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0

2008.11.11

자기모순에 빠진 인간들 그리고 컴퓨터의 쿠데타

  • 영화평론가 ohdjin@hanmail.net

    입력2008-11-05 11: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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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모순에 빠진 인간들 그리고 컴퓨터의 쿠데타

    ‘이글 아이’는 그동안 할리우드가 디스토피아적 미래관을 선보여왔던 SF영화의 총집합적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대중적으로는 ‘디스터비아’부터 이름을 알렸지만 사실 D.J. 카루소 감독은 ‘발 킬머의 집행자’ ‘테이킹 라이브즈’라는 작품을 만든 중견의 상업영화 감독이다. 감독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카루소도 유명해지기 전의 영화에서 오히려 쏠쏠한 작품 맛을 냈다. 예컨대 ‘발 킬머의 집행자’는 다소 엉성하지만 거칠고 때묻지 않은 느낌이 난 작품이었다. 카루소는 주류로 들어서면 들어설수록 자신의 오리지낼러티를 상실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번 신작 ‘이글 아이’는 그의 작품이라기보다 제작자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입김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글 아이’는 그동안 할리우드가 디스토피아적 미래관을 선보여왔던 SF영화의 총집합적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카루소는 범죄스릴러가 장기인 감독이다. SF는 스필버그의 것이다. 이번 영화는 특히 스필버그가 자신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보여줬던 비관주의적 세계관, 빅 브라더의 감시체제가 만들어내는 숨막히는 세상의 문제를 좀더 확장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글 아이’에는 과거로부터 전설로 이어져오는 SF영화들이 오마주의 형태로 부분부분 담겨 있다. ‘이글 아이’의 초절정 인공지능 대형 컴퓨터인 ‘아이라’는 명백히 스탠리 큐브릭이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에서 창조한 컴퓨터 ‘할’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스필버그는 큐브릭의 천재성을 잇고 싶은 것이다. 컴퓨터 혹은 로봇이 인간을 위협하고 살해하는 등 관계를 재정립하고 스스로 인간이 되려 한다는 설정은 ‘바이센테니얼맨’과 ‘아이 로봇’에서 목격한 이야기들이다.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에서 ‘마이너리티 리포트’까지, 그걸 SF문학적 관점으로 보면 아서 클라크에서 아이작 아시모프와 필립 K. 딕에 이르기까지 스필버그가 이번 영화를 통해 이루려는 야심은 자못 거대한 것이다. SF의 결정판을 만들겠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글 아이’가 재미있는 것은, 아이작 아시모프가 얘기했던 ‘로봇 3원칙’을 이 영화의 주인공 격인 지능컴퓨터 ‘아이라’가 왜 위반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치적 설정이다. 그것 참 재미있다. 일단 다시 한 번 들춰본다는 의미에서 ‘로봇 3원칙’을 얘기하면 이렇다. 제1 원칙.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되며,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다치도록 방관해서도 안 된다.’ 제2 원칙. ‘원칙 1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 원칙. ‘원칙 1, 2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이글 아이’의 ‘아이라’는 인간을 죽이려 한다. 그것도 미국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과 그의 내각 인사들을 모두 해치려 한다. 그래서 정부를 전복하고, 그나마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던 국방장관을 내세워 새로운 행정부를 구성하려 한다. 이건 명백히 쿠데타다. 그런데 왜 ‘아이라’는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그건 이 영화의 도입 부분을 잘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은 이라크 지역 내를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미사일로 표적 폭격을 감행한다. 검거 혹은 제거할 요량의 주요 테러리스트가 ‘있는 것 같다’는 제보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 제보는 인간에 의한 것이었고, 철저하게 객관적 자료에 의거해 결론을 내리는 ‘아이라’는 불확실하다며 미사일 공격을 중지할 것을 권유했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죄 없는 민간인들의 상당수는 학살을 피하지 못했다. ‘아이라’가 ‘미친’것은 이때부터다. 그녀(목소리가 아주 매력적인 여성이기 때문)는 로봇의 제1 원칙을 스스로 위반하는데, 이건 어찌 보면 역설적으로 제1 원칙을 지키는 행위가 된다. ‘아이라’는 더 많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소수의 인간을 제거하려 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할 수 없다는 원칙을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모순에 빠진 건 인간이지 컴퓨터가 아닌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깊은 SF 철학을 적용하고, 아서 클라크가 만들어냈던 컴퓨터 ‘할’의 이미지를 증폭시키면서 스필버그는 미국의 현실정치에 대해 자신의 속내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지금의 부시 행정부를 어쨌든 교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영화 속 컴퓨터 ‘아이라’가 아니라 바로 스필버그 자신인 셈이다.

    하이테크놀로지의 종합판 ‘볼거리 풍성’

    자기모순에 빠진 인간들 그리고 컴퓨터의 쿠데타

    ‘이글 아이’를 보고 있으면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가 강한 할리우드 영화작가들의 정치관이 느껴져 흥미롭다.

    ‘이글 아이’를 보고 있으면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가 강한 할리우드 영화작가들의 정치관이 느껴져 흥미롭다. 부시 정권 8년에 대한 그들의 불만이 이젠 폭발 수준으로 바뀌고 있음이 느껴진다. 나아가 스필버그를 포함해 많은 할리우드 인사들이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버락 오바마를 찍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이건 오바마를 위한 영화다. 존 매케인 측에서 보면 기가 찰 노릇일 수도 있으며, 비록 레임덕이 최고조에 오르긴 했지만 백악관에 앉아 있는 부시는 ‘뚜껑이 열릴 정도로’ 화가 날 영화다.

    단순히 블록버스터급 상업영화 한 편을 가지고 지나치게 콘텍스트적으로, 정치사회적으로 분석하는 것에 대해 혹자는 ‘당신도 무슨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불만을 제기할 수도 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영화가 현실 정치체제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내는 건, 그만큼 그 사회의 언로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도 로봇처럼 제3 원칙을 지니고 있어서 ‘영화는 사회를 다치게 할 수 없다’고 해도, ‘이글 아이’의 ‘아이라’처럼 더 좋은 미래를 위해 현실을 조금 다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한다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한다고 면박을 당하게 될까.

    다른 것 다 집어치우더라도 ‘이글 아이’는 할리우드가 가진 하이테크놀로지의 수준을 최고조로 보여준 작품이다. 하지만 정작 부러운 것은 그 같은 기술력이 아니다. 바로 그런 기술력을 활용할 줄 아는 상상력이다. 세상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상상력에서 나온다. 이는 무라카미 류가 했던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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