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3

2008.02.19

CF퀸 이미지 이제 그만 생얼 눈빛 연기로 승부

  • 하재봉 영화평론가

    입력2008-02-11 13: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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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F퀸 이미지 이제 그만 생얼 눈빛 연기로 승부
    전지현이 언제까지나 ‘엽기적인 그녀’일 순 없다. 그는 너무 많은 시간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S라인으로 춤추는 CF 속 모습으로만 고정돼 있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시월애’(2000년)와 2002년 대종상 여우주연상과 인기상을 안겨준 ‘엽기적인 그녀’ 이후 기억할 만한 작품이 없다.

    공포영화 ‘4인용 식탁’(2003년)은 그의 연기력 확장에 기여하지 못했고, 곽재용 감독의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2003년)는 ‘엽기적인 그녀’에서 진일보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데이지’(2005년)는 정우성과 함께 한 장의 엽서처럼 멋진 그림을 만들 뿐이었다. 전지현은 거의 매년 한 편의 영화를 찍었지만 실패할 경우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다. 작품 선택이 좋지 못했고 자신의 재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런 전지현에게서 올해 들어 새로운 모습이 엿보인다. 황정민과 함께 출연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에서 그는 CF 요정이나 그림엽서 속 여성 이미지를 깨고 긴 생머리를 싹둑 자른 채 ‘생얼’로 나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었다. 또 일본 애니메이션을 영화화한 할리우드 진출작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에서 보여준 모습도 그동안과는 딴판이었다.

    “그동안 전지현이라는 이미지 틀에 갇혀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작품들은 적어도 이전 작품들보다는 덜 부끄럽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좋았다. 가볍게 웃고 넘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주제가 가슴에 와닿았다.”

    전지현의 이 고백은 그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으며 그것이 내적 성숙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려준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의 상대역인 황정민은 전지현에 대해 “눈이 변했고 스스로의 연기를 믿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전지현이 이 작품을 선택한 것도 황정민에 대한 믿음이 크게 작용했다.



    “자신의 배역뿐 아니라 상대 배우의 흐름까지 정확하게 짚고 단점을 지적해준다. 상대 배우로서 최고다.”

    정윤철 감독에 대한 전지현의 신뢰도 남다르다. “큰오빠 같아서 정말 편안하게 작업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말아톤’으로 멋진 신고식을 치른 정 감독과 아무렇게나 해도 예쁜 전지현, 그리고 한국영화의 슈퍼맨 황정민이 만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는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전지현은 생얼의 순수한 매력을 그대로 드러낼 뿐 아니라 외형적으로도 작품을 끌고 가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작품의 중심기둥이 돼야 할 황정민은 스스로 슈퍼맨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어 보인다. 그러면 관객들은 절대 그를 슈퍼맨이라고 믿을 수 없다. 내러티브는 매끄럽지 않고 어색하며 작위적이다. 정 감독의 연출은 ‘말아톤’ 때와는 달리 완급 조절에 실패하면서 부조화를 이룬다.

    CF퀸 이미지 이제 그만 생얼 눈빛 연기로 승부
    영상 프로덕션 송 PD 배역 작품을 끌고 가는 역할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의 내러티브를 끌고 가는 사람은 휴먼 다큐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영상 프로덕션의 송수정 PD(전지현 분)다. 이야기의 전개는 송 PD의 동선에 의해 이뤄진다. 이 영화는 자신이 슈퍼맨이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를 송 PD의 시각으로 바라본 것이다. 따라서 송 PD를 맡은 전지현의 비중은 적지 않다. 이야기의 문을 열고 닫는 역을 맡은 그는 관객들의 시선보다 한 발자국 앞서 슈퍼맨에게 접근하는 안내인이자, 특별한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선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관객들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전지현이 느끼는 부담은 클 수밖에 없었다.

    “수정이는 먹고살기 바쁜, 딱 요즘 사람이라서 처음엔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관객과 슈퍼맨을 연결해주는 연결고리 구실이 쉽지 않았다.”

