐야 한다. 단맛이 없고 뒤끝에 누룩내가 잡히는데, 단술을 싫어하는 애주가들에게는 편안한 술이다. 14도인 술의 새콤한 맛도 두세 잔째부터는 엷어진다. 한두 잔에 입이 적응하기 때문이다. 연엽주의 집안 유래는, 비서감승을 지낸 5대조 이원집 어른에서 시작한다.

    150년 전쯤에 3년 계속해서 가물었다. 비가 안 오니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굶주리는 사람이 늘어나고 민심도 흉흉해져 상소가 잇달았지만, 사대문 안은 태평성대였다. 조정에서는 아무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이원집이 근무하는 관청의 광에도 상소문이 쌓였다. 그러자 이원집은 암행어사를 불러 “여기서 아무거나 빼서 사실 여부를 조사해 보라”고 했다.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다. 삼정승한테 고했다. 그러자 삼정승은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어렵다 했거늘 어찌 우리 힘으로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이원집에게 임금님의 심기가 편할 때 직접 말을 꺼내보라 했고, 그러면 자신들이 거든다고 했다. 이원집이 백성의 어려움을 얘기하자, 임금은 대궐이나 사대부 집이나 할것없이 잡곡을 섞어 먹고, 반찬가지 수도 줄이라 했다. 당연히 수라상에도 술이나 유과, 식혜나 수정과, 떡은 올라올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정작 고민에 빠진 이는 이원집이었다. 그는 임금이 반주조차 못 드시게 된 것이 죄스러웠다. 그래서 도수가 낮아 음료에 가까운 술을 빚어 임금께 올렸다. 그게 대궐 연엽주였다고 한다. 그렇게 귀한 술이기에, 참판댁에서는 조상에게 바치는 제주로 빚어썼다. 집에 손님이 들더라도 누룩과 쌀로만 빚은 보통 약주를 내놓았을 뿐이다.

    이제 충청남도 무형문화재가 되었지만, 연엽주가 여전히 꽁꽁 숨어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이유를 알 만도 하다. 한옥과 초가와 돌담장 고샅길이 어울린 외암리에 가거든 그곳에 틀어앉은 자존심 센 술을 조심스럽게 불러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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