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9

2000.06.22

취해도 취해도 못잊을 그 맛이여

쌉싸름하면서도 독특한 신맛…비타민C 풍부한 고랭지 감자 원료 ‘한국식 보드카’

  • 입력2006-01-25 12: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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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해도 취해도 못잊을 그 맛이여
    곡주나 약주류는 10도는 넘고 20도는 넘지 않는다. 독하지 않기에, 먼저 코로 향내를 맡고, 입에 지그시 머금으며 혀로 온갖 맛을 다 감지하면서 목 안으로 흘려보낸다. 마시고 나서는 혀끝에 돌고 입안에 남은 뒷맛까지 새겨보는데, 이는 약주를 마시면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래서 약주는 서두르지 않고 운치 있게 마실 수 있는 술이다.

    이때 온갖 맛을 머금고 있어야 좋은 술이다. 시원하고 톡 쏘는 자극만이 아니라, 그 안에 시고 쓰고 달고 짜고 맵고 떫은맛이 모두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맛이 서로 섞이지 않고 잡스럽지 않아야 한다. 온갖 맛을 지니다니, 듣기에 좋지만 그게 쉬운 노릇은 아니다. 곰삭은 갈창젓이나 멸치젓이나 토하젓 따위가 그런 조건을 충족한 음식이랄 수 있겠는데, 너무 강렬하고 자극적이어서 술맛과 견주기가 어렵다. 맛이 깊이 배어서 온갖 맛이 은은하게 우러나는 음식으로는 술만한 게 없으니, 인간이 오래도록 가까이 해온 이유도 여기에 있을 터이다.

    오늘은 새로운 맛을 하나 추가하기로 한다. 아릿한 맛이다.

    강원도의 유명한 술, 서주(薯酒) 곧 감자술에 이 맛이 담겨 있다. 감자가 많이 나는 동네이니, 그것을 재료로 한 온갖 먹을거리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강원도 감자는 하지 감자가 아니고 5월에 심어 10월에 거둬들이는 가을 감자인데, 고랭지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퇴화가 덜 돼, 이듬해 씨감자로도 쓸 수 있을 만큼 품종들이 좋다. 이 감자들을 원료로 술을 만드는 곳이,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 5리에 있다. 감자술 공장이 드문 것은 그만큼 좋은 맛과 향을 얻기가 쉽지 않고, 고급 술을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일 터이다.

    감자를 원료로 한다고 하여 고급 술을 만들기가 어렵다는 말은 아니다. 러시아의 명주 보드카가 감자를 재료로 한 술이다. 아직 우리 기술과 연륜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지만, 비타민 C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서 땅속의 사과라고도 불리는 감자를 원료로 한 알칼리성 술은 오대산 남쪽 마을인 진부에서만 맛볼 수 있다.



    일요일 오전에 오대서주양조(0357-335-7608)에 들어서니, 마당 한구석에 술지게미를 말리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감자의 섬유질인데,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불땀이 좋아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서 말리는 중이라고 했다.

    작업장에 들어서자 수태한 흰 개가 통로에 한가롭게 누워 있고, 술에 취한 듯 볼이 발그레한 장년 사내가 손님을 맞았다. 그가 오대서주양조 대표인 홍성일씨였다. 고려대 정외과를 나와 ROTC 2기로 군대에 갔다온 홍사장은 70년대에 감자 전분 공장을 운영했다. 감자가 풍작을 이루면, 많은 감자가 폐기처분되었다. 버려지는 감자를 활용할 방법을 모색하다가 감자술에 생각이 미쳤고 촌로들에게 물어물어 80년대 중반에 감자술을 재현했다. 감자술을 제조한 것은 민속주 시판이 자유로워진 1990년부터였다.

    오전 이른 시간인데도 홍사장은 분주했다. 한창 나토(納豆)를 만드는 중이었다. 메주콩을 삶아서 특수한 균(Bacilius Subtilis)을 이식하여 발효시킨 식품이다. 일본 음식인데, 홍사장은 일본으로부터 라면을 처음 들여올 때에 누군가 품었음 직한 도전적인 심정으로 나토를 생산하고 있다고 했다. 나토는 알코올을 제거하는 성분이 들어 있어 술 안주로도 좋다고 한다.

    취해도 취해도 못잊을 그 맛이여
    홍사장의 아들은 병입 작업을 마친 감자술의 병목에 끈이 달린 상표를 일일이 걸고 있었다. 술도가는 가족 중심으로 이뤄지는 가내수공업의 규모였다. 아직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지 못하고, 어쩌다 눈에 띄면 한번 맛보는 술이어서 그런지 생산량이 많아 보이질 않았다.

