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80

2011.03.28

그가 입 열 때마다 감동이 온다

톰 후퍼 감독의 ‘킹스 스피치’

  • 강유정 영화평론가·국문학 박사 noxkang@hanmail.net

    입력2011-03-28 1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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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입 열 때마다 감동이 온다
    ‘말더듬이 왕이 성공적으로 연설을 해내다.’ 영화 ‘킹스 스피치’는 ‘말더듬이’와 ‘왕’이라는 운명적 부조화에서 시작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대중 앞에서 연설할 일이 몇 번이나 될까. 어쩌면 한 번도 없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말을 더듬지만 어쩔 수 없이 연설을 해야 한다. 이는 왕의 책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왕과 말더듬이의 운명에 대해 ‘킹스 스피치’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한다. 말더듬이 왕이 아니라 왕이기 때문에 말을 더듬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저명한 언어치료사를 여럿 만나도 별 방도를 찾지 못하던 조지 왕(앨버트)은 라이오넬 로그라는 치료사를 찾아간다. 그는 지금까지의 치료사들과 달리 자신을 친구처럼 부르고 사적인 이야기나 하자고 말한다. 치료도 자신의 공간에서 자기 스타일대로 할 것이며, 여기는 자신의 작은 왕궁이므로 자신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요청한다.

    라이오넬은 이어폰을 낀 채 책을 읽게 하고, 체력훈련과 담력훈련도 실시한다. 그런데도 조지 왕의 증세는 그다지 좋아지지 않는다. 조지 왕의 말더듬증은 신체적 증상이긴 하지만 정신적 증후군에 더 가깝다. 왕족이라는 부담감, 둘째 아들로서의 모호한 위치, 장자인 형에 대한 콤플렉스 등이 위험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조지 왕은 평민인 라이오넬에게 어린 시절의 상처 하나씩을 내보인다. 아버지의 기대를 따라야 했던 부담부터 유모의 구박까지. 그러면서 그는 점점 라이오넬과 친구가 된다. 라이오넬의 규칙에 따르면 대중연설도 ‘친구에게 말하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진실되게 말할 수 있다면 그 마음으로 수백, 수천만 대중에게도 진실을 전달할 수 있다. 연설 역시 말하기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말더듬이 왕의 치료 과정을 주축으로 하지만 그 안에는 불미스러운 일로 하야하게 된 형, 이후 젊은 형을 둔 채 왕위를 이어야 했던 동생의 고민도 드러난다. 왕이 되고 싶지만 될 수 없는 서자의 갈등이 바로 말더듬증이라는 신체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두 번째 이혼을 앞둔 여자와 사랑에 빠진 형은 왕위를 포기하고 왕가를 떠났다. 또 하나의 난점은 1930년대라는 배경,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이라는 점이다. 조지는 이 엄혹한 시기에 왕이 됐다.



    ‘킹스 스피치’는 우리에겐 낯선 이국 과일의 맛과도 같은 작품이다. 말끝마다 “하이니스”라고 존경을 표하는 왕궁식 인사법이나 왕, 여왕이란 칭호까지도 마치 여행엽서 속 버킹엄 궁전처럼 낯설다. 이 낯선 이국성 가운데서 관객을 끌어들이는 힘의 진앙은 바로 콜린 퍼스의 연기다. 힘들여 첫 단어를 발성하는 퍼스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러다 나도 말더듬이가 되진 않을까 공포를 느끼게 된다. 말더듬이의 두려움과 절실함을 제대로 전달한 것이다.

    어쩌면 조지 왕에게 말더듬증은 숙명적 저항이자 직업적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책을 일 삼아 읽는 사람이 난독증에 더 쉽게 걸리듯, 무의식의 억압은 신체를 억누르기도 한다. 인간 승리의 드라마라기보다는 너무도 허약한 의식 탓에 앓을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통증에 공감하게 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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