    송 PD가 억지 신파의 휴먼 다큐멘터리 대신 차라리 아프리카에 가서 동물 다큐를 만들겠다며 회사를 뛰쳐나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밀린 월급 대신 들고 나온 카메라를 날치기당한 송 PD는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황정민 분)의 도움으로 교통사고 위험에서 구출되고 카메라까지 되찾는다. 울긋불긋 유치찬란한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그 남자는 자신이 슈퍼맨이라고 주장한다. 여학교 앞에서 나체쇼 하는 바바리맨을 응징하고, 지구온난화로 북극이 녹는 것을 막으려면 지구를 태양에서 멀리 밀어내야 된다며 물구나무서서 두 손으로 지구를 미는 기이한 행동을 하는 그 남자 슈퍼맨.

    이야기의 전반부는 송 PD와 슈퍼맨의 만남이다. 하지만 기이한 만남의 연속은 작위적이다. 송 PD가 카메라의 초점을 슈퍼맨에게 고정하고 그를 취재한다는 명분으로 슈퍼맨의 일상을 따라가지만, 슈퍼맨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타나 촬영하는 송 PD가 오히려 슈퍼맨 같다. 송 PD가 만든 ‘지구를 지켜줘요, 슈퍼맨’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끈다. 진실 이상으로 감동을 조장하는 데 능한 송 PD의 연출력 때문이다.

    그러나 슈퍼맨은 송 PD에게 진실을 알려주겠다면서 하수구로 데리고 간다. 괴물이 산다는 하수구는 냄새만 진동하고, 머리를 다친 슈퍼맨을 병원에 데려간 송 PD는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 이물질이 박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슈퍼맨은 그것이 자신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악당들이 집어넣은 크립토나이트라고 주장한다. 거기에 슈퍼맨이 복용했던 정신병원의 약봉지까지. 그는 정신병력이 있는 단순한 정신병자일 뿐인 것일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후반부, 슈퍼맨의 진심을 알고 수정이가 눈물 흘리는 장면이다. 이것은 수정이 내면의 변화로, 동시에 슈퍼맨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도 이끌어내야 한다. 그 장면을 사흘 동안 힘들게 찍었다.”

    그러나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의 이야기는 비틀거린다. 송 PD가 전지적 시점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시제는 원칙 없이 과거를 등장시켜 공감대를 얻는 데 실패한다. 장준환 감독이 ‘지구를 지켜라’ 결말 부분에서 시치미 뚝 떼고 이것이 진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폭력적 충격을 생성시킨 것과도 다르다. 그렇다고 슈퍼맨이라고 주장하는 한 정신병자의 이야기를 통해 감동이 사라진 시대, 이기심으로 물든 이 사회의 메마른 현실을 고발하기에는 턱없이 힘이 모자란다.

    영화 후반부에서 슈퍼맨의 감춰진 가족사가 나온다. 이것이 영화의 진짜 핵심이다. 그러나 송 PD가 감동을 조장하는 휴먼 다큐를 만들듯, 정 감독은 인위적으로 이야기를 비틀어 억지 감동을 주려고 한다.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슈퍼맨의 가슴 아픈 가족사를 등장시키는 것도 모자라 슈퍼맨의 아버지 세대가 겪었던 오월 광주의 비극까지 삽입한다. 그렇다고 개인사 차원의 감동이 집단적 차원으로 상승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정성이 부족한 무리한 시도가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조급해하지 않고 계속 다음 작품에 도전”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는 분명 호소력 있고 매력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의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을 만들지 못한 것은 작위적인 극작술 때문이다. 이야기는 중심을 잃고 자주 비틀거리며, 황정민의 연기도 내면적 확신 없이 땅 위를 부유한다. 전지현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장악력이 부족하고, 슈퍼맨과 만나면서 변하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기엔 약하다. 송 PD가 단순히 이야기의 문을 열고 닫는 역에 그치면 이야기의 감동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슈퍼맨을 만나면서 변하는 송 PD의 내면 상황은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영화가 전지현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영화라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많은 감정을 영화 속에서 표현할 수 있는 배우라는 직업은 행복하다. 배역에 따라 옷을 바꿔입는 것이다. 나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지금도 좋고, 앞으로는 더 좋아질 것이다. 배우로서 잘 살면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잘 산다는 것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하고 싶은 공부하면서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것이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는 처음으로 내 마음을 두드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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