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6

2006.03.14

부귀권세 버리고 험난한 의리의 길

정몽주 살해한 조영규를 “만세의 흉인”이라 비판 … 조선에 협력 안 해 귀양살이

  •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입력2006-03-13 11:3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부귀권세 버리고 험난한 의리의 길

    바닷가 소나무에 둘러싸인 월송정.

    요즘이야 소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보기 어렵지만, 예전에는 말처럼 소도 타고 다녔던가 보다. 조선 초기 청백리로 알려진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해 그가 재상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맹사성보다 여덟 살 연상이자,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이행(李荇, 1352~1432)은 호가 기우자(騎牛子), 즉 소를 타는 사람이다. 당시 말이 귀해서 이행이 소를 탔던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조선 개국공신인 권근(權近, 1352~1409)은 이행의 소 타는 모습을 보고 “무릇 눈으로 만물을 볼 때 바쁘면 정밀하지 못하고 더디게 보아야 그 오묘한 데까지 다 얻을 수 있다. 말은 빠르고 소는 더딘 것이라 소를 타는 것은 곧 더디고자 함이다”라고 논했다. 권근이 20대에 쓴 글이니 이행은 이미 20대에 소를 즐겨 탔음을 알 수 있다.

    이행의 자는 주도(周道)다. 자(字)는 성년이 되면 갖게 되는 또 하나의 이름인데, 흔히 본명과 상통하게 붙여진다. 곧 이행의 이름과 자를 풀면 ‘여러 길을 두루 다니라’는 뜻이 된다. 만약 이행이 요즘 세상에 태어났다면 여행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울진 월송정에 이행의 시 남아

    이행은 이미 7세 때에 “천리마를 타고 천지간을 주유하겠다(我乘千里馬 周遊天地間)”는 포부를 밝혔다. 그의 시문을 정리한 ‘기우집(騎牛集)’을 봐도 금구(김제시 금구), 금성(나주), 부안, 진보(청송군 진보), 이천(강원도 이천), 청하(영일군 청하), 고창, 우봉(황해도 금천) 등의 지명을 제목에 넣은 시가 눈에 띈다. 그는 또한 물맛을 잘 변별할 줄 알아서 “충청도 달천의 물이 제일이고, 한강 한가운데를 흐르는 우중수(牛重水)가 둘째이며,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의 맛이 셋째”라고 평하기도 했다. 세상을 많이 주유한 뒤라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 셈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0여년이 지났건만, 행복하게도 그를 기억하고 그를 주인으로 삼는 명소가 있다.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남단에 위치한 울진 월송정이다. 월송정과 관련해서는 경기체가 ‘관동별곡’을 지은 안축(安軸, 1287~1348)의 시가 있고 숙종의 어제시(御製詩)까지 전해오지만, 이행이 지은 시 ‘평해 월송정’이 바다를 향한 정자의 중앙 상단에 걸려 있다.



    “동해의 밝은 달이 소나무에 걸려 있네(滄溟白月半浮松)/ 소를 타고 돌아오니 흥이 더욱 깊구나(叩角歸來興轉濃)/ 시 읊다가 취하여 정자에 누웠더니(吟罷亭中仍醉倒)/ 선계의 신선들이 꿈속에서 반기네(丹丘仙侶夢相逢).”

    이 시 현판 옆에는 순찰사로 내왕했던 김종서(金宗瑞, 1390~1453)의 ‘백암거사찬(白巖居士贊)’이 걸려 있다. 김종서는 그 글에서 “해상의 푸른 소나무와 같이, 소나무 위에 걸린 밝은 달과 같이, 선생의 기백과 절의는 천추만세에 이르도록 빛날 것이라”고 했다.

    백암은 이행의 또 다른 호다. 월송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백암온천이 있는데, 백암온천이 기댄 산이 백암산이다. 이행은 백암산 기슭의 날라실(飛良縣)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다. 월송정에서 10리쯤 떨어진 마을인데, 어머니 평해 황씨의 고향이라 이곳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이후 기회가 될 때마다 내려와 지냈다. 달밤이면 소를 타고 월송정까지 노닐러 가던 곳이기도 하다.

