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0

2015.03.23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섬진강 봄꽃

매화향에 취하고 벚꽃에 행복하고…쌍계사, 화엄사 숲길은 덤

  • 양영훈 여행작가 travelmaker@naver.com

    입력2015-03-23 11: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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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섬진강 봄꽃
    섬진강에 봄이 무르익었다. 한줄기 강바람에도 진한 매화 향기가 묻어난다. 섬진강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려야 비로소 한반도에 봄이 시작된다. 3~4월 섬진강은 봄꽃들의 경연장이다. 온갖 봄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난다. 매화가 절정에 이르는 3월 중순에는 산수유꽃이 꽃망울을 터뜨린다. 산수유꽃이 시들해지는 4월 초순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고, 벚꽃이 절정을 넘어설 즈음엔 배꽃이 만개한다. 그러니 봄날 섬진강에서는 두세 가지 봄꽃을 한 번에 감상하는 호사도 어렵잖게 누릴 수 있다.

    3월 둘째 주말 섬진강의 봄을 찾아 나섰다. 섬진강에서도 맨 먼저 봄을 맞이하는 경남 하동부터 들렀다. 하동 섬진강변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매화골이 여럿 있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남 광양 매화마을과 마주 보는 하동읍 화심 · 흥룡리를 비롯해 악양면 미점리, 화개면 부춘 · 덕은리가 모두 매화골이다. 볕이 좋은 하동 매화밭은 광양 매화마을보다 대체로 일주일쯤 앞서 꽃이 피기 시작한다.

    매향 좇다 평사리를 만나다

    양지바른 섬진강변의 매화나무는 이미 절정의 개화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강바람에 매화꽃잎이 우수수 흩날렸다. 때늦은 서설이 내리는 듯 몽환적인 풍경이 무시로 눈앞에 펼쳐졌다.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라는 시에는 섬진강의 봄날 풍경이 동영상처럼 그려져 있다.

    매화꽃 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푸른 강물에 날리는

    섬진강을 보셨는지요



    푸른 강물 하얀 모래밭

    날선 푸른 댓잎이 사운대는

    섬진강가에 서럽게 서 보셨는지요



    해 저문 섬진강가에 서서

    지는 꽃 피는 꽃을 다 보셨는지요

    산에 피어 산이 환하고

    강물에 져서 강물이 서러운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후략)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섬진강 봄꽃

    경남 하동군 악양면 무딤이들과 섬진강 물길이 장쾌하게 조망되는 하동고소성. 악양면 평사리의 ‘토지’ 오픈 세트장에 복사꽃, 홍도화, 앵두꽃 등 봄꽃이 만발해 있다. 지난해 사진이다. 파릇해진 대숲과 녹차밭 사이 ‘섬진강 100리 테마로드’를 홀로 걸어가는 트레커(위부터).

    무언가에 홀리듯 매향(梅香)을 좇다 보니 어느새 악양 무딤이들(평사리들)의 동구에 들어섰다. 고(故) 박경리 선생이 쓴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다.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말굽 모양으로 에워싼 무딤이들에도 봄기운이 내려앉았다. 이 들녘과 악양 일대 풍경을 제대로 조망하려면 ‘하동고소성’(사적 제151호)에 올라야 한다. 뒤로는 지리산의 굵은 산줄기가 우뚝하고, 앞으로는 섬진강 물길이 도도히 흐르는 산중턱에 하동고소성이 있다.

    하동고소성 가는 길은 악양면 평사리의 최참판댁과 멀지 않은 한산사에서 시작된다. 조붓한 산길을 20여 분쯤 올라 성벽 앞에 당도했다. 악양 무딤이들뿐 아니라, 지리산과 백운산을 헤집고 굽이치는 섬진강도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온다. 일망무제의 조망은 아니지만, 산과 들과 강이 한데 어우러진 풍광이 장쾌하기 그지없다. 이곳에서 능선길을 따라가면 철쭉 군락지가 있는 형제봉(1115m)에 오를 수 있고, 도중에 최참판댁 뒤편으로 곧장 하산할 수도 있다. 특히 진달래 피는 4월 초순에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고, 이 산길을 걸어 최참판댁으로 내려가기를 권한다.

