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0

2003.01.30

해질녘 ‘꽃지’에 서면 가슴은 운다

  • 강은옥 dreamloco@hanmail.net

    입력2003-01-23 10: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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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이는 여행을 ‘훌쩍 떠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가 돼버린 이 사회에서 삶의 교훈을 체득할 수 있는 여행마저 ‘가볍게 떠나고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는 효율성에 희생돼버린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느끼고 준비한 만큼 배우고 오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진리다. 그런 점에서 기차여행은 꼼꼼한 계획이 필요하다. 기차 출발시간에 맞추려 서둘러야 하고 돌아오는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여행지에 머무는 시간마저 적절히 안배해야 한다. ‘훌쩍 떠나서’는 될 일이 아니다. 이러한 여행에서야말로 인식을 확장하고 마음을 토닥거리는 진정한 ‘자신으로의 여행’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해질녘  ‘꽃지’에 서면 가슴은 운다
    서해에 위치한 안면도는 섬 전체가 기다란 고구마처럼 생겼다. 볼거리, 먹을거리가 다양한 데다 교통이 편리해 어느덧 유명 여행지가 된 곳.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시끌벅적하게 다녀올 만한 여행지로도 좋지만 새해를 맞는 1월인 만큼 혼자서 혹은 연인끼리 단출하게 다녀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고 했다. 그 섬에는 분리와 단절, 고독이 오롯이 스며 있다. 사람들은 그 고독을 짐짓 못 본 체한다. 그러나 늘 피하는 것에만 익숙한 우리들에게 외딴 섬은 때론 고독한 여행을 즐겨보라며 손짓한다.

    안면도에 가려면 서울역이나 영등포역에서 장항선을 타고 대천역에서 내려야 한다. 일반 무궁화호로는 2시간40분, 새마을호로는 2시간20분 가량이 소요된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재미있는 볼거리가 하나 있다. 청소역과 광천역 사이에 위치해 있는 김좌진 장군의 묘가 바로 그것. 요즘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 ‘야인시대’의 주인공인 김두한의 부친 묘다. 장항선을 운행하면서 김좌진 장군의 묘를 가끔 봤는데, 야인시대가 인기를 끈 후부터 그분의 묘에 꽃이며 화환이 부쩍 늘었다. 객차 안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2~3분이니 장군의 묘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목을 빼고 눈을 크게 떠야 한다.

    대천역에서 내린 다음 대천항까지는 버스를 타야 한다. 역 근처에 버스터미널이 있기 때문에 가는 길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대천항에서 하루 4회(오전 8시40분, 12시, 오후 2시20분, 4시50분) 운항하는 페리호를 타면 안면도에 도착할 수 있다. 물론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갈 수도 있지만 페리호를 타고 겨울바다만의 색다른 모습을 음미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휴양림에 코 만족, 대하에 입 만족

    해질녘  ‘꽃지’에 서면 가슴은 운다

    안면도 특산품인 자연산 대하와 생굴을 채취하는 아낙네들(오른쪽).

    안면도 최고의 볼거리라면 단연 ‘할미·할아비 바위’다. 꽃지해수욕장에 위치한 이곳의 일몰은 우리나라 3대 일몰 중 하나이기도 하거니와 바위에 서려 있는 전설이 애달퍼 유명한 곳이다. 신라시대 때 이곳 안면도를 지키던 승언 장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남편을 기다리던 승언 장군의 아내는 결국 할미바위가 되었고, 거친 파도에 떠밀려 이곳까지 오게 된 승언 장군의 시신이 그 옆의 할아비 바위가 됐다는 내용이다. 밀물일 때는 두 개의 바위가 물에 잠겨 서로 헤어지지만 썰물일 때는 마치 손을 잡고 있는 듯 두 바위가 연결되어 있다. 끝내 함께하지 못했던 전생의 업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겨울철의 일몰은 오후 5시경부터 시작된다. 처음에는 푸른빛 하늘에서 은색으로, 다시 황금빛으로 변하는 일몰과 검게 변하는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느닷없이 서러운 감정이 들기도 한다. 정호승 시인의 ‘바닷가에 대하여’에 이런 구절이 있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다’.

    일몰 직전, 그러니까 밀물이 들어오기 바로 전, 섬 아낙들은 모래톱 인근의 작은 바위에서 생굴을 채취해 소주와 함께 관광객들에게 판다. 한 접시에 5000원, 1만원 하는데 ‘소비자 가격’이 없으니 적당히 흥정한 다음 알맞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취기 속에서 일몰을 감상하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듯하다.

    해질녘  ‘꽃지’에 서면 가슴은 운다

    안면도 내 소나무 자연휴양림과 휴양림 안의 펜션(왼쪽).

    안면도 내의 소나무 자연휴양림은 500년 넘도록 잘 관리해온 거대한 소나무 군락지다. 무려 3500ha에 이르는 거대한 면적도 면적이지만 고려시대 때부터 이곳의 소나무로 궁궐이나 선박을 지었으며, 경복궁의 자재로도 이곳 소나무를 사용했다고 한다. 왕족이 죽으면 그 관도 이 소나무를 이용해 만들었다고 하니 수종의 우수함을 짐작할 수 있다.

    숲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이다. 그 상쾌한 향기가 집중력을 향상시킬 뿐 아니라 몸에도 좋다고 해서 다들 그렇게 한다. 그런데 그런 행동들이 이기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끝간 데 없는 욕망으로 숲을 파괴만 해왔던 인간이 과연 그 상쾌함을 맛볼 자격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상쾌한 공기는 좋건만 휴양림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이 영 마뜩찮다. 자연이 끊임없이 도구화돼 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숲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특한 향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단순히 나무가 많아서일까? 휴양림 관리인은 ‘나무나 풀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미생물을 막기 위해서 뿜어내는 방어제’라고 설명한다. 침엽수의 경우는 겨울 찬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분비하는 물질이라는 것이다. 한없이 약해 보이기만 하는 풀이며 나무들도 인간 못지않은 강인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롭다.

    안면도 여행에서 저녁이면 해변가에서 맛보는 해산물을 빼놓을 수 없다. 안면도의 백사장항은 자연산 대하의 집산지. 꽃게며 대하가 일년 내내 넘쳐난다. 꽃게찜에 대하를 차려놓고 파도소리를 친구 삼아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덧 겨울바다 바람이 매섭게 변해 있다. 바삭바삭 껍질째 씹어 먹는 대하 소금구이 맛은 정말이지 잊을 수 없다.

    다음날 아침, 이곳에서 ‘바지락 해장국’ 한 사발이면 숙취는 말끔히 사라진다. 특히 이곳 바지락은 씨알이 굵고 담백해서 전국 최고로 손꼽힌다. 인심 좋은 ‘할매’가 끓여내는 해장국을 먹고 나면 다시 서울로 올라갈 힘이 솟는다.

    여행은 언제나 그렇듯, 마무리가 가장 중요하다. 서울에 도착하기 전까지 무언가 결심한 것을 다독여놓지 않으면 복잡한 도시의 빵빵거리는 경적소리가 이내 여행지의 감흥을 모조리 깨놓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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