    숙성실의 술독은 땅속에 묻혀 있어서 주둥이만 간신히 내밀고 있었다. 공기가 통하도록 뚜껑을 닫지 않았다. 담은 지 일주일이 못된 술독에서는, 기포가 간신히 올라올 정도로 약화된 부드러운 발효가 이뤄지고 있었다. 덧술이 만들어진 지 20일이 지나면 숙성이 완료되어 여과기로 넘어가게 된다.

    금방 여과된 술은 17도 가량 되는데, 한 모금 마셔보니 감자 성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이 지방에서는 ‘애키한’ 맛이라고 표현하는 아릿한 맛이 진하게 동했다. 쌉싸름하면서도 신맛이 강하게 도는데, 술이 입안에서 묵직하게 느껴졌다. 감자 70%와 흰쌀 30%가 들어가고, 감자와 흰쌀을 합한 분량의 20% 가량의 누룩이 들어갔다는데, 누룩 냄새는 강하지 않았다. 여과된 술에 물과 감미 재료를 섞으면 13도와 11도짜리 감자술이 만들어진다.

    예전에 강원도에서 빚어 먹던 감자술은 탁주였다고 한다. 감자밥을 지어서 엿기름을 넣고 당분으로 만든 뒤에 누룩을 섞어 발효시키면 막걸리처럼 탁하고 걸쭉한 술이 되었다. 그런데 홍사장은 탁한 성분이 밑으로 가라앉아 담황색의 맑은 술이 위로 뜰 때까지 숙성시킨 약주를 만들고 있었다. 오래 보관할 수 있고, 도수가 높고 맑은 술을 얻기 위한 변모였다.

    약주병을 들고 술도가를 나서니, 오대천이 바로 앞에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맑은 하천을 꼽으라면 이 오대천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오래도록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온 오대산 우통수에서 발원한 오대천은 정선 조양강을 만나기까지 30km를 산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취한 듯 흘러내린다. 앞서 홍사장도 굳이 진부의 물이 좋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은 것은, 지리적인 환경을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그랬을 터이다. 더욱이 진부에는 남한에서 제일 간다는 방아다리 약수가 있다. 북한의 삼방 약수와 함께 우리나라 으뜸으로 친다는 이 약수는 쇠맛과 사이다맛을 섞은 듯한 물맛이다. 그곳 방아다리 약수터의 잘 가꿔진 전나무 숲에서 술 한잔을 하는 것도 좋지만, 더 운치있는 곳은 오대천이 굽이 흐르는 물가에 우뚝 솟은 청심대다.

    청심대는 강릉부사와 청심이라는 기생의 사랑 얘기가 깃들인 곳이다. 청심은 정성껏 섬겨온 강릉부사가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던 날, 강릉에서 이곳 오대천까지 따라오게 되었다. 그런데 마지막 이별하는 순간에 청심은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벼랑 위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후로 청심대를 세워 그 넋을 기렸다고 한다. 청심대 곁에 우뚝 솟은 큰 바위 곁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니, 그 세월은 간 데 없고 더위에 지친 황소가 물가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 아래쪽에서는 한 가족이 한창 물속을 뒤지며 고기를 잡고 있는데, 물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데려오지 않고 청심대에 앉아 술을 마시려니 내 마음 한 구석이 감자술 맛처럼 아릿해져 왔다.

    이집 이맛

    자연산 나물이 ‘한상 가득’


    진부는 산골이라, 신선한 산채 백반집이 눈에 띈다. 진부에서 20년째 음식점을 해온 부림식당(0374-335-7576)의 최영희씨는 되도록 집에서 해먹는 음식 맛을 내려고 애쓴다. 간장 된장도 손수 담그고, 미원도 쓰지 않고 맛소금을 조금 넣어서 간을 맞춘다. 산채 백반에 나오는 나물들도 인근에서 캔 자연산이다. 신선초 더덕 고사리 취 밤버섯 표고버섯 도라지 개두릅 곰취 참나물 곤드레나물 등이 정갈하게 상에 오른다. 한두 사람이 가서는 미안한 마음이 앞설 만큼 1인분에 7000원 하는 산채백반 상이 걸게 나오는데, 북어조림 밴댕이젓 장조림 같은 해산물과 육류도 구색 맞춰 배려한 솜씨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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