    최참판댁은 너른 무딤이들과 유장한 섬진강 물길을 굽어보는 평사리 상평마을의 언덕배기에 자리 잡았다. 소설 ‘토지’ 속 최참판댁이 고스란히 현실의 공간으로 재현됐다. 전통한옥 14동으로 이뤄진 최참판댁은 조선 양반 주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주변에는 TV 드라마 ‘토지’의 오픈 세트로 활용된 초가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인위적으로 꾸며진 작은 민속촌 같기도 하고, 아득한 옛 고향에 들어선 듯한 정취도 느껴진다.

    무딤이들 한복판에 서 있는 부부 소나무와 근래 복원된 동정호를 주마간산하며 화개동천으로 향했다. 섬진강과 나란히 달리는 19번 국도변에도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강가에 늘어선 대숲과 녹차밭에는 파릇한 생기가 가득하다. 꿈결 같은 그 풍경 속을 유유자적 걷는 사람들이 적잖았다. 때마침 하동군과 광양시에서는 ‘섬진강 100리 테마로드’를 완공했다. 이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섬진강을 옆구리에 끼고 이어진다. 하동송림에서 평사리공원→남도대교→광양 매화마을→섬진교를 거쳐 다시 하동송림으로 되돌아오는 환상(環狀)의 100리 길이다. 총 41.1km 가운데 하동 구간의 20.9km는 걷기 코스고, 광양 구간의 20.2km는 자전거길로 개통했다.

    벚꽃에 취해 숲길을 걷다

    벚꽃철이 아닌데도 화개장터는 여전히 붐볐다. 화개장터가 자리한 화개면 탑리에서 쌍계사 초입까지 ‘십리벚꽃길’을 달렸다. 김동리 소설 ‘역마’에 ‘굽이굽이 벌어진 물과 돌과 장려한 풍경이 언제 보아도 길멀미를 내지 않게 하였다’고 묘사된 바로 그 길이다. 해마다 4월 초순이면 화개천 양쪽 길가에 늘어선 벚나무가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뜨린다. 그때마다 경향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화개동천 일대는 북새통을 이루곤 한다. 화사한 꽃그늘 아래 손잡고 걷는 연인이 유독 많은 십리벚꽃길은 ‘혼례길’이라고도 부른다.

    십리벚꽃길이 끝나는 쌍계사 동구에서 쌍계사까지는 울창한 숲길이 이어진다. 절 마당의 동백 고목들은 이미 염려(艶麗)한 꽃송이를 땅바닥에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삼법화상이 창건했고, 문성왕 2년(840)에 진감국사가 대가람으로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이 천년 고찰에는 국보 제47호로 지정된 ‘진감선사대공탑비’ 등을 비롯해 국가문화재가 많다. 하지만 유독 마음을 끄는 것은 지방문화재인 ‘쌍계사 마애불’(경남 문화재자료 제48호)이다. 고려시대 작품으로 보이는 이 마애불은 명부전 앞 큰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바위 한쪽 면을 움푹 파낸 뒤 여래 좌상불을 도드라지게 양각(陽刻)했다. 외모와 행색으로는 부처님이 아니라 스님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무념무상의 얼굴 표정이 압권이다. 두 손은 소매에 넣어 단정하게 끌어 모았고, 두 눈은 세상사에 무심한 듯 지그시 내려 감았다. 여태까지 봐온 그 어느 마애불보다 인간적이다.

    화개 십리벚꽃길은 원래 쌍계사 입구에서 끝나지만, 그 위쪽 칠불사 가는 길에도 벚나무 가로수가 늘어서 있다. 칠불사는 군불을 한 번 지피면 49일 동안이나 온기가 유지된다는 아자방(亞字房)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절정의 봄날에 1박 2일 짧은 일정으로 섬진강을 여행하려면 종종 조바심을 치게 마련이다. 워낙 가볼 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광이 아닌 여행이 되려면, 얼마쯤의 욕심과 미련은 과감히 떨쳐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전남의 광양 매화마을과 구례 화엄사를 지나칠 수 없다. 매화마을 청매실농원의 언덕에 올라 흐벅지게 핀 매화꽃 사이로 섬진강과 지리산을 한 번쯤 바라봐야 온갖 시름이 말끔하게 씻기는 듯하다.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섬진강 봄꽃

    전남 구례 화엄사에 있는 홍매화나무. 귀공자처럼 준수한 자태와 오묘한 꽃빛깔은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화엄사 홍매화앓이

