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3

2006.02.21

태조가 내린 벼슬 다섯 차례 거절

판서·좌의정으로 유혹해도 ‘불사이군’ 불변 … 후손들이 뜻 기리는 전시관 건립 추진

  •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입력2006-02-20 1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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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가 내린 벼슬 다섯 차례 거절

    고려 벽화가 출토된 박익의 묘.

    송은(松隱) 박익(朴翊, 1332~1398)을 기리는 사당으로 경남 청도의 용강서원, 밀양 덕남사, 산청 신계서원, 거제도 송령사가 있다. 후손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에 그의 사당이 있는데, 독특한 것은 그 사당에 모두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박익의 후손인 박대성 화백이 그린 초상화로 통일됐지만, 그 이전에는 비슷하지만 제각기 다른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사당엔 위패만 모셔져 있기 쉬운데 박익의 경우처럼 초상화가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묘사한 화상시(畵像詩)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화상시는 박익과 동시대에 살았던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그리고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초상화를 보고 정몽주가 먼저 운을 뗐다. “긴 수염 십 척 장신 잘도 그렸네(畵出長髥十尺身)/ 볼수록 두 얼굴이 참으로 똑같네(看來尤得兩容眞)/ 세상 이치가 자취 없다고 말하지 마소(寞言公道無形跡)/ 죽어도 죽지 않은 사람 되겠네(死後猶存不死人).” 정몽주는 박익과 박익의 초상화를 나란히 보고서 이 시를 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자리에 길재와 변계량도 함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정몽주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다. “봉황의 눈, 범의 눈썹, 십 척 장신에(鳳目虎眉十尺身)/ 담홍 반백의 두상이 참으로 똑같네(淡紅半白兩相眞)/ 그림으로 선생 얼굴 살펴보니(畵圖省識先生面)/ 그림 속에도 죽지 않을 정신 그려져 있네(不死精神影裏人).” 이렇게 읊은 길재는 박익보다 21살이 어려서 박익을 선생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밀양 한 동네 출신으로, 아들의 친구이기도 했던 변계량은 “풍후한 얼굴 덕스러운 몸매(豊厚形容德有身)/ 아무리 보아도 하늘이 내린 분이네(看看優得出天眞)/ 눈 덮은 긴 눈썹, 무릎에 드리운 수염(眉長過目髥垂膝)/ 그림과 사람 마주해도 분별하기 어렵겠네(兩對難分影外人)”라고 묘사했다.

    정몽주와 학문 교류, 이성계와 전장 누벼

    초상화를 그리고, 그 초상화를 보고 시를 짓는 흥미로운 풍속도가 고려 말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정몽주와 길재가 보았던 박익의 초상화는 언제 소실됐는지 알 수 없다. 훗날 박익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이 세워질 때마다 이 화상시를 근거로 새로운 초상화가 그려지고, 영정 봉안문(奉安文)까지 마련됐다.

    Tips



    밀성은 밀양의 옛 이름이다. 밀성 박씨와 밀양 박씨는 같은 이름이지만, 송은공파는 시조 밀성대군의 이름을 좇아 본향을 밀성으로 사용하고 있다.


    태조가 내린 벼슬 다섯 차례 거절

    송계마을에서 가까운 후사포리에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 박익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심었고, 이 은행나무에서 한 자씩 따서 밀성 박씨 은산파와 행산파가 생겼다.

    박익은 1332년에 태어나 1352년(공민왕 2) 이색(李穡), 박상충(朴尙衷)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다. 나이로는 이색보다 네 살 어리고, 이성계(李成桂)보다 세 살, 정몽주보다 다섯 살이 많았다. 박익은 문인이었지만, 이성계와 함께 전장에 나가 남으로 왜구를, 북으로 홍건적과 여진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벼슬은 예문춘추관과 직제학을 지냈으며 고려가 망하던 해에는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박익이 예조판서를 지내기 전, 고향인 밀양 땅 송계마을(현재의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송악마을)에 은둔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정몽주가 이곳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정몽주에게 건넨 시가 있다. “송계마을 숨은 선비 집을 찾아오셨소(來訪松溪隱士家)/ 석양에 문은 닫혀 있고 꽃이 지는데(夕陽門掩落花多)/ 술통 앞에 두고 나의 깊은 마음을 묻는가(樽前問我幽閑意)/ 주렴 밖에 반쯤 보이는 저 청산이 내 마음이라오(簾外靑山半面斜).”

