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5

2005.07.26

베르시에서 만난 ‘파리의 미래’

  • 류혜숙/ 건축전문 프리랜서 archigoom@naver.com

    입력2005-07-21 18: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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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시에서 만난 ‘파리의 미래’

    ‘파리의 미래’라 불리는 베르시의 벵센 숲 전경.

    세계 최고의 포도주 생산국 프랑스. 불꽃과 핏빛으로 물든 대혁명 속에서도 노트르담 가득 포도주를 저장했던 민족이 그들이다. 그러나 파리 시내에서 그 흔적을 찾는다면 몽마르트르의 인적 드문 뒷거리에 남아 있는 파리의 마지막 포도밭이나 상점의 진열대 가득 얌전히 누워 있는 와인 병 정도랄까. 그외에 또 하나가 있다면, 현대의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어디선가 달콤쌉싸래한 포도주 향이 흘러나오고 오크통을 둘러멘 건장하고 잘생긴 청년이 “실례합니다, 마드무아젤” 하고 말을 걸어올 것만 같은 곳, 바로 베르시 구역이다.

    미테랑도서관에서 센강의 맞은편에 걸쳐 넓게 펼쳐진 베르시 구역은 원래 수백 년 동안 와인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지금의 공원 자리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포도주 창고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전성기를 이룬 기계주의와 기능주의가 추구하는 새로운 도시 개념에 따라 파리에도 대규모 주거지역이 들어서고, 도시 확장으로 인해 포도주 창고가 외곽으로 이전되면서 그 자리에 베르시 지역이 건설된 것이다.

    현대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연속성 유지

    베르시에서 만난 ‘파리의 미래’

    바스티유광장(위).<br>뛰어난 조형성을 자랑하는 미 문화원.

    그러나 베르시 구역의 개발은 20세기 중반 기능주의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면서 도시다운 도시를 만들자는 슬로건 아래 현대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연속성을 유지하는 도시 개발에 초점이 맞춰졌다. 1987년 설계 공모를 통해 선정된 ‘베르나르 위에’ 공동팀의 계획안은 녹지를 기본 구획으로 삼아 포도주 창고라는 땅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베르시 공원에는 예전 포도주를 운반하던 레일이 그대로 남아 있다. 포도 순 모양으로 표현된 식재 유형들과 주민들이 참여하여 가꾸는 작은 과수원, 그리고 베르시 빌라주라는 이름으로 개조된 술 창고는 카페나 상점, 박물관, 제빵 아카데미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파리 사람들은 이곳이 20세기 마지막 공원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공원을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벼운 운동복과 슬리퍼 차림의 파리지앵이다. 공원과 경계 없이 접해 있는 주변의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공원은 정원과도 같다. 이 또한 기존의 포도주 공장의 위치와 주변 건물 배치를 존중하고 센강으로의 접근성을 고려한, 옛것을 존중한 계획에 의해서다. 건축가 앙리 시리아니나 포잠박 등이 설계한 재개발 아파트를 감상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공원의 왼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미 문화원 건물.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뛰어난 조형성의 이 건물은 바로 프랑스 영화의 미래인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새로운 둥지가 되기 위해 보수작업 중이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미 문화원 건물이 어디냐’고 묻는 것보다 ‘이상하게 생긴 건물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게 빠르다.

    베르시에서 만난 ‘파리의 미래’

    철길이 그대로 남아 있는 베르시 공원과 공원 안에 있는 상점들.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것은 정부에 대한 불신 해소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프로젝트가 무산되어 불신이 쌓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 디지털 혁명과 그에 따른 새로운 시네필의 요구에 응답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파리시 녹지 면적 절반을 품고 있는 곳

    미 문화원 건물을 등지고 바스티유광장을 향해 걸으면 베르시 구역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큰길이 나온다. 도로에는 자동차가 다니고 보도에는 사람들과 상점이 가득한 이 길은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데 비밀은 공중에 있었다. 도로와 평행하게 이어진 구름다리에는 1800년 중반에서 1970년까지 바스티유와 벵센 숲을 잇는 철길이 있었다. 그 철길을 개조해 초록의 산책로를 만든 것이다.

    건축가 필립 마티외와 조경사 자크 베르글리가 탄생시킨 이 산책로는 육교나 터널, 아치 같은 기존의 인프라스트럭처(사회적 생산기반)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녹음이 우거진 산책로를 걷다 보면 이곳이 구름다리 위라는 사실을 잊는다. 오른쪽에는 산책로와 평행되게 건물들이 이어진다. 이따금 나무 잎사귀들 사이로 건물의 작은 창이나 지붕의 굴뚝들을 만나는 뜻밖의 즐거움,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는 장애인을 위한 리프트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구름다리 아래, 산책로를 지지하는 아치 부분은 도자기나 유리공예, 가구, 악기 등을 만드는 장인들의 작업 공간과 판매 공간으로 채워져 있다. 건축가 파트리크 베르제와 장 미셸 빌모트가 만들어낸 이 공간은 보행자들의 눈과 마음 속에 전통적인 장인의 손길을 영원히 간직케 하고, 베르시의 개발 속에서도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정점이다.

    그들 스스로 파리의 미래라 부르는 베르시 구역. 그곳은 파리 시내의 공원 면적 중 47%, 즉 파리시의 녹지 면적 중 절반을 품고 있다. 그들은 미래를 자연과 현재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 그리고 옛것과의 조화 속에서 찾는다. 그 모든 것이 공존하고 있는 곳, 베르시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기가 오르고, 그럴수록 눈은 번뜩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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