    3월 중하순경 일부러 구례 화엄사를 찾는 것은 우리나라의 옛 매화나무 가운데 가장 매혹적인 홍매화나무를 보기 위함이다. ‘화엄사각황전’(국보 제67호) 옆에 서 있는 이 홍매화나무는 견줄 상대가 없을 정도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귀공자처럼 준수한 자태와 오묘한 꽃빛깔은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꽃잎이 붉다 못해 검은빛을 띤다 해서 ‘흑매’라고도 부른다. 인근 길상암 앞에도 수령 450년의 천연기념물(제485호) 매화나무가 하나 있지만, 이 홍매화의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뛰어넘지 못한다. 화엄사를 떠나온 뒤에도 한동안은 이 홍매화나무의 고혹적인 때깔이 눈앞에 어른거리게 마련이다. 그렇게 화엄사 ‘홍매화앓이’가 시작된다.

    여행정보

    ●하동 평사리공원 오토캠핑장 이용 안내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섬진강 봄꽃

    경남 하동 평사리공원 오토캠핑장의 봄날 풍경. 때마침 ‘섬진강 100리 테마로드’ 개통을 기념하는 ‘대한민국 알프스 하동 꽃길 걷기 대회’가 열렸다(위). ‘혜성식당’의 참게탕.

    섬진강은 모래가 많아 다사강(多沙江), 사천(沙川), 모래가람 등으로도 불렸다. 560여 리(약 220km)에 이르는 섬진강에서도 모래가 가장 많은 곳은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다. 평사리공원 앞 모래밭은 웬만한 해수욕장의 백사장보다도 넓다. 아이들과 함께 거닐고 뛰고 뒹굴기에 딱 좋다. 근래 평사리공원에는 총 52면의 오토캠핑장이 조성됐다. 화장실(3곳), 샤워장(1곳), 취사장(1곳), 배전반, 무선인터넷 같은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최상급 시설은 아니지만 강변 캠핑장으로서의 자연조건과 풍광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특히 물안개 피어오르는 섬진강 새벽 풍경이 인상적이다. 자동차 통행량이 많은 19번 국도와 맞닿아 있고, 낮에는 행락객과 트레킹을 하는 사람이 많아 조용하게 쉬기 어렵다는 점은 옥에 티다. 현재는 인터넷 블로그(blog.naver.com/y2mlee)를 통해서만 예약 가능하다(문의 : 관리소 055-883-9004).

    ●숙식

    평사리공원과 최참판댁이 있는 하동군 악양면에는 흙집풍경펜션(010-9980-3555), 산굽이펜션(055-882-2714), 머물고싶은집(010-4129-9505), 하동산수애펜션(010-4554-2951) 등의 펜션이 있다. 최참판댁 부근 한옥체험관(010-4747-9986)에서도 숙박이 가능하다. 화개장터에서부터 쌍계사 입구까지 십리벚꽃길 주변에는 한옥펜션 수류화개(055-882-7706), 가비원모텔(055-883-3699), 온천모텔사우나(055-883-9346), 화개송이펜션(010-8959-2360), 화개펜션(055-884-6673), 오즈펜션(010-2375-4814), 미루나무풍경펜션(010-9300-7734) 등을 비롯한 숙박업소가 즐비하다.

    십리벚꽃길 주변에는 소문난 맛집도 많다. 화개삼거리 부근 혜성식당(참게탕/ 055-883-2140)과 동백식당(은어회 · 재첩정식/ 055-883-2439), 쌍계사 입구 단야식당(사찰국수/ 055-883-1667)과 쉬어가기좋은날식당(산채정식/ 055-883-4375) 등이 맛집으로 꼽힌다. 순댓국밥과 토종순대가 맛있는 산호식당(055-883-2447)도 추천할 만하다. 악양면 소재지의 솔봉식당(055-883-3337)에서는 정갈하고 맛깔스러운 가정식백반을 내놓는다. 전남 광양 청매실농원(061-772-4066)에서는 매화가 피는 철에만 맛볼 수 있는 매실비빔밥이 별미다.

    ●가는 길

    1 남해고속도로 하동IC(19번 국도, 하동 방면)→하동읍내 우회도로→악양삼거리(직진)→평사리공원

    2 순천완주고속도로 구례화엄사IC(19번 국도, 구례 방면)→냉천교차로(하동 방면)→화개삼거리(직진)→평사리삼거리(직진)→평사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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