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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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산속에 화원을 차렸나

발 닿고 눈길 머무는 곳 야생화 지천으로 널려…아름다운 “동양화” 한폭

  • 입력2005-11-14 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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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산속에 화원을 차렸나
    봄기운이 절정에 이른 이맘때쯤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야생화치고 화사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나 겨울이 유난히 모질고도 긴 강원도의 깊은 산중에서 피어나는 야생화는 따뜻한 남녘의 야산에 핀 꽃보다 그 빛깔이 더욱 또렷하고 자태 또한 곱기가 그지없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자란 이보다는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의연하게 우뚝 선 이들의 모습이 더 아름다운 것과 같은 이치다.

    또한 혹독한 삭풍과 거센 눈보라를 이겨낸 뒤끝이라, 이따금씩 가녀린 봄기운을 깨뜨리며 매섭게 몰아치는 산풍(山風)에도 좀체 꽃잎을 떨구는 법이 없다. 그러고 보면 이들 야생화의 습성은 숱한 역경과 외침을 이겨낸 우리 겨레의 성정(性情)과도 아주 흡사한 듯싶다.

    산 높고 골 깊은 강원도, 특히 수림(樹林)과 생태환경이 잘 보존된 계방산 방태산 점봉산 설악산 등지의 산비탈과 계곡에서는 저마다의 때깔로 화사하게 피어난 야생화들을 어렵지 않게 구경할 수 있다. 그중 가장 쉽게 야생화를 볼 수 있는 곳은 계방산(1577m) 자락의 운두령(1089m)이다.

    영동고속도로의 속사IC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홍천 방면으로 30여 분 가량 달리면 계방산의 허리를 돌아가는 운두령의 정상에 이른다. “구름도 울고 넘는 운두령 고개, 마지막 주고 간 말 공산당은 싫어요…”라는, ‘반공소년’ 이승복의 추모가에 나오는 바로 그 고개다. 이곳 고갯마루의 공터에 차를 세우고, 주변 참나무 숲으로 몇 발자국만 걸음을 옮기면 도회지 처녀처럼 세련되고 화사하게, 또는 순박한 산골 색시처럼 수줍게 핀 꽃을 만날 수 있다. 넉넉하고 기름진 백두대간의 한 자락이니만큼 꽃의 종류와 수도 매우 다양하다. 꿩의바람꽃 괭이눈 얼레지 피나물 현호색 등이 지천으로 깔렸는데, 그 중에서도 무리지어 흐드러지게 피어난 꿩의바람꽃 얼레지 괭이눈 등은 숫제 산중화원(山中花園)을 이룬다.

    운두령 정상에서 인제군 기린면 소재지인 현리까지의 약 150리 길은 여유롭고 아늑한 드라이브코스가 이어진다. 또한 국도라고는 해도 차량 통행량이 많지 않으니 차창 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달려도 길을 재촉하는 이가 없다. 더군다나 도로 양옆의 산자락에는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린 진달래 산벚꽃 산복사꽃 돌배꽃과 싱그러운 연두빛의 나무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홍천군 내면을 관통한 31번 국도는 인제군 상남면의 오미치라는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명경지수(明鏡止水) 같은 내린천의 물길과 나란히 달린다.

    요즘 같은 봄날의 내린천에는 하얀 돌단풍꽃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물가의 단단한 바위틈에다 뿌리를 박고서 무더기로 꽃부리를 펼치는 돌단풍의 꽃과 잎은 내린천의 물빛만큼이나 정갈하고 새뜻하다. 게다가 돌단풍이 한창 꽃을 피울 무렵이면 철쭉도 만개하여 한 폭의 수채화처럼 화사한 풍경을 연출한다.

    누가 산속에 화원을 차렸나
    내린천은 기린면 현리에 이르러 방대천의 물줄기를 보탠다. 점봉산(1424m)의 서남쪽 골짜기에서 발원한 방대천을 따라 이어지는 418번 지방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지를 거쳐가는 지방도인데, 이 도로가 지나는 기린면 방동리와 진동리 일대는 예로부터 첩첩산중으로 이름나 있다. 정감록(鄭鑑錄)에 나오는 ‘삼둔사가리’의 피난지소(避亂之所) 중에 ‘사가리’가 바로 이 지역의 아침가리 연가리 적가리 명지가리를 가리킨다고도 한다.

    418번 지방도를 따라 현리에서 진동리 쪽으로 8km쯤 가면 방동 삼거리에 이르고, 여기서 방동교를 건너 다시 십리 가량 들어가면 방태산 자연휴양림이다. ‘주억봉’으로도 불리는 방태산(1443m)은 구룡덕봉(1388m) 깃대봉(1436m) 등과 함께 인제군 기린면과 상남면의 경계를 이루는데, 산자락마다 박달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등의 활엽수림이 울창해서 말 그대로 수해(樹海)를 이룬다.

    산이 높고 숲이 울창하면 골짜기 또한 길고도 깊다. 이곳에도 대골 적가리골 골안골 등과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여러 골짜기들이 곳곳마다 실핏줄처럼 뻗쳐 있다. 그중 ‘사가리’의 하나인 적가리골에 방태산 자연휴양림이 들어서 있다. 이 골짜기에는 한때 정감록 따위의 비결을 믿고 멀리 함경도에서 이주해온 70여 가구의 주민이 살았으나 언젠가부터 하나둘씩 떠났다고 한다. 그러다 이곳에 다시 외지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지난 97년에 방태산 자연휴양림이 개장된 뒤부터였다. 그 이전에 개설돼 있던 임도는 운치 좋은 숲길로 다듬어지고, 풍광 좋은 계곡 곳곳에는 산림문화휴양관(통나무집) 야영장 정자 나무다리 등의 편의시설이 새로 설치됐다.

    적가리골의 비경은 산림문화휴양관 앞에서부터 하나둘씩 자취를 드러낸다. 휴양관 바로 앞쪽의 물가에는 곱게 핀 진달래와 어우러진 마당바위가 있고, 여기서 흙길을 따라 400m쯤 더 올라가면 적가리골 최고의 절경인 ‘이폭포저폭포’에 이른다. 각기 10m 3m쯤 되는 두 개의 폭포가 위 아래에 나란히 자리잡은 데다 주변에는 각종 활엽수가 울창해 사시사철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방태산 자연휴양림 초입의 방동리를 지나면 418번 지방도는 본격적으로 진동계곡에 들어선다. 맑은 계류와 앞다투어 피어난 꽃들이 자아내는 봄날의 정취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길이다. 이곳 길가와 물가에서도 진달래 산벚꽃 돌단풍 등의 봄꽃이 흔하게 눈에 띈다.

    이 지방도는 진동리 진흑동마을을 지난 지 조금 뒤에는 비포장도로로 바뀐다. 그리고 양양군 서면 서림리에서 56번 국도와 만날 때까지 이어지는 비포장 구간의 막바지에서는 조침령이라는 험준한 고개도 하나 넘어가야 한다. 조침령은 지프형 승용차라면 거뜬히 넘을 수 있는 고갯길이지만 일반승용차로 넘어가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나 얼마쯤의 고생을 각오하고 조침령에 올라서면 장중하고 웅대한 백두대간의 연봉(連峰)을 한눈에 조망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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