    정몽주가 타살되고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열자, 박익은 또다시 송계마을로 내려오고 만다. 뒷산이 송악(松岳)이고, 마을이 송계(松溪)인 것은 송도(松都, 開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성계는 전장에 함께 나섰던 박익에게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연달아 내리며 조정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하지만 박익은 눈멀고 귀 멀었다는 핑계를 대며 태조가 내린 교지와 예관을 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마지막에는 좌의정을 내렸으나 역시 나서지 않았다. 다섯 번 불렀어도 한 번도 나서질 않아 ‘오징불기(五徵不起)’라고 하는데, 그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고려를 향한 충절을 지켰다.

    태조가 내린 벼슬 다섯 차례 거절

    박익의 묘 남쪽 벽에 그려진 벽화.

    그는 네 아들에게 남긴 유언에서 “나는 왕씨의 혼령으로 돌아가거니와 너희들은 이씨의 세상에 있다. 이미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으니 온 힘을 다해 충성을 하라. 선천과 후천으로 부자간에도 시대가 달라졌다”며 조선에 충성할 것을 당부했다. 박익의 후손들은 이 유언 때문에 조선시대에 집안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박익은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화악산 자락에 묻혔다. 묏자리는 경남의 최고 명당으로 꼽힐 만큼 활달하다. 묘는 사각형으로 고려 양식을 띠고 있고, 돌단이 둘러져 있어 웅장하다. 이 때문에 두 차례나 도굴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2000년 9월 두 번째 도굴꾼이 지나간 뒤, 동아대 박물관 주관으로 무덤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이때 고분벽화와 지석, 혼유석 등이 출토돼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밀성 박씨 송은공파 박익의 후예들

    박태준(전 국무총리·포스코 명예회장), 박숙현(전 국회의원), 박재규(전 통일부 장관·경남대 총장), 박판제(초대 환경부 장관), 박철언(전 국회의원), 박종구(삼구그룹 회장·고려대 교우회장), 박번(동양강철 회장), 박치현(흥아상사 명예회장), 박영석(전 국사편찬위원장), 박영관(세종병원 원장·이사장), 박성상(전 한국은행 총재), 박대성(화가), 박중훈(영화배우), 박한제(서울대 문리대 교수), 박영진(경남지방경찰청장), 박판현(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 사무총장), 박희학(송은공파 총무), 박종탁(박씨문화원 원장)


    박익 무덤에서 고분벽화 등 출토

    고려 말 고분벽화는 존재 자체가 아주 드물다. 천장과 북쪽 그림은 지워지고, 동·서·남쪽 그림은 훼손된 상태지만 빼어난 솜씨를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정도로 남아 있었다. 매화와 대나무가 그려진 동쪽 벽에는 머리를 땋아 올린 세 명의 여자가 손에 찻상과 그릇을 든 채 걷고 있고, 역시 나무가 그려진 서쪽 벽에도 네 명의 남녀와 술병을 들고 있는 한 여자의 그림이 있다. 남쪽 벽에는 슬픈 눈망울을 한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두 남자가 있다. 고려시대 생활상을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풍속화인 셈이다. 무덤은 다시 덮여 긴 잠에 들어갔고, 벽화는 2005년 2월에 국가문화재 사적 제459호로 지정됐다.

    밀성 박씨 송은공파 문중에서는 미려한 고분벽화가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120자의 입지잠(立志箴)과 168자의 지신잠(持身箴)을 저술한 송은 박익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벽화묘 전시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600년이 지났건만,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송은 박익의 삶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알 림

    *다음 호에는 ‘단양 우씨와 우현보’에 관한 글이 실립니다.
    *두문동 72현에 얽힌 얘기를 간직하고 있는 문중과 후손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휴대전화 016-341-5045, e메일 twojobs@empal.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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