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3

2005.09.20

잊혀진 충신들의 발자취를 따라

이성계 역성혁명 반대해 ‘두문동’서 은거하다 탄압 … 철종·고종 때 문헌에 ‘72현’ 언급

  • 허시명/ 여행작가 www.walkingmap.net

    입력2005-09-14 1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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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땅 개성에 한국의 공단이 들어서고 곧 관광도 허락된단다. 500년 고려의 수도였던 그 개성 땅에 은둔의 현인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고사를 만들어낸 두문동(杜門洞) 72현이다. 주간동아는 역사에 가리어진 은둔의 현인들을 찾아 긴 여정을 떠나기로 했다. 편집자 주
    잊혀진 충신들의 발자취를 따라

    조선 왕조가 고려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마련한 숭의전 전경.

    우리는 우리 안에 영웅을 만들어낸 경험이 별로 없다. 우리를 세상의 중심이라 자처한 적이 없고, 공맹(孔孟)으로 대표되는 중화사상에 사로잡혀 영웅이나 성현은 모두 중국에서 나는 줄로만 알았다. 지금도 미국 중심의 사고방식이 강해 미국에서 출세해야 한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기가 쉽다. 쉬운 예로, 아무리 한국 프로야구에서 난다 긴다 해도 박찬호의 공 하나보다도 위력이 못하다. 한류 열풍의 주인공들도 한국보다는 외부에서 재해석되어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장사하는 사람들도 외국에서 히트를 친 뒤에 국내 시장에 소개되는 것이 물건 팔기 수월하다는 얘기를 한다. ‘금의환향(錦衣還鄕)’이란 말도 있는 걸 보면 제 동네에서 출세하기는 난망한 일이고, 되도록이면 멀리서 이름을 날려야 비로소 고향에서 환대받는 것이 인간사인지도 모르겠다.

    조선 영조 때 72현 뜻 기리는 제사 지내

    하지만 우리 안의 영웅 만들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 스스로 성현의 반열에 올려놓은 존재가 두 부류 있다. 유학의 줄기를 잡아, 조선 성리학의 산맥을 형성한 동국 18현이 그 한 부류다. 면면을 살피면 신라의 설총(薛聰)과 최치원( 崔致遠), 고려의 안향(安珦)과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로 대표되는 조선 14현이다. 그리고 또 한 부류가 고려 말의 두문동 72현이다.

    두문동(杜門洞)은 좀 생소한 명칭이다. 두문동은 북한 개성시 근교의 광덕산 서쪽에 있는 동네로, 필자 역시 여행작가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처음 접했다. 동해안 왕곡마을을 들어서면서, 가장 오래된 민가 맹씨 행단에 머물면서, 단양팔경을 구경하면서, 정선아리랑의 유래를 들으면서 두문동 72현과 마주쳤다. 그들은 두문동이라는 한 공간에만 머물지 않고 전국에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후손들로부터 중시조나 문중의 큰 인물로 추앙받고, 지역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도대체 두문동 72현은 누구인가? 자연스럽게 그런 의문을 갖게 되었다.



    잊혀진 충신들의 발자취를 따라

    태조 왕건이 물을 마셨다고 전하는 숭의전 홍살문 앞의 어수정.

    우리에게는 두문동보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 말이 더 익숙하다. 사실 두문불출은 두문동에서 생긴 말이다. 두문동에 들어가서 꼼짝하지 않고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려 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고 고려 왕조에 충성을 다짐한 72명의 현자들이 두문동에 은거해 꼼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이방원이 주축이 된 개국세력이 산에 불을 지르고 몰아댄 바람에 죽거나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두문동의 존재는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부각되지 않았다. 새 역사의 창조에 동참하지 않은 반골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다 그들의 존재가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른 시기는 성리학의 ‘의리 명분론’이 강화된 조선 영조 때다.

    영조가 1760년 9월에 후릉(조선 2대 정종과 비 정안 왕후의 능) 참배차 개경 부근의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를 넘을 때의 일이었다. 영조가 지명의 연유에 대해 묻자 신하들이, 조선 태조가 즉위한 직후에 고려의 유신(儒臣)들이 출사를 거부하고 이 고개에 조복을 벗어놓고 달아났다고 해 부조현이라고 칭하며, 부조현을 지나면 두문동이 있다고 했다.

    이에 영조는 그들을 기려 그 해에 부조현비를 세우게 하고, 1751년(영조 27년)에는 고려에 절의를 지킨 두문동 충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두문동비까지 세우게 했다. 이때 처음으로 두문동 72현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그런데 350여년이나 지난 뒤인데, 두문동에 들어간 명단이 그때까지 잘 남아 있어서 72현이었을까? 그건 아니다. 우리 안의 영웅을 꼽았다고는 하지만 동국 18현, 즉 동쪽나라 18현에서 알 수 있듯이 두문동 72현 또한 중화사상의 그림자 안에 있다. 공자의 제자이며 중화의 대표적인 현인으로 72현이 꼽히는데, 그에 견줄 만한 상징적인 존재로 72현을 두문동 충신으로 꼽은 것이다.

    이방원 탄압 후 전국 각지로 퍼져 은둔

    그 때문에 두문동 72현의 명단이 72명으로 고정된 최초의 문헌은 고종 9년(1872년)에 나타난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荇)의 후손이 편찬한 문집 ‘기우집(騎牛集) 임신본(壬申本)’이 그것이다. 그리고 두문동 72현을 새롭게 꼽은 또 다른 문헌은 1924년에 강호석이, 철종 11년 (1860)에 간행된 ‘화해사전(華海師全)’의 명단을 참조해 작성한 ‘전고대방(典故大方)’이란 인물지(人物誌)다. 물론 두 문헌은 명단에서 큰 차이가 있다. 겹치는 인물이 30명이고, 42명이 서로 다르게 선정되어 있다. ‘기우집’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 말 충신들을 포괄적으로 선정했고, ‘전고대방’은 두문동에 들어갔던 시기를 중심으로 좁혀 뽑아 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우리는 왜 다시 두문동 72현을 찾아나서려 하는 것일까? 두문동 72현은 단순히 충절을 지킨 상징적인 인물로 전해오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중앙을 떠나 은둔생활을 했고, 그 은둔지를 중심으로 한 가문이 새롭게 형성돼 지역사회의 정신적 지주 구실을 하게 된다. 조선 후기에 예학이 강조되고 보학(譜學)이 강화되면서, 두문동 72현을 조상으로 둔 후손들이 선조를 기리는 작업도 많이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들의 이름이 이 땅의 한 지리적인 공간과 동행하고 있다.

    연재를 시작하는 마당이니 개성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임진강 가에 있는 숭의전(경기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을 찾아가 보았다. 숭의전은 1397년(태조 6년)부터 고려 왕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조선 왕조가 고려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마련해준 공간이다. 남한 땅에서는 고려 왕조를 기리는 거의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건물은 6·25전쟁 때 전소되어 1973년에 새로 건립되었으며, 고려왕 4인과 고려 충신 16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숭의전 앞 임진강을 따라가면 신라 마지막 왕의 능인 경순왕릉(경기 연천군 장남면 고량포리)이 나온다. 그래도 고려는 왕조를 지켜내려는 충신들의 이름이라도 남아 있지만, 신라는 그마저도 없다. 이 땅에서 충신열사는 국가 차원이 아니라, 문중 차원에서 지켜지는 경향이 강하다. 충신열사가 나와서 문중이 커지기도 하지만, 문중이 강해야 충신열사도 지켜낸다. 이제 두문동 72현, 그들의 운둔지와 문중을 찾아 길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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