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5

2005.12.20

‘광주의 혼’ 된 원나라의 명문가

공민왕 때 고려에 정착한 뒤 충성 다해 … 역성혁명 후 자식들에게 ‘불사이군’ 유언

  •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입력2005-12-14 15: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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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의 혼’ 된 원나라의 명문가

    광주 진월동에 있는 정광 묘역. 정광은 이 산자락에 띠집을 짓고 살았다.

    광주광역시는 오래된 도시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광주읍으로 승격되면서 승승장구한 신흥 도시다. 전라도라는 말을 낳게 한 전주나 나주에 가면 오래된 동헌이나 문루가 보이지만 광주에는 눈에 띄는 게 없었다. 그저 무등산 아래 신작로가 놓였고 사람들이 바쁘게 사는 도회지일 뿐이었다.

    그런데 두문동 72현을 찾아나서면서 이런 판단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번화가로 변한 광주시 남구 진월동에 가면 616년 전에 터를 잡은 기념비적인 공간이 있다. 하남(河南) 정씨(程氏)의 시조, 정사조(程思祖)의 2세인 정광(程廣)이 은거했고, 묻힌 땅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사조는 원나라 사람으로 1351년 12월에 고려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공주를 모시고 개경에 들어온 인물이다. 그는 노국공주를 보필하면서 어사대부(御使大夫, 관리의 감찰 업무를 맡는 관청의 정삼품 벼슬)를 지냈고, 훗날 공신으로 책봉되어 정일품인 삼한삼중대광(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되었다.

    정광의 10대조가 성리학의 창시자

    ‘광주의 혼’ 된 원나라의 명문가

    정광 묘역 어귀에 세워진 신도비.

    그를 따라온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정도(程度)는 오부부사(五部副使)를 지냈지만 후손이 없어 대가 끊겼고, 둘째 아들 정광은 아버지를 따라온 직후인 135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중성(殿中省, 왕실 살림을 관장하던 부서)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고려 땅에 순조롭게 안착하는가 싶던 정씨 집안은 공민왕이 살해되고, 우왕·창왕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다시 한번 변화를 겪었다. 정광이 벼슬을 버리고 전라도 광주에서 서남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금당산 자락(지금의 진월동)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정광은 이미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는 충실한 고려의 신하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일찍이 고려가 번성한 날 엔/ 온 세상이 고려의 신하였는데/ 어찌 고려가 쇠잔할 줄 알았으랴/ 온 세상이 고려의 신하가 아니네”라고 세상을 한탄했다.

    정광이 광주까지 내려오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아내가 광산(光山, 광주광역시 광산구) 이씨여서, 처가 동네 근처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물가에 터를 잡고 띠를 베어 산수간에 집을 짓고” 살면서, 때로 무등산 정상 서석대에 올라 송도를 그리워했다.

    서석대의 푸른 봄을 좋아하네(瑞石靑春也自好).송악에 있던 나를 누가 데려왔나(雖將松岳舊顔來).한 번 눈물에 또 한 번 통곡하네(一回含淚一回哭).물과 산골짜기 우울한 회포를 삼키네(水咽出溪鬱此懷).

    ‘광주의 혼’ 된 원나라의 명문가

    무주 도남사 사당에 모셔진, 중국에서 건너온 정향·정도·정이의 영정(왼쪽). 도남사의 운치 있는 벽화 앞에서.

    ‘등서석음(登瑞石吟)’이라는 정광의 시다. 백제 가요 무등산가(無等山歌)는 가사가 전해오지 않으니, 무등산을 소재로 한 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걸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정광은 역성혁명에 편승하여 조선 왕조로 스며들지 않고, 외진 산간으로 스며들어 버렸을까? 더욱이 연고도 없는 자식들에게까지 훈계하는 계자시(戒子詩)를 남겨, “너 또한 고려조의 신하이거늘/ 어찌 새 임금을 섬기랴/ 만약 신하 된 도리를 안다면/ 전조의 임금 은혜를 잊지 마라”고 했다. 이 유언 때문인지 하남 정씨 집안에서는 국가적인 변란인 임진왜란 때 화순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순국한 정득운(程得雲), 정득원(程得元) 형제가 공신으로 책봉될 때까지 크게 이름을 얻은 이가 없었다.

    정광이 의리를 지킬 수 있었던 힘은 그의 집안 내력에서 나왔다. 하남 정씨인 정광은 본관이 중국의 하남성으로, 송나라 수도였던 낙양(洛陽, 하남의 옛 이름)에 그의 선조가 살았다. 정광의 10대조가 바로 이천부자(伊川夫子)인 정이(程)인데, 정이는 그의 형 명도부자(明道夫子) 정호(程顥)와 함께 성리학을 창시한 걸출한 인물이다. 주자가 뒤이어 정호와 정이의 학설을 집대성하면서 성리학이 완성되는데, 이들의 성(姓)을 따서 성리학을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부른다. 성리학, 즉 정주학은 한반도에서 고려 말부터 통치이념으로 뿌리내리게 되는데, 하남 정씨는 정주학과 더불어 한반도에 뿌리내린 집안인 셈이다.

    정광은 당시 불교를 숭상하고 복(福)을 구하는 시대 풍조를 보고 “나의 가문은 이천부자와 선조(先祖)로부터 불도(佛道)를 쓰지 않거늘 내 어찌 저 무리를 존숭하고 믿겠는가”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그는 예(禮)와 윤리, 도덕을 중시하는 정주학의 근본에 충실하여 고려 충신으로 남고자 한 것이다.

    정광의 지조, 5월 광주정신과 어울려

    세월이 흘러 1616년에 좌의정 이정구(李廷龜)와 공조판서 유간(柳澗)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신종(神宗)으로부터 정주학을 창시한 정호, 정이 형제와 그의 아버지 정향(程珦)의 초상화를 받아 왔다. 신종이 고려에 귀화한 하남 정씨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후손에 전하라고 준 것이었다. 하지만 후손을 찾지 못하고, 유간의 후손이 가보로 간직하다가 1865년에 무주에 살던 정씨 후손을 찾아 전하게 됐다. 정씨 집안에서는 지역 유림들과 함께 전북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 정천변(程川邊)에 사당 도남사(道南祠)를 짓고, 그 초상화를 모시게 되었다.

    하남 정씨 집안에서는 봄에는 광주 진월동 정광의 묘소에서, 가을이면 도남사에서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도남사는 그림 솜씨 좋은 후손이 낙향해 살면서 정갈하게 가꾸고 있는데, 광주 진월동 묘역 사당은 방치되어 황폐한 상태였다. 주변에 아파트 숲이 들어서면서 아파트부녀회에서 무덤을 옮겨달라는 민원을 넣고, 민원에 약한 지자체장들이 이를 옮기겠다고 공약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600년을 이어온 강원 정선의 거칠현동은 석회암 광산으로 파괴돼 뒤늦게 후회하더니, 광주의 역사를 증언하는 두문동 72현의 공간인 정광의 은거지는 바야흐로 아파트촌에 집어먹히려 하고 있다. 무등산의 푸른 봄을 사랑했고, 충절과 의리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던 건천(巾川) 정광의 정신이야말로 5월 광주의 정신과 다르지 않거늘, 이를 뽑아내려 하다니 서푼어치 역사의식도 없는 부끄러운 행위다.

    오히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로 진월동을 지켜준 정광을 기려서, 아름다운 공원을 만들어 그의 뜻을 오늘에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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