    이행의 후예들

    이주형(제헌의회 의원), 이우성(퇴계학연구원장), 이운성(시인), 이성림(우성I&C 회장), 이희국(LG전자 사장), 이긍희(전 MBC 사장), 이배영(전 서울 은평구청장), 이완구(한나라당 충남도지사 예비후보), 이성순(영주FM방송 본부장), 이희수(한양대 교수)


    부귀권세 버리고 험난한 의리의 길

    ①밀양 산외면 엄광리 재궁동에 있는 단향비. 이행을 중심으로 그의 조부, 손자의 관직과 이름을 새겼다. ② 밀양강이 내려다보이는 금시당과 백곡서재. ③ 평해 날라실 마을의 성황당. 동제를 지내기 위해 정리를 하고 있다.

    그가 소를 타고 노닐던 정경을 당시 고려에 머물던 일본 승려 석수윤(釋守允)이 ‘월하기우도(月下騎牛圖)’에 담아놓았고, 그 그림을 보고 권근과 성석연(1357~1414)은 시를 짓기도 했다. “…소 등에는 시인이 실려 있구나(牛背載詩人)/ 마을은 궁벽하다 청산은 첩첩(村僻山千疊)/ 한 바퀴 달이 둥실 물에 비치니(波明月一輪)/ 흰 갈매기 더불어 마냥 친하니(白鷗相與狎)/ 호탕한 것 누가 있어 길들였더냐(浩蕩有誰馴)”고 권근은 노래했다.

    후손들, 음력 10월10일마다 제사

    이행은 17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 시험관이 이색(李穡, 1328~1396)이어서 평생 사제 관계를 맺게 됐다. 그래서 이색이 탄핵을 받을 때에 그는 이색을 지지했고, 그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풍류도 있었지만 의리도 있던 사람이었다. 정치·외교적인 능력도 좋아, 제주에 건너가 성주(星主) 고신걸(高信傑)을 설득하고 그 아들을 데리고 와서 비로소 제주를 복속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조영규(趙英珪, ?~1395)가 정몽주를 살해하자 “만세(萬世)의 흉인(凶人)”이라고 대놓고 비판했고, 고려가 망하자 “서쪽으로 수양산을 바라보아, 주나라 곡식을 어찌 차마 먹으랴”며 두문동에 들어갔다.

    그는 조선에 협력하지 않아 평해 월송정 마을로 귀양 가기도 했는데, 말년은 주로 집안 별장이 있던 황해도 강음 예천동에 칩거했다. 그와 시문을 주고받던 친구였던 권근·성석린·성석연 등은 개국공신으로 조선에 합류했지만, 그는 그들과 원수지간이 되지 않으면서 지조를 지켰다. 아들에게도 “신왕(新王) 또한 성인(聖人)이다. 너는 나와 처지가 다르니 모름지기 잘 섬겨라”고 했는데, 그 말을 좇아 아들 척()은 직제학까지 올랐다. 이행은 천수를 누려 81세까지 살다가 황해도 금천군 설봉산 아래에 묻혔다.

    이행의 후손들은 남북이 분단되어 성묘를 할 수 없게 되자 경남 밀양에 이행의 조부부터 손자까지 5대를 함께 모신 단향비(壇享碑)를 마련하고 음력 10월10일이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밀양은 이행의 고손자인 이사필(李師弼)이 연산군 때에 어지러운 정국을 피해 처가 동네로 내려와 살면서 여주 이씨 집성촌이 된 곳이다.

    밀양강 가에는 아름다운 정자가 많은데 월연정은 이행의 6세손인 월연 이태(李)가 주인이고, 금시당은 이행의 7세손인 이광진(李光軫)이 주인이다. 밀양강과, 새로 뚫린 대구-부산 간 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금시당에는 백곡서재가 있다. 백곡서재는 백곡공 이지운(李之運, 1681~1763)을 기려서 지은 건물인데, 이지운은 임진왜란 때 무너진 금시당을 복원하고 ‘철감록(感錄)’을 편찬했다. ‘철감록’에 실린 이행의 글과 자료를 여주 이씨 문중에서 1872년에 따로 편집한 책이 ‘기우집’이다. 기우집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두문동 현인들의 명단을 72명으로 처음 확정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필자가 지금에 이르러 두문동 72현을 찾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알 림

    。다음 호에는 ‘창녕 성씨와 성사제’에 관한 글이 실립니다.
    。두문동 72현에 얽힌 얘기를 간직하고 있는 문중과 후손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휴대전화 016-341-5045, e메일 twojobs@empal. com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