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1

2005.02.01

추억 나들이 짧지만 긴 여운

  • 글·사진=허시명/ 여행작가 www.walkingmap.net

    입력2005-01-26 19: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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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 나들이 짧지만 긴 여운

    개조한 순환열차.

    주중, 도심 한복판에서 일을 하다, 혹은 길을 걷다 말고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웬만한 데는 돌아올 일이 걱정돼 출발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이럴 때, 딱 좋은 여행이 있다. 게다가 창 가득 풍경을 싣고 달리는 기차 여행이기까지 하다. 시간은 수요일과 목요일 저녁 7시15분, 서울의 한복판 서울역에서 기차는 당신을 기다린다.

    퇴근한 뒤거나, 아이들에게 이른 저녁을 차려주고 훌쩍 나온 사람들이 기차에 오른다. 기차는 당신이 보아왔던 여느 기차보다 쾌적하고 아름답다. 한 량에 3억원이라는 무궁화호 열차를 한 량당 2억원씩 들여 개조한 것이다. 모두 7량으로 이루어진 기차는 전체 좌석 198개, 전망 창을 갖춘 전망실과 유리 칸막이가 있는 아늑한 별실을 뒤에 달고, 가운데는 이벤트실과 카페, 나머지는 일반 객실이 이어져 있다. 객실의 안정감 있는 나뭇잎 빛깔의 의자가 널찍하게 느껴진다. 객실 바닥과 벽은 물론 화장실이 딸린 서비스 공간까지도 온통 원목 무늬 소재로 마감돼 있어 한결 아늑하고 깔끔한 분위기다. 화장실도 작으나마 호텔식 분위기를 한껏 냈다.

    오랜만에 이 기차에서 친구를 만나는 이들도 보인다. 왜 뜬금없이 기차를 타자고 했냐며 친구는 웃는다. 여고 동창생 같은 아주머니들도 보이고, 연인들도 보인다. 멀리 갈 수도 아주 가버릴 수도 없지만, 떠난다는 일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드디어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분 좋은 가슴의 동계(動悸)가 시작된다. 기차는 서울의 중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미끄러져간다.

    추억 나들이 짧지만 긴 여운

    술을 싫어하는 분에게는 무알코올 음료가 제공된다.

    서울역을 출발해서 신촌, 능곡, 송추, 장흥, 의정부, 청량리를 거쳐 한강의 강변을 지나 용산에서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오는 서울 야경 순환열차에 당신은 올라 있다. 이 열차는 1963년에 태어나 2004년 5월에 생을 마감한 교외선 열차의 후신이다.



    기차에는 칵테일과 마술, 그리고 음악이 실려 있다. 시작은 칵테일 페스티벌이다. 젊은 친구들이 현란한 몸동작으로 칵테일 쇼를 보여주고, 그렇게 해서 만든 칵테일을 승객들에게 한 잔씩 돌린다. 안주로 삼을 만한 다과도 한 접시씩 나눠준다. 칵테일 향기에 한결 느긋해진 눈앞으로 수색과 화전의 들과 능곡의 아파트 불빛 숲이 지난다. 이번에는 몸집이 새처럼 작은 검정 양복의 앳된 마술사가 나타난다. 마술사는 겁도 없이 코 앞으로 손을 들이밀며 마술을 시작한다. 두 눈 똑똑히 뜨고서도 승객들은 눈속임을 당한다. 기분 좋은 속임수에 탄성이 절로 터진다. 이 칵테일 페스티벌과 마술쇼는 객차를 직접 돌며 찾아다닌다.

    추억 나들이 짧지만 긴 여운

    이벤트홀에서 열리는 라이브 공연은 20대 청춘으로 시간을 돌려놓는다.

    저녁을 먹지 못하고 기차에 올라 속이 출출하다. 작정하고 나선 사람들은 챙겨온 도시락을 꺼내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도시락이 없어도 상관없다. 카페 칸에 가면 저녁을 먹을 수도 있고 맥주를 마실 수도 있다.

    북으로 달린 기차가 능곡을 지나 원릉을 향해 가는 들판에 이르자 달이 기다리고 섰다. 쓸쓸하고 한적한 서울의 북쪽 단층집 마당을 비추는 가로등이 이어 차창에 실린다. 이벤트홀에서 음악 라이브 공연이 시작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이벤트홀에는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찼다. 초대 가수는 거의 매번 바뀐다. 이번의 라이브 공연 주제는 ‘추억의 발라드’다. 역시 음악은 라이브가 최고다. 사랑과 이별에 대한 가사가 시간을 되돌려놓는다. 중년 부부들도 어느새 청바지 차림의 스무 살 청년이 되어버린다. 참으로 오랜만에 유행가 가사의 주인공이 되어본다.

    발라드 무대가 끝나자 이번에는 ‘낭만의 라이브 콘서트’가 이어진다. 정종훈이라는 가수가 나와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전인권에서 조용필, 임지훈에서 윤도현까지 원하는 대로 불러준다. 모두가 손뼉을 치며 신청곡을 따라 부른다. 따뜻한 바닷물 같은 음악을 실은 채 기차는 이제 일영을 지나 장흥을 건너 송추의 밤풍경을 차창에 싣고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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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노랫말 속 주인공이 되어 박수 치고 함께 노래 부르며 의정부를 지나 성북, 청량리, 서울로 되돌아 들어온다. 한껏 고조되었던 분위기는 앙코르에 이은 앙코르 곡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이제 모두 자리로 돌아가 추억 속에 빠졌던 자신을 건져올려 말리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차창에는 야경만이 아니라 내 모습도 어린다. 기차가 응봉에 접어들 무렵 객차의 불이 일제히 꺼진다.

    이제부터는 길고 조용히 펼쳐지는 한강 다리의 불빛과 강물에 어린 불빛을 감상한다. 제자리에 앉아서 감상해도 좋고, 좁긴 하지만 전망실로 옮겨도 좋다. 강물에 어린 가로등 빛이 촛불 같다. 오팔처럼 아름다운 한강 다리들이 나타난다. 이토록 반겨주는 화려한 서울의 불빛은 살아오는 동안 처음인 듯하다.

    기차가 서울역 제자리로 되돌아온 시각은 9시40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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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술 쇼를 선보이고 있다.

    연애할 때 와봤던 곳을 처음으로 다시 가봤다고 즐거워하는 중년의 부부가 팔짱을 낀 채 총총히 사라진다. 한결 애틋해진 연인들은 아직 기차 부근을 떠나지 못하고 사진을 찍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긴 세월을 훌쩍 뛰어넘게 해준 여행을 마치고 2차를 하러 떠나기도 한다. 함께 밤나들이를 나온 동창생들끼리 “다시 볼 때까지 안녕하라”며 살뜰히 손을 흔들어주기도 한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을 때 서울 야경 순환열차에 올라보라. 도심 속에서 짧은 시간을 함께했을 뿐이지만, 생과 꿈의 한 부분을 공유했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여행 정보

    요즘은 인기가 좋아 보름 전에 예약해야 야경 열차를 탈 수 있다.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밤 7시15분, 서울역에서 출발하며 비용은 2만9000원이다. 이 관광열차가 다른 날에는 강원도 눈꽃여행도 다닌다. 정동진 백두대간 눈꽃기차여행(2월4일까지 운행) 무박 2일, 서울역을 출발해 청량리를 거쳐 정동진과 백봉령, 정선을 거쳐오는 여정이다. 주중 4만9900원, 금·토요일은 5만6600원이다. 여행상품은 KTX 관광레저㈜가 주관한다. 예약 02-393-3100, 문의 1544-7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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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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